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225화
풍진개는 얼른 손가락으로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쉿! 지금 적제는 여기에 내가 있다고 소문이라도 내려는 건가? 조용히 왔다가 갈 생각이니까 시끄럽게 하지 말게.”
그 말에 풍백이 얼른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아니,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설마 풍 대협께서도 청송장과 어떤 관계가 있으셨던 겁니까?”
“저언혀 아무런 관계도 없네.”
“네? 그러면 여기는 무슨 일로…….”
“나는 저쪽에 볼일이 좀 있어서.”
풍백은 풍진개가 턱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던 우검학의 사제인 청수를 대동한 현호자가 연회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일 년 사이에 청수는 강호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슬슬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곧 무당신룡이라는 별호를 얻을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현호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기에 그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풍백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을 던졌다.
“무당파 도사님과 아시는 사이였습니까?”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지.”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 보니 강호와 연관이 없는 도사님인 것 같던데 몇 번이나 만나셨다니 대단히 의외군요.”
그 말에 풍진개는 슬쩍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너무 휩쓸릴 필요가 없어.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저 도사님과 친분을 다진다면 적제에게 나쁠 것 하나 없을 거야.”
풍백은 그 말을 듣고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개방에서는 현호자가 절대고수라는 걸 알고 있었구나.’
하긴 정보를 논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개방이고, 구파일방 사이의 유대 관계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일이기는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용무가 있기는 하지.”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풍진개의 모습에 풍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무슨 일인지 물어봐 달라는 얼굴 같았기 때문이다.
“바쁘시군요, 또 다른 일도 있다니. 어떤 일입니까?”
“바로 적제를 만나는 일이지.”
풍백은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전에 무한에서 헤어지면서 꼭 한 번 찾아오라고 했던 것 때문에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상산현으로 오셨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요. 제가 여기 구주현에는 잘 아는 주점이 없어서요.”
“어허! 내가 자네를 만나러 온 것이 술 때문인 것 같나?”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아니지. 그건 나중에 꼭 받아먹을 테니, 다음을 기약하자고.”
“그러면 제게 무슨 용무가 있다는 말씀이신지…….”
“미안하지만 자세히 말할 수 없는 얘기네. 그래서 간단하게만 말하자면…… 우리 개방이 자네에게 큰 도움을 받았어.”
“제…… 도움이요?”
풍백은 지금 풍진개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갑자기 자신이 도움을 줬다니, 그것도 풍진개 한 명이 아니라 개방 전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풍진개도 어쩔 수 없었다.
상인인 풍백에게 강호의 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번 사건은 개방에게도 치부라고 할 수 있었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었다.
개방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집신당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첩자가 있었다는 걸 풍백의 말을 듣고 알아차리게 됐고, 그 이후 집신당을 샅샅이 뒤져서 추가로 더 많은 첩자를 밝혀내게 되었다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말했듯이 자세히 말할 수는 없고, 그냥 그렇게 알면 되네. 그래서 개방에서 적제에게 받은 도움에 대한 보상을 하기로 했네.”
풍백은 보상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개방이 해 주는 보상이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보상을 말씀하시는 건지…….”
“이전에 적제가 그런 말을 했었지? 백건상방이 멸문을 당한 이후로 적가상방도 갑자기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그랬었지요.”
“그래서 개방에서는 적제의 도움에 대한 보상으로, 적가상방에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정보를 입수하면 미리 알려 주기로 했네.”
현재 풍백은 주기적으로 하오문을 통해 정보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하오문을 찾아가서 정보를 사 오는 것은 한계가 명확했다.
이보다는 능동적으로 누군가가 유용한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 개방이 적가상방에 그 정보를 전해 주겠다는 말이다. 풍백 입장에서는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정보가 적가상방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는 제한적인 정보지만, 이것만으로도 풍백에게는 대단한 도움이었다.
“감사합니다! 풍 대협 덕분에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습니다.”
“흐흐흐! 이 정도로 만족하면 곤란하지. 아직 한 가지가 더 있거든.”
“네? 또 있습니까?”
“이 정도로 입 닦기에는 우리가 받은 도움이 너무 크니까 형평성이 어긋나거든. 그래서 상산현에 한정하여 적가상방을 노리는 적이 나타나면, 상산현에 있는 개방 분타에서 적극적으로 막아 주기로 했네.”
풍백은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개방의 분타 하나의 힘이라고 하더라도 군소 방파는 감히 비비지도 못한다.
개방 분타의 힘과 적가상방 자체 호위무사가 힘을 합치면 백건상방을 멸문시켰던 구천마겁의 흑의인들 정도는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절정고수인 유금성이 있으니 어쩌면 수월하게 막아 낼지도…….’
이제 풍백은 아무런 부담을 가지지 않고 외유를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풍백은 풍진개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해 주신다니, 제가 뭐라고 해야 할지…….”
“내가 말했지 않나. 이건 모두 자네가 개방을 먼저 도와줬기 때문이라니까. 그러니 너무 그럴 필요가 없어.”
“제가 무슨 도움을 드린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흐흐! 그렇게 고마우면 나중에 상산현에서 사 준다는 술이나 아주 좋은 걸로 준비를 해 달라고.”
“당연하지요! 아주 깜짝 놀라게 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는 사이, 그들에게 누군가가 다가오며 말했다.
“자네는 여기는 무슨 일로 왔는가?”
무당파의 현호자였다.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풍진개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구파일방은 서로 문파가 다르지만, 항렬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현호자는 풍진개에게 사숙이나 다름없었다.
풍진개는 진중한 모습으로 말했다.
“긴밀히 논해야 할 급한 얘기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음…… 지금 바로 얘기를 해야 할 정도로 급한 건가?”
아무래도 제자의 개파식이었으니 적어도 연회가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는 이 자리에 남아 있고 싶은 현호자였다.
“아닙니다. 중요한 이야기지만 지금 당장 얘기를 할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닙니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요.”
“알겠네.”
풍진개가 뒤로 빠지자 시립한 채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청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사부님, 이 공자가 우사형을 도와줬다는 적가상방의 소상방주 적풍백 공자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적가상방의 적풍백입니다.”
풍백이 공손히 인사를 했다.
하지만 현호자는 한동안 인사를 받는 대신 풍백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청수가 조금 당황하며 다시 현호자를 불렀다.
“저기…… 사부님?”
“응? 아! 이런 내가 실례를 저질렀군. 무당파의 현호자라고 하오.”
그 말에 풍백이 웃으며 대답했다.
“굳이 존대를 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검학 장주의 사부님이시면 저에게 까마득한 어른이신데 이렇게 존대를 하시면 부담스럽습니다.”
그러자 현호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그런가? 그러면 내 편히 말하도록 하겠네.”
현호자를 직접 마주한 풍백은 신기한 눈으로 그를 보는 중이었다.
향후 어떤 사연인지 몰라도 현호자는 사사천문의 세 지존인 삼귀 중 하나와 싸울 것이다.
그리고 그를 패배시킬 것이고, 그것을 계기로 사람들은 정파와 사파의 십대고수라는 말이 사라지며 그중에 일곱 명을 선택하여 칠대무신이라 추대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의 계기가 되는 현호자는 겉으로 봐서는 전혀 대단한 고수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오히려 꼬장꼬장한 도사처럼 보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현호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네. 자네 덕분에 청송무관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지? 그리고 청송표국 역시 자네가 제안해서 만들어진 거라고 듣기도 했고.”
“원래 우검학 장주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청송무관이 무너지거나 현판을 내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얘기가 흘러갔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런가? 내가 들었던 얘기하고 많이 다른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제가 말하는 건 모두 사실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거에도 금호상방에게 착취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국 우검학은 청송장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니 풍백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현호자 역시 풍백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신기하군.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사실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네. 워낙 고지식한 면이 많아서 크게 고생할 줄 알았는데, 자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이 맞을 거야.”
현호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풍백의 귀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무공을 모르는 상방의 소상방주라고 들었는데, 듣던 것과 달리 무공을 배웠군.]
풍백의 눈에서 이채를 발했다.
현호자가 자신의 무공 수위를 알아봤기 때문은 아니었다.
서문세가주 서문자건, 그리고 유명암의 혈수마괴를 통해, 그들처럼 경지에 오른 고수에겐 자신의 무공을 숨길 수 없다는 걸 이미 익히 경험해 보았으니까.
그보다 풍백이 주목한 것은 현호자의 전음이었다.
현호자가 지금 전해 온 목소리는 일반적인 전음이 아니었다. 전음 특유의 입술을 달싹이는 동작조차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말은 현호자가 사용한 건 의성전음(意聲轉音)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뜻이 움직이는 대로 전한다는 의성전음은 기예 중에 기예였다. 강호에서 살아가는 어지간한 무인들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로 쉽게 볼 수 없는 기예다.
불문에서는 혜광심어(慧光心語)라 부르는 의성전음을 평범한 전음을 보내듯이 펼치는 걸 보면 현호자의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만히 현호자를 바라보던 풍백이 전음을 보냈다.
[제가 무공을 익혔다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 말에 현호자는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알아보지 못했네.]
[그러면 어떻게…….]
[다른 사람은 무공을 익혔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네는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 알 수 없더군.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이지 않겠나.]
현호자의 말에 풍백은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했다.
‘세상에…… 산에서 거의 평생을 보낸 도사가 찔러본 것에 그대로 넘어가다니.’
아무래도 풍백은 과거에 봤었던 현호자에 대한 정보 때문에 너무 그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방금처럼 허술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호자니까, 칠대무신이 될 현호자이니까 당연히 자신의 무공 수위를 알아봤을 것이라 생각했던 게 오판이었다.
[제가 너무 허술했군요.]
[그건 아니지. 자네는 모르겠지만, 강호에서 내가 무공을 익혔는지 여부를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네.]
그건 그랬다.
무려 칠대무신으로 손꼽히게 될 현호자의 눈을 피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렇게 들으니 확실히 현호자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며 뭐라 말하려고 할 때, 이 연회를 주최한 우검학이 다가와서 현호자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인사를 시켜 드리려고 했는데 벌써 적 공자와 만나셨군요.”
“청수가 인사를 시켜 주려고 하더구나.”
“하하하! 인사를 해 보시니 어떻습니까? 제가 서신으로 얘기드렸던 것처럼 대단한 인재 아닙니까?”
그 말에 현호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아주 놀라운 인재야.”
“역시 사부님은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쪽에 한 상단에서 무당파에 후원을 하고 싶다고 하시는 분이 계신데, 제가 소개를 해 드릴 테니 얘기를 나눠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무당파는 거대 문파다.
직접 돈을 벌기 위해 무당파 인근에서 객잔 등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꽤 많은 부분을 하산한 제자가 기부한 기부금이나 지금처럼 상방에서 전해 오는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알겠다. 곧 그쪽으로 가도록 하마.”
“네, 알겠습니다.”
우검학이 다시 돌아가자 현호자는 청수와 풍진개에게 말했다.
“내가 적 공자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적제…… 하고요?”
풍진개가 의문을 표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청수와 함께 자리를 비켜 줬다.
풍백 역시 고우길에게 눈짓으로 자리를 피해 달라 신호를 보냈고, 고우길 역시 자리를 피했다.
“사문을 물어봐도 되겠는가?”
“그건 좀 곤란한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풍백 역시 자신의 사문을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제는 황룡사의 무공만 익히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차피 강호에서 사문을 밝히지 않는 무인들은 흔하디흔했다. 그러니 굳이 현호자 역시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스물네 살입니다.”
“흠…… 스물네 살?”
현호자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의 풍백이 자신의 눈마저 속일 정도로 높은 수준의 무공을 익혔다니, 쉽게 믿기 어려웠다.
현호자는 지금 풍백의 무공 수위가 적어도 절정 이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무공 수위를 숨기기 용이한 무공을 익혔다고 하더라도 절정 수준 미만이면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없으니까.
명문정파의 제자라고 하더라도 풍백과 같은 나이에 절정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풍백에게는 적풍백이라는 아버지도 있으니 나이를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실 풍백이 진짜 스물네 살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과거로 돌아온 것도 돌아온 것이지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공간에서 보냈던 그 긴 세월까지 생각하면 스물네 살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세간의 상식으로는 풍백이 스물네 살이 맞는 것을.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를 알게 된 현호자는 풍백의 무공 수준이 아무리 높게 봐도 초절정 초입 수준이거나, 초절정을 바라보는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풍백을 무시해서 내린 판단이 아니다.
풍백의 나이에 그 정도 수준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이미 같은 연배에서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