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화
2. 결혼
이 시대에서 불과 17세의 소녀에 불과한 나를 아무리 딸이라도 임희가 믿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지난 2년간 내가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적극 활용한 덕이지 뭐. 날 안 믿을 수가 없어.’
현대였다면 미래를 아는 능력만 있으면 출세하기도 쉬웠다.
전도유망한 주식이며 코인, 부동산 같은 자산을 사두면 보통 서민이라도 순식간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엄격한 신분제 하의 고대 세계에서는 미래를 안다고 한들 그걸 이용할 방법이 애매하다. 한계가 많아.’
그나마 나는 유력 호족의 딸로 빙의해서 한결 나은 상황이긴 했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내 지식을 활용하려면 아버지인 임희를 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생한 이후 나는 임희가 정무를 보는 전각 근처를 맴돌았다. 그리고 임희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내가 아는 지식을 은근히 흘렸다.
‘그나마 후삼국 시대라 딸인 내가 은근히 이렇게 설치지 조선시대였으면 어림도 없었다.’
조선시대에 딸이 무슨 정무와 관련된 발언을 하면 야단이나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후삼국 시대는 조선시대와 여성의 지위가 다른 시대였다. 지금 시점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의 신라왕이 바로 우리나라의 마지막 여왕인 진성왕이었다.
또 왕건과 결혼한 호족의 딸들도 이미 정치에 적극 개입하고 있었다.
여러 구조상 여인들이 정치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참 우리 연우는 총명하고 나중에 집안에 도움이 되겠구나.”
그래서 아버지인 임희도 내가 정무에 대해 아는 척을 해도 혼내지 않고 격려해 주었다. 물론 내 조언을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그게 확실히 바뀐 것이 작년 일이었지. 올해가 927년이니 926년의 일이군.’
나는 아직도 그때 저녁 식사 자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나는 과감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 소녀가 보기에는 조만간 북방의 발해가 거란 손에 멸망할 것 같습니다. 우리 고려도 이에 대비해야 합니다.”
“푸하하하.”
내 말을 듣는 순간 밥을 먹던 임희는 빵 터져서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상산부인도 마찬가지였다.
“…….”
나는 별말 없이 그런 임희를 지켜보는데 웃던 임희가 말했다.
“연우야. 발해는 신라 9주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큰 나라다. 요사이 거란과 싸우느라 힘들기는 하지만 망하다니? 나라란 그리 쉽게 망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걱정이 지나친 것은 좋지 않다.”
임희는 나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태도로 말했다.
“그러나 소녀가 정세를 볼 때 발해가 더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또한 거란 수괴 야율아보기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 엄청난 대사건이라서 당연히 나는 연도까지 외우고 있었다.
“알겠다. 알았어.”
임희는 계속 웃으며 내 말을 그 당시에는 흘려들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발해는 그대로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에 의해 10여 일 만에 멸망했다.
임희는 어마어마하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하긴 책으로만 읽어도 그 큰 나라가 순식간에 망하면 충격을 먹는데 실제로 봤으니 당연했다.
“연우 너는 정말 감이 좋구나.”
그 이후에는 임희도 무슨 난감한 일이 생겼을 때 항상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 * *
“소녀가 출가라도 해서 비구니가 되는 것은 어떨까요?”
머리를 쥐어 싸매던 나는 절박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내 입장에서 결혼을 피할 수 있으면 출가를 해도 괜찮았다.
‘불교 왕국이라 승려가 존경을 받기도 하고 평생 계율에 얽매이긴 하지만. 뭔가 비구니로 있으면서 현대로 돌아갈 방도를 찾는 게. 어쨌거나 결혼해서 그렇고 그런…….’
거기에서 나는 멘탈이 깨져 더 생각을 못 잇는데 임희도 말을 못 잇고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건 좀. 아무리 가문을 위해서라지만 출가를 할 필요는 없다.”
임희는 또 아버지의 마음으로 딸 인생을 망칠 수는 없다는 태세를 취했다.
“아닙니다. 소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출가를.”
내가 고개를 젓는데 임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이 시점에 출가를 하면 너무 노골적으로 정윤 전하와의 혼사를 피한다는 티를 내는 것이 아니냐? 비록 폐하께서 나를 신임하시긴 하지만 그러면 노하시지 않겠느냐? 그 생각은 접어두자.”
“그, 그런.”
임희의 말에 나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럼 이대로 정윤인지 뭔지 하는 사람과 결혼. 그리고 그다음 진도까지?’
내가 마음속으로 절규하는데 임희는 차분하게 말했다.
“어차피 지금 폐하는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실 것이다. 우리가 개경에 가도 폐하가 안 계실 때 정윤 전하와 혼사를 치를 수는 없다. 개경에 도착해도 한동안 생각을 해볼 시간이 있다. 나도 열심히 혼사를 무르거나 지연시킬 방도를 생각할 테니 너도 떠올려 보거라.”
전각에서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 * *
이날 이후 나는 내 처소에서 잠도 안 자고 생각에 몰두했다.
종이에다가 내가 아는 이 시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적어놓고 정윤과의 혼사를 어찌 빠져나갈까 궁리를 했다.
“근데 생각이 안 나!”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내가 이 시대의 역사가 어찌 흘러갈지 훤히 아는 것은 사실이었다.
‘앞으로 정치가 어찌 흘러갈지. 전투가 벌어지면 누가 이기고 지면 무슨 이유로 지는지. 그런 것만 빠삭해.’
그래서 이미 언급했듯이 발해의 멸망도 예견했다.
그러면 그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거란이 고려도 노릴 것을 대비해 북쪽 국경에 성을 미리 짓고 수비를 강화해 놓는 등의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미션이 어떻게 결혼을 피하냐가 되면. 내가 아는 정치, 군사적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어?’
내가 응용력이 없어서 그런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생각이 안 났다.
그리고 이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개경으로 떠날 시기가 왔다.
상산부인이 마침내 내 혼수를 다 마련한 것이다. 왕실과의 혼사를 위해 준비한 만큼 그 수량이 엄청났다.
상산에서 몇 년간에 걸쳐 조금씩 준비한 예물이었다.
임희도 개경으로 갈 군사 100명을 뽑아 준비시켰다. 후삼국시대에는 사방에서 도적들이 날뛰었다. 혼수품을 노리는 도적들이 나올 수 있어서 군사들도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타고 갈 수레도 준비됐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터벅터벅 수레로 걸어갔다.
그런 나를 보며 상산부인도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이제 연우 네가 내 슬하를 떠나는구나. 그러나 아버님이 따라가시고 나도 조만간 개경에 한번 올라갈 테니 기운을 내라. 너무 슬퍼하지 마.”
아마 상산부인은 내가 부모님 곁을 떠나서 이리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첫날밤에 정윤 왕무에게 제발 진도 빼지 말고 손만 잡고 자자고 무릎 꿇고 빌어야 하나? 그러면 들어줄까?’
상산부인과의 작별인사를 마친 나는 터덜터덜 수레에 올랐다.
“개경으로 출발한다.”
임희가 군사들에게 그런 명을 내렸다. 임희는 내 혼사에도 참석하고 개경에서 정무도 볼 겸 나와 함께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상산 군사들은 그대로 내 수레를 호위하며 북쪽으로 나아갔다.
덜컥덜컥.
흔들리는 수레에 몸을 싣고 나는 혼이 나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개경에 가도 바로 혼사를 치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개경에 도착하면 빼박 혼사가 진행된다. 그 전에 수를 내야 하는데.’
나는 장탄식을 했다. 역시나 답은 내가 가진 미래 지식에 있었다.
‘그러니까 올해가 927년이고 그래 이해에는 공산 전투가 있었어.’
임희가 국왕인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지금 출병한 상태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이 공산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의 군사들에게 대구 팔공산에서 대패한다. 아예 고려군 5천 명이 전멸하지.’
고려의 대장 신숭겸, 김락 등도 왕건을 보호하다 죽고 왕건은 진짜 소수의 군사들과 함께 탈출한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어렴풋하게 들어봤을 만한 유명한 전투였다.
‘아니 그런데 여기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으면 뭐하냐고? 당장 내 순결을 지킬 방법이…….’
결국 또다시 마음속으로 한탄을 하던 나는 순간 생각을 멈추었다. 뭔가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 어.”
그리고 그동안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떠오르지 않던 생각들의 파편들이 이어졌다.
멍하니 수레에 앉아 있던 나는 창문을 열고 군졸들에게 외쳤다.
“어서, 어서 수레를 멈춰라!”
“예, 아씨.”
다급해 보이는 내 표정에 군졸들이 재빨리 수레를 끌던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치마는 왜 이리 길어?’
혼사를 위해 개경으로 가는 거라 상산부인이 너무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혀놓았다. 나는 치맛자락을 들고 허겁지겁 뛰어갔다.
말을 탄 채 군사들을 인솔하던 임희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긴히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 뭔가를 느꼈는지 임희는 그 즉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는 주변의 군사들이 듣지 못하게 작게 속삭였다.
“정윤 전하와의 혼사를 최소한 늦출 수 있는 방도가 떠올랐습니다. 우선 개경으로 가면 안 됩니다.”
“그럼 어디로?”
“지금 제 생각에는 폐하의 군사들이 달구벌 즈음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니 개경이 아니라 폐하의 뒤를 쫓아야 합니다.”
나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폐하께서 백제의 무리들과 전투를 벌이는 곳을 쫓아가자니 그 무슨 소리냐? 그리고 그것이 네 혼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러자 나는 주위를 살피며 임희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번에 신라를 구원하러 가신 폐하께서 아마 견훤 손에 크게 패하실 것입니다.”
내 말을 듣자마자 임희는 얼굴이 새하얘졌다.
“어찌 그런 말을…….”
왕이 직접 출전한 전투에서 패한다는 말을 듣자 임희는 놀라서 안절부절못했다. 고려의 신하가 된 입장에서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 말이 새어나가면 왕이 출정했는데 불길한 말을 했다고 트집이 잡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 촉이 정확한 것을 목격해 온 임희는 내 말을 흘려듣지 못했다.
“좀 있다 이야기하자. 오늘은 여기에서 쉴 것이다. 숙영할 채비를 하라.”
그리고 임희는 주변을 둘러보며 명을 내렸다.
* * *
상산군졸들이 만든 막사에서 나는 임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변 군사들을 물린 임희가 말했다.
“폐하께서 이번에 패하시다니. 그걸 확신하느냐?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
“지금 폐하께서 신라의 서라벌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하게 출병하셨는데 견훤도 이를 짐작하고 있을 것입니다. 달구벌 근처에는 산이 많으니 이곳에 군사들을 매복시켜 놓았다가 치면 강행군을 하느라 지친 우리 군사들이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았다.
달구벌은 오늘날의 대구 근처였는데 마음이 급한 왕건은 내가 말한 그대로 움직이다가 대패했다.
“네 말이 그럴듯하긴 하다만. 그래 네 생각은 우리가 가서 그 패배를 막자는 것이냐?”
임희는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발해 멸망을 예견한 전적이 없었다면 임희는 내 말을 무시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슬며시 내 말을 사실로 가정하고 의견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