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6화 (6/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6화

6. 탈출

“폐하.”

장내에서 왕건의 얼굴을 본 유일한 사람인 임희가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그 뒤를 따라 선필과 나, 재암성 군졸들도 모두 그 남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겨우 탈출해 재암성에 들어온 왕건은 먼저 선필에게 달려가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 선필의 얼굴을 보자마자 외쳤다.

“아빠!”

“예?”

선필은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과연 역사기록은 정확했다.’

그 광경을 보고 무릎을 꿇은 채로 새삼 내가 가진 자신의 지식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내 왕건이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내가 목숨을 건진 것은 오로지 선필 공의 덕이오. 선필 공이 내 부모님과 다름이 없소. 그래서 앞으로 아빠. 아니 상보라고 부르고 싶소.”

왕건이 선필의 두 손을 꽉 쥐고 말했다.

“폐하.”

그 말이 감격한 선필이 고개를 숙이는데 왕건은 더욱 힘껏 선필을 껴안았다.

‘선필을 포섭해야 살아남으니 당연히 저래야 하긴 하는데. 삼촌, 이모까지는 이해해도 아빠라고까지…… 어쨌든 보통은 아니야.’

내가 새삼 감탄하는 사이 왕건은 임희 쪽으로 다가왔다.

“상산백 그대가 다시 한번 내 목숨을 구했군. 어떻게 이리 시간을 맞춰 달려왔나?”

“혼사를 위해 개경으로 올라가다가 한번 폐하를 알현하고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해서 왔는데 일이 이리되었습니다. 폐하, 우선은 안에 드셔 여독을 푸십시오.”

왕건의 몸을 걱정한 임희가 말했다. 선필 역시 정신을 차리고 그리 권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재암성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 사이에 슬며시 끼어 걸음을 옮겼다.

* * *

대강 씻고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잠깐 눈을 붙인 왕건은 새벽에 깨서 사람들을 소집했다. 재암성까지 무사히 오긴 했어도 왕건이 오래 머무를 상황이 아니었다.

후백제 군사들이 살벌하게 돌아다니는 만큼 빨리 사벌주에서 탈출해야 했다.

서둘러 고려 본토로 돌아갈 일을 논의하기 위해 임희와 선필 등을 부른 것이다. 나 역시 그 뒤를 은근슬쩍 따랐다. 전직 역사학도로서 거물들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너무 궁금했다.

“웬 처자가?”

왕건은 일을 논의하기 위해 부른 자리에 내가 끼자 약간 놀라서 물었다.

“소신의 딸 연우입니다. 원래 이 아이가 개경으로 가기 전에 폐하를 한번 알현하고 싶어 하여 소신이 이쪽으로 군사를 이끌고 온 것입니다. 딸아이 때문에 딱 시간에 맞춰 폐하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엥? 네가 연우라고? 어렸을 땐 예뻤는데?”

왕건이 내 쪽을 바라보더니 무심코 중얼거렸다.

콰직.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내 이마에 살짝 핏줄이 돋는데 왕건이 한 손으로 스스로의 입을 치며 말했다.

“10살 때 봤을 때보다 더 예뻐져서 정말 깜짝 놀랐다. 과연 상산백과 사돈을 맺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

그 말을 들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틈에 임희가 곁에서 끼어들어 말했다.

“백제군의 눈을 피해 폐하께 소식을 전하는 계책을 연우가 냈습니다. 사사로이 소신의 딸이라서 부른 것이 아니라 나름 지모가 있기에 도움이 될까 하여 이리 불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왕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소맷자락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외쳤다.

“정말 네가 이 계책을 냈다는 말이냐? 하긴 확실히 색다른 꾀긴 했다. 하하하, 어린 소녀라서 낼 수 있는 계책이었구나.”

그러면서 왕건은 내 앞에 껍질을 벗긴 달걀 하나를 내밀었다. 그 달걀의 하얀 표면에는 작은 글씨가 몇 개 적혀 있었다.

“백반과 식초에 먹물을 섞어 삶은 달걀 껍질 위에 글자를 쓰면 먹물이 스며들어 달걀의 흰 부분에 남습니다. 소녀가 어린 시절 우연히 이를 발견하고 사사로이 장난을 치다가 문득 폐하의 곤경을 구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버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내가 이런 과학상식을 알게 된 것은 현대인으로서의 지식 덕이었지만 적당히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왕건에게 보낼 전갈이 적힌 달걀을 들고 행상으로 꾸민 선필의 부하들이 백제군의 검문을 피해 소식을 멋지게 전한 것이다.

행상들은 만에 하나 달걀을 백제군에게 뺏기거나 할 때를 대비해 검문당할 때 호리병을 쥐고 있었다.

호리병 안에는 백반과 식초가 섞인 물이 들어 있어서 달걀에다가 부으면 글자를 지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과연 놀랍다. 상산백의 딸답구나. 내 며느리이기도 하지. 내가 복이 있어서 이런 며느리를 얻게 되었구나.”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임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임희는 슬쩍 나에게 눈짓을 했다. 지금이 좋은 기회라는 신호였다.

“폐하 한가지 청이 있사온데.”

나는 바싹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해보거라.”

왕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소녀 정윤 전하와의 혼약이 있지만 막상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두렵고 또 아직은 아버님 슬하를 떠날 각오가 서지 않았습니다. 혼사를 2년이라도 미뤄주시면 안 될는지요?”

나는 조심스레 왕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딸이 끝까지 결혼 안 하고 아빠 곁에 남고 싶어 한다는 것이 유명한 거짓말 중 하나라는데 왕건이 믿을까?’

곁에서 임희 역시 입을 열었다.

“소신이 이번처럼 딸아이와 여러 일을 논의하는데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상산의 여러 일을 마무리 짓고 딸아이의 혼사를 치르고 싶은 마음입니다. 또한 당장 혼사를 치르기 어려운 여러 사정도 있습니다.”

그러자 곁에서 일이 돌아가는 맥락을 모르는 선필이 웃으면서 말했다.

“연우 아가씨 같은 따님이라면 확실히 시집을 보내려면 아쉽긴 할 것입니다.”

선필은 먼 사벌주의 호족이라서 고려 중앙 조정의 정세를 전혀 모르고 내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허허허.”

그리고 왕건은 뜻 모를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건이 정윤과의 혼사를 꺼리는 우리들의 속내를 모르지는 않겠지. 애초에 지금과 같은 정치구도를 만든 것이 왕건 본인 아니야? 우리 같이 애매한 세력의 가문이 아니라 대호족 가문과 정윤을 연결해 줬으면 이런 상황도 안 생겼어. 이건 다 왕건 탓이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끔힐끔 왕건의 표정을 살폈다. 나와 임희가 상당히 속 보이는 요구를 했는데 왕건이 어찌 나올지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사실 조선시대처럼 왕권이 강한 시대였다면 우리 부녀가 왕실과의 혼사를 이런 식으로 미루려 하는 것도 불경죄였다.

그러나 지금은 고려 건국 초였고 왕권도 강력한 것이 아니었다.

왕건은 여러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전쟁을 해나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한번 과감한 요구를 해본 것이다.

‘거기다가 우리가 아니었으면 왕건이 빠져나왔겠어?’

물론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선필의 힘만으로도 빠져나오긴 했고 내가 숟가락을 올린 거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우리가 공을 세운 것이 됐다.

잠시 미소를 짓던 왕건은 호탕하게 외쳤다.

“상산백이 내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깟 일이 대수냐? 그래 2년 정도 더 상산백 슬하에 있거라. 총명한 맏며느리를 얻는데 그 정도를 더 못 기다리겠느냐?”

왕건은 조금의 뒤끝도 남기지 않고 내 청을 들어주었다.

당장의 곤경을 피해낸 나와 임희는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끊임없이 전쟁이 터지고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는 이 시대에 2년은 무척 긴 시간이다. 2년 내에 또 이런 식으로 계책을 짜내서 혼사를 흐지부지시킬 수 있다.’

나는 왕건 앞에 엎드린 채 그런 계산을 했다.

처음부터 혼사를 안 하겠다고 하면 왕건이 절대 허락을 안 해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우선 2년의 기한을 얻어낸 것이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임희 역시 왕건에게 고개를 숙였다.

“단! 조건이 있다.”

왕건이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명을 내리십시오.”

내가 고개를 숙였다.

“우리 연우가 아직 결혼을 두려워하고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여태 상산에서만 지내서 그런 것 같다. 그러니 이번에 내가 개경으로 돌아갈 때 연우 역시 함께 오너라. 개경에도 상산백의 저택이 있으니 그곳에 머무르면 되겠지. 지금 군사일이 급하니 상산백도 개경에 한동안 머물러 주시오. 상산백과 함께라면 연우도 마음을 놓을 것이고.”

“당연한 말씀입니다. 폐하.”

임희가 대답하는데 왕건이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이며 말했다.

“아직 조건이 더 남아 있다. 개경에 세워진 학관에 연우도 입학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정윤은 나주 왕후의 처소에 함께 머무르고 있다. 그러니 연우 너도 한 달 중 7일은 나주 왕후의 처소에 가서 꼭 자도록 해라. 그렇게 슬슬 적응을 해나가야 하지 않느냐?”

왕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혼사를 미뤄주긴 했어도 2년 뒤에는 반드시 성사시킬 각오가 보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조건을 내거는 것이다.

‘미래를 보는 나다. 그걸 또 못 빠져나갈까 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알, 알겠습니다. 폐하.”

그러나 임희는 허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떨면서 대답했다. 왕건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한쪽 곁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선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소신 역시 딸아이가 하나 있사온데 폐하께 인사를 올리게 하고 싶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왕건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선필도 많이 부러웠던 것 같았다.

‘안 돼. 정혜가 왕건의 눈에 띄면.’

내가 속으로 절규하는데 왕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상보께서는 뭐 그런 것을 물어보십니까?”

곧이어 선필의 지시에 따라 정혜가 사뿐사뿐 걸어와서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런 정혜의 모습을 본 왕건의 두 눈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아마 장내에서 나만이 왕건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 같았다.

“내가 선필 공을 상보로 모시고 있으니 그대는 내 누이나 다름없소. 하하하. 이곳에 와서 이처럼 아리따운 누이가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왕건은 정혜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선필과 정혜는 그런 왕건의 립서비스를 듣고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너무 느끼하다. 누이? 결국 나중에는 여보가 되겠지.’

한쪽에서 그 광경을 보는 나는 왕건의 속 보이는 멘트에 몸서리를 쳤으나 그런 내 속내와 관계없이 장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정혜와도 잠시 환담을 나누던 왕건은 곧이어 본론으로 넘어갔다.

“무사히 몸을 피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백제군이 나를 쫓을 것이오. 재암성에 오래 머물다가 꼬리가 잡히면 선필 공도 위험해지니 내일 밤을 틈타 서둘러 고려로 돌아가겠소.”

“미리 폐하께서 무사히 빠져나가실 탈출로를 마련해 놨습니다.”

선필이 품속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서 올렸다.

“대단하군.”

그 지도의 정밀함에 왕건이 놀라는데 임희가 곁에서 끼어들었다.

“선필 공은 젊은 시절 신라 승부에서 일하셨습니다. 그곳 자료들을 많이 보유하고 계십니다.”

“오호.”

그러자 왕건이 정혜를 바라볼 때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선필을 눈여겨봤다.

‘참 이런 걸 보면 왕건도 결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하네. 선필은 이제 고려 입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됐으니 서로 간에 믿음을 굳건히 하려면, 정혜와의 혼사를 신속하게 추진하겠군.’

결국은 나도 왕건이 정혜와 결혼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