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3화
3. 공산
“우리 상산 군사가 100명에 불과한데 간다고 해서 전세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지금 달구벌 쪽으로 우리가 달려가기 시작해도 시간에 맞춰서 가기도 어렵습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미래를 안다고 해도 공산 전투의 패배는 일개 역사학도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왜 가느냐?”
“달구벌 인근은 모두 산지라 만약 폐하께서 대패하시면 쉽게 탈출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군사들의 숫자가 적긴 해도 사벌주 인근까지만 가 있어도 폐하를 구출하는 데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폐하의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운다면 폐하께서도 우리의 사정을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물 흐르듯이 말했다.
왕권이 강한 조선시대라면 왕실과 혼사가 있으면 무조건 해야 했다. 그러나 고려시대. 그것도 왕권이 강하지 못한 지금이라면 국왕인 왕건과 잘 얘기만 하면 이 혼사를 피할 수도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공산에서 대패한 왕건은 부하들을 거의 잃고 극소수의 군사들과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왔다. 왕건을 어떻게든 잡아 죽이려고 수색을 하는 후백제군 사이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이런 걸 보면 참 왕건도 고생을 많이 하며 삼한통일을 했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상산군사 100명이 근처에 가 있으면 왕건을 빼내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왕건의 목숨을 구해준 공을 바탕으로 혼사 문제를 다시 논의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네 말대로 일이 흘러가기만 한다면 폐하도 구하고 우리 집안도 산다. 그러나 네 말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찌하느냐?”
임희가 그 점을 지적했다.
“제 말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혼사를 진행하면 됩니다. 폐하께서 왜 우리더러 사벌주 쪽으로 왔다고 물으면 혼사를 진행하기 전 폐하를 먼저 알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랬다 하면 됩니다. 설사 제 말이 틀리더라도 우리가 손해를 보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렇구나. 어차피 이대로 가면 혼사가 이루어질 것이고. 네 말대로 한번 사벌주 쪽으로 가보면 혹여 우리가 공을 세울 기회가 생기고. 좋다.”
임희는 감수해야 할 위험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상산 군사들은 사벌주 쪽으로 행군 방향을 돌렸다. 나 역시도 수레를 버리고 말에 올랐다.
급하게 행군을 해야 해서 나도 말을 타고 나아가야 했다. 물론 승마에 서툰 나를 위해 말을 잘 타는 기병 한 명이 곁에 붙어서 돌봐주었다.
* * *
신라는 삼한을 통일하고 나서 전국을 크게 9개 주로 나누었다. 오늘날의 경상북도, 대구 일대는 사벌주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왕건이 전투를 벌인 공산은 오늘날의 대구 근처로 사벌주에 소속되어 있었다.
나와 상산 군사들이 사벌주 접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임희가 척후병으로 앞세웠던 군졸 하나가 얼굴이 새파랗게 돼서 달려왔다.
“영공 각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공산에서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우리 군사들이 백제 도적들 손에 전멸당했습니다. 폐하께서도 지금 실종된 상태입니다. 인근 국경의 군사들도 모두 폐하를 따라갔다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국경의 관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아나서 관아가 빌 지경입니다.”
웅성웅성.
엄청난 패전의 소식을 들은 상산 군사들이 동요하는데 임희는 아예 경악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왕건이 실종된 상황인데 사벌주 인근의 고려군은 사실상 소멸했으니 지금 임희가 거느린 100명의 상산군사들이 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척 표정관리를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짜릿한 느낌이 왔다.
‘뭔가가 척척 맞아들어가는 느낌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말을 몰아 임희 곁으로 다가갔다. 앞으로의 일을 묻기 위해서였다.
“아버님. 이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국경 관아들을 좀 진정시키고 바로 사벌주로 들어갈 참이다. 폐하께서 실종되셨으니 사벌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임희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건이 사돈을 맺으려 할 정도로 임희는 왕건의 충신 중 하나였다. 단호하게 왕건을 구하러 들어가려는 것이다.
“사벌주의 호족들은 눈앞에서 우리 고려군이 무너지는 것을 봤으니 이젠 거의 견훤에게 붙을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사벌주에 들어가서 누구와 힘을 합치실 요량이십니까?”
나는 차분하게 임희에게 물었다.
“네 말대로 지금 사벌주의 호족 그 누구도 우리를 돕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진보성주 홍술 공만큼은 끝까지 우리 폐하를 따를 사람이다. 진보성으로 갈 작정이다.”
“삼한 사람 모두가 홍술 공이 폐하의 사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 견훤도 그것을 예측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진보성은 사지입니다.”
나는 침중한 표정으로 그 점을 지적했다. 홍술은 확실히 왕건의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공산 전투 이후 사벌주 즉 경상북도 일대가 거의 다 견훤에게 굴복했을 때도 끝까지 왕건의 편을 든 호족이었다.
‘그런데 이런 난세에는 그렇게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이 좋지가 않아.’
결국 실제 역사를 보면 공산전투 이후 사벌주의 대세를 장악한 견훤에게 찍힌 진보성주 홍술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2년 뒤에 죽는다.
‘지금 실종상태인 왕건을 구하려고 제일 애쓸 것도 홍술이고. 견훤도 그걸 아니 진보성 인근의 길은 다 끊어놨을 것이다.’
견훤의 백제군은 아직도 사벌주 인근을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실종된 왕건을 잡아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100명의 군사로 덜렁 사벌주로 들어간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연결해 볼 만한 사람은 홍술 공밖에 없다.”
“소녀가 보기에 재암성에 가면 길이 보일 것 같습니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재암성? 그곳 성주가 아마 선필일 것인데 선필 그 사람과 우리 고려는 큰 인연이 없다. 딱히 우리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저 대세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사람이다. 어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재암성으로 간다는 말이냐?”
“제 생각에 재암성주 선필이 이번에 반드시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나는 그러면서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대체 왜 그리 생각하느냐?”
‘그야 당연히 미래의 역사책에서 보고 왔으니 그렇죠.’
결국 이런 위기에 처한 왕건을 빼내는데 공을 세운 것이 재암성주 선필이었다.
중립적인 사람인 척하고 있으면서 교묘하게 계략을 써서 왕건도 빼내고 이후로도 견훤의 세력권이 된 이곳의 비밀연락책으로 활약했다.
선필이 나중에 죽었을 때 사서에 특별히 이 공로를 자세히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 공로로 결국 나중에 왕건이 아예 선필의 딸과 결혼까지 하지.’
아마 왕건이 또 결혼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 임희는 선 채로 기절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역사를 알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선필이었다.
그러나 이런 미래 지식을 임희에게 풀 순 없어서 나는 적당한 구실을 생각해내느라 머뭇거렸다.
‘미래를 아는 것은 좋은데 임희를 설득하려면 뭔가 그럴듯한 정세분석을 덧붙여야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입을 열었다.
“재암성주 선필 공은 신라 6두품 출신입니다. 비록 재암성에서 할거했다고는 해도 신라를 향한 충의는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견훤이 신라 서라벌을 치면서 신라왕을 죽이고 서라벌을 불태웠으니 그에 대한 반감이 있을 것입니다. 선필 공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나는 내가 아는 역사적 사실을 적당히 버무려서 말했다.
‘사실 논리적으로 내 말은 말이 안 된다. 6두품 출신이라서 그래도 신라에게 받아먹은 게 있다고 충의를 가진 사람도 있지만 차별받았다고 신라를 지독하게 증오하는 사람도 있거든.’
대번 6두품 출신이며 뛰어난 지략을 가진 최승우는 지금 견훤에게 가서 신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선필이 6두품이라고 믿을 만하다는 내 말은 허점이 많았다.
‘그러나 여러 번 내 말이 들어맞는 것을 본 임희가 내 말을 무시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임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 말이 그렇다면 재암성으로 한번 가보자.”
임희가 결단을 내렸다. 공산 전투의 승패를 예측한 이후부터 임희는 결국 내 촉을 믿기로 한 것 같았다.
‘단순한 촉을 넘어서 답안지를 보고 문제를 푸는 수준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 혼수품들을 선필 공에게 예물로 바치십시오. 그러면 혼수가 없다는 명목으로도 정윤 전하와의 혼사를 미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그렇구나.”
임희는 반갑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내 말대로만 되면 왕건도 구하는 공을 세우면서 위험한 정윤과의 혼사도 피할 확률이 높았다.
임희가 결단을 내림에 따라 상산 군사들은 은밀히 재암성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밤에만 행군을 했다.
“너는 재암성주 선필 공에게 가서 이 서신을 전하거라.”
임희는 전령 하나를 미리 보냈다. 도와줄지 말지 미리 선필의 의사를 묻는 것이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동봉한 지도의 샛길을 따라 재암성까지 와주시오. 도와드리겠소.
그리고 머지않아 이런 답장이 왔다.
임희는 눈썹을 한번 꿈틀거리더니 샛길을 따라 재암성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어둑어둑한 밤에 마침내 나와 임희, 상산군사들은 재암성 앞에 이르렀다. 군사들이 가까이 온 것을 본 재암성 측에서 성문을 열었다.
다만 임희는 열린 성문을 보고도 머뭇거리며 차마 못 들어갔다.
‘이 밤에 재암성에 덜컥 들어갔다가 기습이라도 당하면 상산군사들이 전멸하니 그렇지.’
나는 그런 임희는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선필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임희는 딸의 말만 믿고 온 거라 막판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임희 곁에서 나는 먼저 말을 몰아 치고 나갔다.
‘괜히 재암성 쪽을 못 믿는 태도를 보이면 뭔가 일이 틀어질 수 있으니. 내가 그냥 나선다.’
그러면서 내가 과감히 나서자 임희도 도리가 없었다. 그대로 상산 군사들은 재암성에 입성했다.
“삼한 땅에 명성을 날리시는 상산백께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선필은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재암성의 군사들과 함께 나와서 임희를 맞이했다. 이쯤되니 임희도 겨우 마음을 놓은 듯했다.
“선필 공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한동안 이곳에서 저와 상산 군사들이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약소하나마 예물을 준비했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러면서 임희는 군사들을 지켜 내 혼수품을 선필 쪽에 건넸다.
“뭐 이런 것을. 이런 것을 바라고 상산백과 군사들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예전에 신라의 녹을 먹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서라벌이 불탈 때 견훤에게 맞서 뭘 했어야 했는데 겁이 나서 못 했습니다. 그런데 고려의 군사들이 오히려 신라를 구하려다가 이리됐으니 그저 폐하를 구하는 데 작은 힘이나 보탤까 해서 나선 것입니다.”
그러자 선필은 손사래를 치며 예물을 거절했다.
“제 성의입니다. 받아주십시오.”
임희도 지지 않고 그리 나섰다.
‘마치 술자리에서 술값 서로 내겠다고 하는 아저씨들을 보는 것 같군.’
나는 그런 평을 내렸다.
그리고 결국은 선필이 은근슬쩍 예물을 받는 걸로 실랑이가 끝났다. 한동안 선필이 상산군졸들 100명의 군량도 대야 하고 왕건을 구하는데도 또 비용이 들 게 뻔했다.
재암성도 아주 큰 성이 아니라서 임희가 준 예물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예물을 받고 나서 선필은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산백 각하의 딸인 임연우라고 합니다.”
내가 선필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따님까지 데리고 우리 재암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려.”
내가 함께 왔다는 사실에 선필은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