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5화
5. 어쩌면 시어머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현대에 있을 때도 술을 못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즐기지는 않았다.
‘거기에 저런 아저씨들 사이에 껴서 술을 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고.’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음식을 집어 먹으며 마음속으로 신세한탄을 했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신세가 됐는지. 졸지에 여자가 돼서 결혼을 어떻게든 피하겠다고 이 고생을 해야 하다니.’
우선 이 시대에 와서 내 1차적인 목표는 정신적으로 남자인 만큼 순결(?)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독신라이프를 즐기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 목표를 이룰까 깊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저기 상산에서 오신 연우 아가씨 맞죠?”
뒤에서 누군가가 그리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짜증 나게.’
내가 그런 생각을 뒤를 돌아보니 웬 아름다운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얼굴이 작은 와중에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팔다리가 긴 날씬한 몸매의 소녀였다.
두근두근
그 순간 나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부끄럽지만 사실 현대에서 대학에 다닐 때도 단순히 내 옆자리가 비어서 여학우가 앉아도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모쏠이라는 것은 정말 나만 아는 비밀이지.’
그런데 지금 이런 미소녀를 만나니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늙은이의 다른 자식들은 모두 가정을 꾸렸고 지금은 막내딸 정혜만이 이 늙은이 곁에 남았습니다. 상산백께서 따님과 함께 오셨으니 따님과 말벗이나 하라고 정혜를 불렀습니다.”
선필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곁에서 말했다.
그리고 그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천불이 솟아올랐다.
‘왕건, 이 개자식이. 결국 이 소녀와 결혼한다고?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가정을 꾸리지 않은 딸이 정혜 하나니 결국 이 미소녀가 태조 왕건과 혼사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그냥 역사서에서 선필의 딸와 왕건이 결혼했다고 읽었을 때는 별 감정이 안 들었는데 두 눈으로 가녀린 선필의 딸 정혜를 직접 보니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내가 울화 때문에 몸을 들썩일 때였다.
“개경에는 가보셨어요?”
정혜는 궁금한 것이 많은지 연우 곁에 바짝 붙어서 말을 걸었다. 몸에서 나는 은근한 체향이 느껴졌다.
“저도 개경에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상산에서 계속 살았어요.”
나는 곁에서 내 손을 잡기도 하고 까르르 웃으며 준비해 놓은 다과를 건네기도 하는 정혜를 보며 황홀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 약간 서글프기도 했다.
‘내가 지금 여자가 돼서 이러지 현대에서처럼 남자의 몸이었다면…… 에잇,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어쨌든 정혜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내 힘이 닿는 한 잘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마구 솟아올랐다.
‘아 나중에는 얘도 왕건의 부인이 되고 유력한 거물이 되니. 잘 보이긴 해야지.’
그런 이유까지 대면서 나는 열심히 정혜의 비위를 맞추었다.
* * *
그사이 연회장에서 술잔을 나누던 임희와 선필의 표정은 다시 심각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왕건을 빼 오는 일이 급한 만큼 말이 연회지 두 사람은 다시 어떻게 하면 백제군의 검문을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차려진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임희와 선필은 머리를 맞대고 꾀를 짜내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밖에 나가 바람이나 쐴까요? 제가 재암성을 안내해 드릴게요.”
그런 연회장에 있기 지루해졌는지 정혜가 나에게 그리 말했다.
“예, 그래요.”
황홀한 기분에 취한 나는 이미 정혜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할 각오였다. 정혜는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재암성 이곳저곳을 안내해 줬다.
“여기는 정원이고 저쪽 전각은 아버님이 매일 밤 지도를 들여다보시는 곳이에요. 그리고 이쪽으로 가면 마굿간. 아! 내가 키우는 토끼를 보러 가요.”
정혜는 간만에 자기 또래의 귀족 아가씨를 만나서 그런지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이건 완전 데이트 아니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정혜를 따라 작은 동물들을 키우는 곳으로 갔다. 정혜의 말대로 토끼 외에도 닭들도 있었다.
재암성에서는 관리하기 편하게 작은 동물들은 한데 몰아 키우는 모양이었다.
“연우 아가씨도 동물을 좋아해요?”
정혜는 아예 쪼그려 앉아서 토끼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예. 저도 엄청 좋아해요.”
김선우일 때나 임연우일 때나 애완동물을 키워볼 생각조차 안 한 나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살며시 정혜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정혜는 토끼의 털을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고 나는 곁눈질로 그런 정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속눈썹이 정말 길었다.
‘진짜 엄청 예쁘다.’
그냥 정혜를 바라보고만 있는데도 시간이 잘 갔다.
푸드득-
다만 가끔 한쪽에서 닭들이 잠이 깼는지 날갯짓을 세차게 하며 이 멋진 순간을 깨뜨렸다. 한참 토끼를 껴안고 있던 정혜도 닭들이 내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며 말했다.
“밤도 깊었고 이제는 자야 할 시간인 것 같네요.”
그러더니 토끼를 내려놓은 정혜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있는 사이 치마에 묻은 풀이며 흙들을 털어냈다.
‘저 튀겨 죽일 것들.’
나는 감미로운 한순간을 깨뜨린 닭들을 노려보며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런 닭들을 보는 내 뇌리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 * *
공산 전투에서 승리 이후 백제 군사 2천 명은 사벌주 곳곳의 길목에서 철저히 검문을 하고 있었다.
여행을 하는 나그네며 물건을 팔러 다니는 장사꾼, 수행을 하는 승려까지 검문을 당했다.
“지금 고려에서 난리가 나서 국경에 군사를 늘리고 있다. 이는 여태 왕건이 고려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소리다. 왕건은 아직 사벌주 땅에 숨어 있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철저히 검문하며 그들이 지닌 짐도 수색하라. 무슨 서신이며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물건들은 모조리 압수하라.”
백제 군관이 그리 군졸들에게 명을 내렸다.
백제 측도 사벌주 땅에 숨어 있는 왕건에게 어떻게든 연락을 보내려는 시도가 있을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검문을 하는 것이다.
“예.”
백제 군졸들은 명에 따라 철저히 검문을 했다. 보통 백성들은 당연히 그런 검문을 당해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존경받는 승려들이나 인근 유력한 호족의 친족들도 백제 군사들 앞에서 감히 뭐라 하지 못했다.
그냥 안부를 묻는 승려들 간의 서신도 모조리 압수당했으나 조금의 저항도 못 했다.
얼마 전에 견훤이 이끄는 백제군 손에 고려의 5천 병력들이 섬멸당한 것을 눈앞에서 본 사람들이었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순응하고 있었다.
“아, 춥다.”
그 사이에는 지게에 온갖 잡동사니를 짊어진 행상 한 명도 있었다. 허리춤에는 식사를 위해 짚에 싸인 계란과 호리병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었다.
행상은 검문이 길어지자 추운지 발을 동동 굴렀다.
“자 짐을 내려놓아라.”
백제 군졸들은 예리한 눈빛으로 행상을 노려보았다. 그 행상은 재빨리 지게에 실린 대바구니며 호미 같은 것들을 내려놓았다.
백제군은 꼼꼼하게 그것들을 살폈다. 뿐만 아니라 백제군사들은 행상의 몸까지 손으로 더듬었다. 옷 속에 뭔가 숨어 있을 것을 우려해서였다. 머리카락 속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모욕감을 줄 수도 있는 검문이었지만 행상은 호리병을 한 손으로 꼭 쥔 채 굽신거리면서 검문을 받았다.
“깨끗하군.”
백제군졸들은 철저한 검문을 했음에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자 이미 우리 백제군이 서라벌을 함락시켰고 고려군도 전멸시켰다. 삼한 땅이 통일되면 앞으로는 너희들이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다. 다 우리 폐하께 항거하는 왕건 같은 무리 때문에 이런 검문을 했구나. 이젠 갈 길을 가거라.”
백제 군관은 검문을 마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런 일장 훈시를 늘어놓고 보내줬다. 상부로부터 철저히 검문을 하되 민심도 좀 살피라는 명을 받아서 이런 말을 덧붙인 것이다.
사람들은 백제 군관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흩어졌다. 그 사이에 껴서 행상 역시 발걸음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 * *
재암성에서 임희와 선필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나도 그들 뒤에 은근슬쩍 껴 있었다. 이제는 선필도 내가 그리 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우리가 보낸 전갈을 받으셨겠지요?”
임희는 초조하게 묻자 선필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상산백의 따님이 내신 계책은 무조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님이 달려와서 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통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본래 나는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추워져서 강이 얼어 길이 생기면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기다리는 것보다 상산백의 따님이 더 현묘한 계책을 내셨습니다. 상산백께서 왜 따님까지 이 위험한 곳으로 데려오셨는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리 말하며 선필은 그들 곁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선필의 칭찬에 나는 고개를 살며시 숙여 예를 표했다.
‘선필 당신이 생각한 그 방법을 써도 확실히 통하긴 했을 텐데. 내가 멋지게 숟가락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역시 성 밖을 바라보았다.
전갈이 왕건에게 제대로 갔다면 선필이 알려준 샛길을 통해 왕건이 무사히 재암성까지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요새는 매일 밤마다 임희, 선필, 나는 성루에 올라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혜도 재미있을 줄 알고 따라 나왔으나 곧 지루하다고 포기했다.
그러나 계책을 낸 나는 내가 구상한 계책이 성사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리 나와 있었다.
“앗, 저기 불빛이!”
성루에 있던 군졸 하나가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멀리서 횃불 하나가 솟았다. 그리고 세 번 깜빡거렸다.
“신호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그 모습을 보고 선필이 부르짖었다. 왕건에게 보낸 전갈에 무사히 재암성 인근까지 왔으면 저런 신호를 보내라고 적은 것이 선필이었다.
그리고 임희, 선필은 허겁지겁 성루에서 내려갔다. 나 역시 바짝 긴장해서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내 두 눈으로 고려 태조 왕건을 진짜 보는 건가?’
왕건이라면 모두가 알겠지만 후삼국을 통일한 영웅이자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역사학도로서 직접 만난다니 내 마음도 떨렸다.
* * *
열린 재암성의 성문으로 50명쯤 되는 사람들이 허겁지겁 들어오고 있었다. 진짜 말 그대로 거지꼴이었다.
하나같이 족히 몇 달은 씻지도 못했는지 처참한 몰골의 군사들이 보였다.
“자 어서 따뜻한 국물과 죽을 내와라.”
선필의 명에 따라 재암성 사람들이 준비한 음식들을 대령했다. 그러자 막 재암성에 들어온 군사들은 걸신들린 것처럼 죽을 들이켰다.
공산에서의 참패 이후 거의 한 달간은 도망쳐다니며 제대로 식사도 못 한 것 같았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한 사람만은 차분하게 웃으며 임희, 선필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왕건이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지만 그럴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그것을 느꼈다. 임희나 선필이야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거물이긴 해도 용모는 평범했다.
그냥 전형적인 아저씨고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가오는 사람은 나이를 먹긴 했어도 사람들이 누구나 돌아볼 외모였다.
늘씬하게 큰 키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중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