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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4화 (4/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4화

4. 재암성

“딸아이를 데리고 개경으로 가던 중 어쩌면 폐하께서 곤경에 처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혹시나 해서 와봤습니다.”

임희가 적당히 어물거리는데 선필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고려국에는 인재도 많습니다. 천 리 밖의 일을 내다보고 이리 달려오셨습니다. 허허. 안 그래도 이 늙은이가 고려국의 폐하를 구해보려 한번 애를 써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의논할 사람이 없어서 갑갑한 차에 이리 상산백께서 오셨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임희는 약간은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슬며시 바라보며 말했다. 선필은 지금 임희가 이 모든 것을 예상한 줄 알고 있었다.

‘졸지에 딸의 공을 가로챈 격이 돼서 미안하신 건가?’

나는 그렇게 임희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괜찮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었다.

* * *

“지금 밤이 늦었지만 고려국 폐하를 구하는 일은 매우 시급합니다. 제 처소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선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임희 역시 왕건이 지금 사벌주 땅에 고립된 채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당장이라도 관련된 논의를 하고 싶은 듯했다. 앞장서는 선필을 따라가며 임희는 슬쩍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함께 선필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자는 신호였다.

‘흐흐, 이제는 내가 굳이 따라가겠다고 말을 안 해도 아버님이 나를 부르시는군. 하긴 그동안 몇 개를 맞췄는데.’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임희의 뒤를 따랐다. 선필이 나도 따라오는 것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 척 철판을 깔고 따라갔다.

선필의 처소에 들어선 순간 나는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처소의 벽이며 서탁 위에 이런저런 지도가 걸려 있었다. 재암성과 사벌주 일대의 지형이 그려진 지도였다.

‘상당히 정교해 보이는데. 물론 현대의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라도. 숫자도 수십 장? 아니 백 장이 넘을 수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임희의 반응은 더 대단했다. 지도를 보자마자 임희는 경악하며 한참 동안 그것들을 들여다보았다.

“내 병부령으로 있을 때 우리 고려국의 군사지도들도 모두 관장했습니다. 그러나 고려국에서 만든 지도들도 이 정도로 정교하지는 않았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임희는 약간은 자괴감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사벌주의 일개 호족이 고려국이 지닌 지도보다 정교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젠장 아버님은 전직 병부령인데. 이 무슨 망신이야.’

나도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 임희의 표정을 본 선필은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실 내가 젊었을 적에 신라 승부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습니다. 다만 6두품이니 내가 승부의 실무를 모두 담당한다고 해도 결코 승부령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평생 진골 출신 승부령의 수발을 드느니 지방에서 태수 노릇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조정에 청해 이리 재암성에 왔는데. 그런데 뜻밖에 온 삼한 땅에 난세가 찾아왔습니다. 수도인 서라벌의 행정도 문란해졌습니다. 승부에 쌓여 있는 문서며 지도들도 돌보는 사람이 사라져서 내가 사람을 보내 모두 거두어들였습니다.”

“아! 그럼 이것들이 모두 신라 승부의 지도들입니까? 그러면 이리 정교한 것이 이해가 갑니다.”

임희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올해가 927년으로 고려는 건국된 지 9년밖에 안 되는 나라였다. 이에 반해 신라는 지금 건국된 지 거의 1천 년이 다 된 나라였다.

삼한을 통일한 지도 20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승부는 신라 전국의 수레며 말들을 관장하는 부서였다. 당연히 수레나 말을 몰기 좋은 길과 지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신라 승부가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한 자료량을 막 건국된 고려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승부에서 빼돌린 지도들도 있고 내가 지난 경험을 살펴 이곳 사람들과 함께 만든 것들도 있습니다. 이것들 덕에 사방에서 이 재암성을 노리는 도적 떼들을 격퇴한 적이 여러 차례입니다.”

선필은 고려 병부령을 지낸 임희가 자신이 보유한 지도들을 인정하자 기뻐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미래에서 온 나도 선필이 신라 승부 출신이라는 것은 처음 들었다. 솔직히 선필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감탄했다.

‘과연 이 험난한 시대에서 살아남은 호족들은 뭔가 비장의 무기가 하나씩은 있어. 이래서 선필이 왕건을 구출할 수를 낼 수 있었군. 남들이 모르는 길을 선필은 알고 있었을 테니. 나와 아버님이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선필 혼자 힘으로 왕건을 빼돌렸을 것이다. 숟가락을 얹으러 오길 잘했군.’

나처럼 임희도 선필에게 의지하면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선필 공께서 견훤 같은 도적이 기세를 떨치는 지금 이리 우리 고려를 돕기 위해 나서주시다니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임희가 더욱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왕건이 괜히 선필더러 아빠라고 부른 게 아니라니까. 아니 이 정도면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되겠네. 지금 삼한 땅에서 선필보다 이 인근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역사서를 보면 왕건은 선필의 딸과 결혼한 것을 넘어서 선필도 아빠라고 불렀다. 한자어로는 품격 있게 상보라고 표현한다.

‘물론 선필에게만 아빠라고 부른 게 아니라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 중에 나이가 좀 있는 사람에게는 다 아빠라고 불렀지.’

내가 그런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선필은 말을 이었다.

“고려국의 폐하께서 견훤 손에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신라 국왕 폐하를 위해 달려오시다가 곤경에 빠지셨습니다. 저는 눈치나 보고 있다가 고려국 폐하를 위해 작은 성의를 보일 뿐입니다.”

선필도 임희를 향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참 모순 아닌가? 진골이 아니면 중요 관직을 내리지 않는 신라 조정을 은근히 원망하는 기색을 보여놓고 또 막상 서라벌이 견훤 손에 약탈당하니 그건 또 싫은 건가? 또 신라에 저리 충정을 보이는 듯하면서도 승부의 지도들은 모두 빼돌려 놓고. 아마 신라 조정에 세금도 거의 안 바칠걸?’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는 그런 선필의 미묘한 심리가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견훤은 1만의 병력으로 고려군을 요격해 섬멸시켰습니다. 고려 폐하께서는 다행히 공산에서는 탈출하셨습니다만 견훤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습니다. 겨울이라 군량이 부족해 1만 군사를 모두 남기지는 못했지만 2천 명의 군사는 남겨서 사벌주 곳곳의 길목을 차단하고 고려국 폐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선필이 현 상황에 대해 일러주었다.

“2천이라. 그래도 사벌주가 큰 주인데 그들로는 사벌주의 모든 길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임희가 말하자 선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이 맞긴 맞습니다. 지금 백제 군사들이 배치된 곳을 피해 고려국 폐하를 빼돌릴 샛길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지금 나 역시 고려국의 폐하께서 어디 숨어 계신지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주변 지리를 따져보면 폐하께서 계실 곳이 짐작은 갑니다. 어쨌든 지금 사람을 풀어 폐하를 찾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평소 많은 교류가 없던 나를 고려국 폐하께서 믿고 나오실지가 문제였는데 다행히도 이는 상산백이 오셔서 해결됐습니다.”

“내가 폐하께 보낼 서신을 써서 재암성 사람들에게 주면 폐하께서도 믿고 따라 나오실 것입니다. 폐하와 나만 아는 일화 같은 것을 적는다면 더없이 확실합니다.”

임희가 그런 의견을 내었다.

“다만 내가 푼 사람이 혹여 백제군의 검문에 걸려 상산백께서 내리신 서신을 그들에게 뺏기기라도 하면 큰일 날 것입니다. 폐하를 찾기 위해 사벌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백제군의 검문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필이 암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또 그것대로 큰일입니다. 서신이나 징표 같은 것이 없이 사람을 보낸다면 폐하께서 그 사람을 믿으실 수 없으실 테고.”

임희도 그에 대해서는 뾰족한 수가 없는지 수염만 쓰다듬었다.

* * *

임희와 선필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왕건이 정말 힘들게 삼한을 통일한 거구나. 역사서에서는 공산 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한동안 숨어 있다가 몇 달 뒤에 고려로 무사히 돌아왔다고만 간략히 적혀 있는데.’

역사서에 몇 줄 적힌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임희와 선필 같은 거물 두 사람이 골이 빠지게 궁리를 하고 있었다.

‘너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나중에 공을 내세우기도 그러니 적당히 뭔가 떠오르면 좋을 텐데. 나도 아무 생각도 안 나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현대인으로서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는 왠지 모를 의무감이 들었다.

한동안 나, 임희, 선필 3명은 침묵 속에서 뭔가 방법을 떠올려 보려고 했으나 뭐가 안 나왔다.

“이거 먼 길을 다녀오신 손님들을 쉬지도 못하게 너무 붙들고 있었습니다. 숙소로 이제 드십시오.”

마침내 선필이 나서서 침묵을 깨뜨렸다.

‘하긴 더 머리 싸매고 앉아봤자 생각이 안 난다.’

확실히 우선은 쉬어야 할 때였다. 선필은 우리를 숙소로 안내하기 위한 하인을 불렀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선필 공께 한동안 신세를 지겠습니다.”

“신세라니 무슨 말씀을.”

임희와 선필은 또다시 정중하게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

‘어쨌거나 실제 역사를 보면 왕건이 탈출할 것은 확실하고 나는 그동안 재암성에서 푹 쉬기나 해야지. 선필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임희를 따라 나와 선필이 마련해 준 숙소로 향했다. 확실히 내가 연우의 몸에 빙의한 이래 오늘처럼 달려보긴 처음이었다.

하루 종일 말을 타고 달리고 밤늦게까지 나오지 않는 계책을 짜내려 머리를 굴려서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침상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나는 그대로 잠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매우 늦게 나는 일어났다. 그리고 임희를 만나러 갔는데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임희는 두눈이 충혈된 채 매우 피로한 기색이었다.

“설마 어제 한숨도 못 주무셨습니까?”

“그래. 낯선 곳에서 잠을 자려니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또한 폐하께서 적지에 갇혀 어찌 지내실지 생각하니 또한 걱정이 되더구나. 아니 폐하께서 제대로 식량을 챙기셨을지 걱정이다. 끼니는 어찌 해결하실지?”

임희는 왕건에게 많이 매료된 사람이라 그런지 그런 말을 했다.

‘이거 서둘러 왕건을 못 빼 오면 아버님이 큰일 나겠군. 뭐 쌈박한 방법 없으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와 임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재암성에서 보내준 하인이며 시녀들이 식사를 대접하기 시작했다.

“성주님께서 저녁에는 손님들께 연회를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암성의 하인 하나가 말했다. 먼길을 달려온 나와 임희의 여독이 대강 풀리고 나서 본격적으로 접대를 하겠다는 선필의 마음 씀씀이 같았다.

“알겠다.”

임희는 근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낮 동안 잠시 눈을 붙여 기력을 다시 회복한 임희는 나와 함께 선필이 마련한 연회장에 들어섰다.

“자 우리 재암성에 이리 귀한 손님들이 오신 것은 처음입니다. 우선 한잔 드시지요.”

나름 거창한 연회 준비를 해놓은 선필이 술병을 들며 말했다.

“하하하. 그럼.”

임희 역시 웃으면서 술잔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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