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화 (1/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화

1.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선우야! 일통삼한기 할 시간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던 아버지가 외치는 소리에 어린 김선우는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주말만 할 게 아니라 매일 했으면 좋겠어요.”

김선우의 말에 아버지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300부작 대하역사드라마 일통삼한기. 신라가 힘을 잃고 사방에서 군웅들이 일어나는 후삼국 시대를 다룬 드라마였다. 왕건, 궁예, 견훤 같은 영웅들이 나오는 드라마.

요근래 김선우와 아버지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낙에 살고 있었다.

15년 뒤.

“그때 일통삼한기에 너무 안 빠졌으면 지금 이 꼴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

김선우는 투덜거리며 공원을 휘적휘적 걸었다. 마스크를 끼고 길을 걸으니 안경에 김이 서려서 앞이 잘 안 보였다.

중간중간 안경을 벗어 닦아내며 김선우는 공원산책을 계속했다. 그러면서 김선우는 자신의 지난 15년을 회상했다.

어렸을 때 일통삼한기를 보고 성에 안 차서 재방송으로도 보다가 그것도 성에 안 차서 마침내 서점에서 고려시대를 다룬 책도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 국사 시간에는 그 덕에 알게 된 지식으로 에이스가 됐다.

“어머, 우리 선우는 되게 똑똑하구나.”

그래서 국사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선우를 칭찬하고 치켜세워줬다.

“선우는 막 어려운 책도 읽고 그래요. 나중에 커서 역사학자가 되려나 봐요.”

그 순간 곁에서 웬수 같은 친구 놈이 그렇게 맞장구를 쳤다.

‘그래 진짜 역사학자가 되어야겠다.’

물론 그때 그런 결심을 한 김선우 자신이 제일 한심스러웠다. 어려서 독서를 좀 해서 그런지 학습능력이 괜찮은 김선우는 굳은 결의로 명문대 사학과에 진학했다.

“하하하. 사학과 나와서 뭐 먹고 살게?”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먹을 때마다 그런 소리가 나오기는 했다.

그런데 친구들이 다 웃으면서 농담조로 말하는 데다가 김선우도 막연히 이런 생각을 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학교 이름도 있고.’

이런 생각을 하며 대학교를 마치고 아예 대학원에까지 진학했다. 드라마 일통삼한기의 영향인지 뭔지 고려사를 전공으로 할 마음을 먹고 관련된 공부를 했다.

한 3년쯤 공부를 하고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진입해 보니 그제서야 현실이 좀 보였다.

‘아 이거 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겠다.’

최근에 와서는 뛰어난 연구실적을 세운 사람도 평생 강사를 하다가 끝났다. 애초에 전국의 대학에서 사학과 정교수 신규 임용이 거의 없었다.

그동안 막연히 외면해 왔던 현실이 김선우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견딜 수 없어서 김선우는 즉시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곧 엄혹한 현실에 부딪쳤다.

“젠장 3년간 시간낭비를 하지 말고 바로 취업전선에 나섰어야 했는데.”

3년 만에 취업시장은 더욱 어려워졌다. 예전에는 원서를 100개 쓰면 몇 군데는 서류합격 연락이 왔는데 요새는 진짜 말 그대로 사람을 안 뽑았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선우는 이를 갈았다.

‘기필코 이 상황을 돌파한다.’

그러면서 김선우는 더 열심히 공원을 돌았다. 이런 상황일수록 체력을 키워야 하는 생각에 김선우는 열심히 공원도 돌고 취업을 위한 공부도 하고 있었다.

그런 김선우에게 노란 조끼를 입은 할머니 3명이 보였다. 할머니들은 걸레를 하나씩 들고 공원벤치를 하나 닦고 잠시 쉬다가 다음 벤치를 닦고 있었다.

정부에서 제공한 공공일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들도 저렇게 일을 열심히 하시는데, 나는 놀고 있다니. 부끄럽다.’

김선우는 새삼 이런 현실에 혀를 찼다. 그리고 공원을 한 바퀴만 더 돌고 취업공부를 하기 위해 고시원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그때였다.

“학생! 어서 피해!”

벤치를 닦던 할머니들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예? 그게 무슨?”

어안이 벙벙해진 김선우가 되물었다. 안경에 서린 김 때문에 앞에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려고 안경을 벗고 옷자락으로 닦는데 할머니들이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밑에! 땅 밑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김선우가 땅 밑을 보려 하는데 발밑이 허전했다. 땅이 소리도 없이 쩍쩍 갈라져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씽크홀?”

김선우는 무심코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씽크홀 속으로 빠져 버렸다.

* * *

“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2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 꿈을 가끔 꾼다. 나는 더듬더듬 내 가슴팍을 만져보았다.

‘역시 변한 게 없어.’

그렇게 한숨을 쉬는데 내 비명소리에 시녀 경란이가 달려왔다.

“에구머니나. 연우 아가씨. 또 악몽을 꾸셨나요? 이를 어째. 2년 전 산속에 생긴 구덩이에 떨어져 다치신 후 계속 이러시니.”

경란이가 요란을 떨며 잔사설을 늘어놓았다.

“물 한 그릇만.”

그 입을 막을 겸 나는 그런 부탁을 했다. 경란이는 재빨리 물그릇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꿀꺽-

물을 한 모금 마셨는데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 때문에 물그릇 위에 내 얼굴이 비쳤다.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은 볼 만하지만 이목구비 자체는 평범한 한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2년째 봐왔지만 이게 내 얼굴이라니 적응이 안 돼. 학창 시절에 이런 여자애를 봤다면 내가 고백했을 텐데.’

남자의 시선으로 지금 내 얼굴을 볼 때 평범한 가운데 유심히 보면 묘하게 끌리는 부분이 있긴 했다.

그렇다. 현대 한국에서 할 일 없이 공원을 거닐던 남자 취준생 김선우는 어쩌다 보니 한 소녀의 몸에 빙의하게 됐다.

그 소녀의 이름은 임연우! 이제 나는 이 세상에서 임연우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경란이에게 물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이젠 잘게.”

“예, 아가씨.”

경란이는 읍을 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침상에 누웠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몸을 뒤척였다.

‘김선우와 임연우. 묘하게 비슷한 이름이야. 내가 이 임연우의 몸에 빙의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닌 건가? 물론 더 놀라운 건 지금 세상이 10세기의 한반도라는 것.’

10세기면 내가 현대에 있을 때 즐겨보던 드라마 일통삼한기의 배경이었다. 삼한 땅 곳곳에서 호족들이 일어나 할거하고 왕건, 궁예, 견훤 같은 사람들이 날뛰던 시대였다.

어쩌면 드라마를 하도 봐서 하필 이 시대로 떨어진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빙의한 지 2년이 지났으니 이리 담담하게 생각하지, 처음에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별 이동에 시대 이동까지 했으니 도무지 버틸 수 없었다.

‘그나마 이 후삼국 시대에 떨어져도 유력한 호족의 자제에게 빙의해서 다행이지. 그래서 이 새로운 몸과 시대에 적응할 때까지 가족들과 하인들이 돌봐줬으니. 평민 자제로 태어났으면…….’

아마 적응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후삼국 시대인만큼 치안도 엉망이었다.

그런 현실을 생각하면 비록 성별이 바뀌었다고 해도 유력 호족의 자제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었다.

이 시대에서 내 아버지가 된 사람은 상산백 임희였다. 당연히 대학원에서 고려사를 공부한 나는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고려의 초대 병부령을 역임한 사람이니. 거기에 상산백으로서 상산 땅을 다스리고 있고.’

병부령이면 오늘날의 국방장관과 비슷한 지위였다.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후삼국 시대에 초대 국방장관까지 했으니 대단한 집안이긴 했다.

상산은 오늘날의 충청북도 진천군 인근이었다. 농사도 잘되고 사방의 침공에서 지키기도 좋은 지형이었다. 그래서 임희는 상산을 장악하고 상당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말이야…….’

그러나 졸려서 내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꿈 때문에 잠을 설친 것이 피곤해서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전날 잠을 설쳐서 나는 그만 늦잠을 잤다. 이불에 몸을 파묻고 있는데 시녀 경란이가 요란을 떨었다.

“연우 아가씨. 영공 각하께서 아가씨를 찾으십니다.”

경란이가 영공 각하라고 부르는 사람은 당연히 내 아버지 상산백 임희였다.

“알겠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경란이의 도움을 받아서 치렁치렁한 치마며 옷을 걸쳤다. 처음에는 이런 옷을 입는 것도 정말 갑갑했으나 이제는 많이 적응이 됐다.

그리고 아버님이 정무를 보는 전각에 이르자 경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영공 각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음, 그래 들어오라고 해라.”

전각 안에서 근엄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각 안에 들어간 나는 순간 약간 놀랐다.

평소처럼 임희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산부인까지 전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전각 안에 들어갔다.

그때 상산부인이 문득 경란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연우를 아가씨라 부르지 말고 정윤비 마마라고 부르도록 해라. 그래야 개경에 가서 적응하기가 쉽지. 호호호. 나부터 그렇게 불러야 되나? 근데 딸한테 그러려니 닭살이 돋아서.”

“예. 알겠습니다.”

경란이가 약간은 놀라며 대답하는데 또 상산백 임희가 끼어들었다.

“어허. 부인. 어찌 그리 급하시오. 정윤비라니? 아직은 확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소.”

“어머어머. 뭐가 급하다는 소리예요. 이제 우리 연우도 다 컸으니 개경에 와서 정윤 전하와 함께 지내라는 폐하의 어명이 내려오지 않았나요? 아니 이미 10세 때 우리 연우는 이미 정윤 전하와 혼사를 치른 몸이라고요.”

“어허. 부인. 10살짜리 아이들이 무슨 혼사를 맺었다고 이러시오. 그냥 약혼. 약혼만 한 걸로 봐야지. 우선은 개경에 가보고 나서 혼사가 어찌 될지 두고 봐야 하오.”

상산백 임희는 이마에 핏대까지 세우며 말했다.

상산백과 상산부인이 논쟁을 벌이는 사이에 끼게 된 경란이만 곤란해졌다.

“넌 그냥 가봐. 아버님, 어머님도 이젠 너를 신경 쓰지 않으시니.”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쭈뼛거리고 있는 경란이를 향해 말했다.

“예.”

경란이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재빨리 전각을 빠져나갔다.

“어머어머. 딸을 너무 아끼셔서 그런가 시집 보내기가 싫은신가 보죠? 물론 저도 연우가 떠난다니 아쉽지만 어쩌겠어요? 거기다가 결국은 우리 딸이 이 고려의 왕후가 되고 당신은 왕의 장인이 될 텐데.”

상산부인은 기쁜 어조로 말했다.

“끄응. 부인.”

상산백 임희는 머리를 감싸 안는데 상산부인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이미 어명. 어명이 떨어졌다고요. 폐하를 그리 좋아하는 당신이 어명을 어길 수 있겠어요?”

“…….”

이 한마디에 임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여느 때처럼 남편을 상대로 한 논쟁에서 완승한 상산부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연우야. 너도 우리들의 대화를 들어서 알겠지만 네가 곧 혼사를 위해 개경으로 가게 되었다. 이제는 진짜 정윤 전하의 아내가 되는 거야. 가서 정윤 전하를 잘 도와드리렴.”

나는 현대에서 후삼국 시대를 연구한 대학원생이었다. 즉 이 시대에 떨어진 이상 나는 한 가지 강력한 무기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미래를 읽는 능력.

‘그런데 그 능력이 있으면 뭐하겠어? 이런 상황이라면 써먹기도 힘든데. 으. 지금 졸지에 내가 결혼을 해야 할 판인데. 결혼, 결혼, 결혼! 결혼이라니!’

나는 상산부인의 말을 들은 순간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빙의한 임연우는 역사 속에서도 이름을 남긴 유명한 사람이었다. 바로 태조 왕건의 장남이자 고려 2대 왕인 혜종의 왕후까지 된다.

당연히 조만간 결혼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도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 문제가 현실로 다가오자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알맹이는 남자라고! 결혼해서 손만 잡고 자면 견딜 만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상산부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우가 너무 기뻐서 말이 안 나오는 것 같네요. 호호호.”

“흐음. 부인 어쨌든 부인이 이 큰일에 대해 연우에게 말했소. 그러니 이제부터는 연우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안 그래도 연우가 개경에 가지고 갈 혼수를 준비하려면 내가 준비할 게 많아서 나갈 참이었어요. 어찌나 딸을 아끼시는지. 우리 연우가 떠나기 전에 부녀 간에 정담이나 실컷 나누세요.”

상산부인은 그런 말을 남기고 전각을 나섰다. 그리고 전각에는 나와 상산백 임희 둘만이 남았다.

상산백 임희는 그럼에도 직접 일어나 창문 밖이나 문을 살피며 엿듣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

“연우야. 너도 들었지만 지금 네 혼사가 이루어질 판인데. 너야 워낙 총명하니 왜 이 혼사를 피해야 하는지 알겠지?”

임희가 절박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정윤 전하가 정윤이라는 작위를 사용하시는 처지이니 덜컥 혼사를 했다가는 난리가 납니다.”

“그래. 과연 요근래 네 학문이 진일보해서 이 이치를 잘 알고 있구나. 네가 어렸을 때 이 혼사를 받아들인 것이 내 실수였다. 나는 설마하니 폐하께서 결혼을 그리 많이 하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임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상산부인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임희는 정윤과 내 혼사를 은근히 반대하고 있었다.

‘물론 아버님도 처음에는 나와 정윤의 혼사가 이루어졌을 때는 신이 났겠지. 차기 국왕의 장인이 되는 셈이니.’

그런데 그 이후 일이 묘하게 돌아갔다. 태조 왕건하면 유명한 것이 수없이 많은 부인이다.

고려를 건국하고 나서 왕건은 그야말로 계속 결혼을 해서 부인을 늘렸고 그 사이에서 아들이 생겼다.

유력 호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의 딸과 결혼을 해서 호족들을 가족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호족들이 왕건과 자신들의 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을 모두 태자라고 불렀다.

이미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자신의 맏아들 왕무를 태자로 책봉했음에도 그런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외손자를 왕으로 만들겠다.

이런 선포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에 사방의 강적들과 싸워야 하는 왕건 입장에서는 그런 참람된 짓을 저지른 호족들을 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정윤이라는 작위를 만들고 그게 차기 왕위계승권자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맏이인 왕무에게 줬다.

대충 교통정리를 한 것인데 상산백 임희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다.

왕건에게 딸을 보낸 그 수많은 호족들이 어떻게든 자기 외손자를 왕으로 만들겠다고 정윤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즉 이제 나와 정윤의 혼사가 이루어지면 아버님이 정윤을 지키기 위해 그 많은 호족들과 싸워야 한다는 거지. 아버님으로서는 싫을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임희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폐하의 부인은 모두 몇 분이신가요?”

“내가 개경을 떠날 무렵에 폐하의 부인이 모두 14명. 그사이에 난 태자 전하들은 정윤 전하를 제외하고도 9명. 태자 전하들의 외가들 중 가장 세력이 미약한 곳도 능히 군사 500명을 동원할 만하다. 걔 중에서도 유긍달, 황보제공 같은 사람들은 이 아비의 세력으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구나. 거기에 정윤 전하의 외가는 저 멀리 떨어진 나주라서 지금 개경과 연락도 겨우 되고 있다.”

임희가 암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상황이니 임희가 혼약에서 발을 빼려는 것이다.

‘왕건의 부인이 결국은 29명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면 아버님은 선 채로 기절하겠군. 어쨌거나 이 시대에 새로 생긴 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혼사는 피해야 한다.’

나는 그런 결심을 했다.

실제 역사를 보면 결국 이 혼사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수많은 호족들이 정윤을 흔들어대는 와중에도 상산백 임희는 이런저런 사람들과 함께 정윤 왕무를 보호하며 어찌어찌 2대 고려국왕혜종으로 즉위시키는 데까지 성공한다.

‘그런데 세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억지로 왕위에 올라도 뭘 하겠어?’

혜종이 즉위하고 나서도 끝없이 반란과 암살 위협이 일어나고 결국 혜종은 2년 만에 병사한다.

‘상산 임씨도 멸문은 피하지만 어느 정도 정리는 되고 원래 임연우의 운명도 뭐…….’

세상의 보는 눈이 있으니 호족들도 혜종의 왕후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평생 쓸쓸하게 궁에서 지내고 그 아들은 당연히 숙청된다.

‘즉 지금 이 혼사를 못 막으면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뻔히 보이는데.’

진짜 내 알맹이가 남자라는 것을 떠나서 지난 2년간 날 돌봐준 이 시대의 가족들. 상산 임씨를 위해서라도 이 혼사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내가 그런 굳은 결의를 하는데 임희는 살며시 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연우야, 지금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 혼사를 당장 무르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시간이라도 끌 방안이 필요하다. 우선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게 시간이라도 끌면 무슨 수가 날 텐데.”

이 위기 상황에서 임희는 나를 굳게 믿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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