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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223화 (308/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223화

“그럼 밤이 깊었으니 내일 다시 찾아올게.”

“…….”

제옥강의 말에도 채설지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자에서 나온 제옥강이 그녀의 거처에서 나와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그가 자신의 거처로 들어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십비(十秘).”

그러자 마치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한 사람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평범한 사람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귀신이라고 놀랐을 정도로 고절한 신법이었다.

피풍의를 두르고 있는 사내는 얼굴에 나무로 된 가면을 쓰고 있었고, 그 가면에는 십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제옥강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떤가?”

“그녀에게 소장주님은 과분한 존재입니다.”

“그건 내가 묻는 게 아닌데? 네가 봤을 때, 채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냐는 말이다.”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무뚝뚝한 그 말에 제옥강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대답할 거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나는 안중에도 없어. 아마도 얼마 후면 미련 없이 유명암으로 돌아가겠지.”

이건 추측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켜봐 왔기에 채설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사실 조금 굴욕적이기는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손에 넣지 못한 여인은 없었다. 가벼운 눈짓, 약간의 손짓만으로도 여인들은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몸을 내줬다.

하지만…… 채설지는 달랐다.

무려 반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옥강은 채설지의 마음을 얻어 내기는커녕 그녀의 목소리도 한 번 들어 보질 못했다.

이제는 인정을 해야 했다.

‘채설지는 내게 마음이 없다.’

자신이 채설지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이번 혼인에 대한 이야기는 곧 사라질 것이다.

독선장주인 만독존과 유명암주인 혈수마괴는 두 사람이 혼인을 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자신과 채설지의 혼약은 구실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독선장과 유명암이 손을 잡는 것이다.

자신들의 혼약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두 세력이 손을 잡는 건 거의 기정사실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니 굳이 혼인에 목을 맬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제옥강은 두 세력 간의 이야기를 떠나서 채설지를 손에 넣고 싶었다. 이렇게 강렬한 탐욕을 이전까지 가진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역시 채설지의 마음을 다른 사람이 가져갔기 때문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상식적으로 나를 거부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자부심일지 자신감일지 몰라도 제옥강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미 누가 그녀의 마음을 훔쳐 간 놈인지도 대충 특정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놈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지?”

“절강성에 있는 적가상방의 소상방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이전과 같습니다. 석 달 전부터 적가상방이 있는 상산현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하루의 대부분도 적가상방 내부에서 보낸다고 들었습니다.”

제옥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죽일까?’

쉬운 일이다.

어차피 그래 봐야 상방의 소상방주에 불과한 놈이다. 오대세가의 소가주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마음을 먹으면 죽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겨우 상방의 소상방주 정도 되는 놈쯤이야.

만약 채설지의 마음을 빼앗은 놈이면 이 기회에 처리해서 그 마음이 자신에도 돌아오기를 노리면 될 일이고, 아니면…… 무슨 상관인가? 그래 봐야 별것 아닌 놈 하나가 죽는 것일 뿐인데.

그러나 제옥강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풍백을 죽였다는 걸 채설지가 알게 된다면 그녀와 혼인할 일말의 가능성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직접 손을 써서 그를 죽이는 것은 조금 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조금만 더 두고 보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만약 진짜로 그놈을 네 마음에 담았다면…….’

제옥강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 * *

다각! 다각! 다각!

마차를 끄는 말발굽 소리가 청명하게 들렸다.

창밖으로 풍경을 바라보던 적호경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상산현을 떠나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진덕양이 얼른 대답했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 년 정도 전까지는 형님이 직접 상행을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랬나? 기분은 한 십 년은 상산현을 벗어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바빠서 그렇습니다, 바빠서. 그리고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들이 수작을 부리지 않았습니까.”

진덕양은 일부러 백건상방을 입에 담지 않았다.

백건상방이 수작을 부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유도 모르고 하룻밤 만에 멸문한 그들을 다시 입에 담는다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호경은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금 적호경과 진덕양, 그리고 풍백은 청송무관이 청송장으로 개파식을 여는 것에 참석하기 위해 구주현으로 가는 중이었다.

적가상방의 동반자인 청송장이기에 상방에서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이 모두 참석하기로 한 것이다.

적호경이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는구나.”

“그게 아니라 백아와 함께 나와서 기분이 좋은 것 아닙니까?”

진덕양이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적호경이 진덕양 옆에 앉아 있는 풍백을 한 번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좋지. 내가 백아와 이렇게 먼 거리를 떠나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거든.”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라 아마……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요.”

“그랬나?”

당연히 그랬다.

풍백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개망나니 생활을 알차게 해 왔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런 개망나니를 데리고 어디를 가겠는가?

딱 한 번 상행을 가르치기 위해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전날 거의 죽을 때까지 술을 퍼마신 풍백이 강아지가 되어 나타난 것을 보고 더 이상 그를 데리고 어딘가를 가려고 했던 적이 없었다.

풍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아예 시간을 내서 같이 여행을 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여행?”

“네. 저번에 창룡봉무지회 때문에 무한을 가 봤더니 참 좋더군요.”

“무한이 참 볼 것도 많고 좋은 곳이지.”

“거기서 황학루를 갔었는데, 마침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해 주신 이야기가 생각났었습니다.”

적호경은 과거를 떠올리는지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앙증맞고 작았던 풍백을 재우기 위해 눕혀 놓고 해 주었던 황학루에 얽힌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풍백이 참 좋아했던 이야기였다.

얼마나 좋은지, 한동안 잠을 자기 전에 꼭 적호경에게 황학루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잠을 잤었던 풍백이었다.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구나. 그때 네 나이가 참 어렸었는데…….”

“형님, 지금 백아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미 우리 백아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얼마나 보여 줬습니까? 적가상방을 살린 것이 바로 백아입니다.”

마치 대리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 진덕양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적호경이 혀를 찼다.

“쯧쯧…… 네가 지금 그렇게 말할 때냐?”

“아니,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언제는 나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

“어허험! 지나간 얘기는 굳이 꺼내지 마시지요. 사람이 미래를 보고 살아야지, 과거를 자꾸 캐려고 하면 어떡합니까?”

풍백은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당장은 바쁘실 테니 바로 출발하지 못하겠지만, 길게 보고 시간을 내서 함께 여행을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지금 적가상방 상황을 보면 적호경이나 진덕양이 장기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재 적가상방은 슬슬 대상방이라 불러도 될 수준이 되고 있었다.

절강성 남부는 이미 완벽하게 적가상방의 텃밭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가 되었고, 강서성 서부와 남부 역시 자신들의 상권이라 불러도 될 정도가 되었다.

지금은 남은 강서성 동부와 북부로 점차 상권을 넓혀 가고 있으며, 동시에 절강성 남쪽에 있는 복건성(福建省)으로 진출을 시작한 상태였다.

복건성 북부에 있는 무이산(武夷山)은 중원에 명성이 대단히 높은 명산으로 험한 산세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서른여섯 개의 봉우리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구곡계(九曲溪)를 필두로 한 아름다운 산세와 각종 사원은 복건성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으로 만들어 주었다.

현재 적가상방은 이 무이산 인근까지 진출을 끝마친 상태였다.

무이산이 복건성 북부 끝자락에 위치하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나오는 매출은 복건성의 성도인 복주(福州)를 제외하고는 복건성 내에서 비교할 곳이 없었다.

이제 슬슬 중원 강남에서 적가상방의 명성이 널리 퍼지는 중이었다. 어쩌면 강남 상권을 장악할 대상방으로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가상방을 운영하는 적호경과 진덕양이 어떻게 자리를 비우겠는가?

“그래, 올해는 틀린 것 같고, 내년 여름 즈음해서 움직이는 것이…….”

“여름에 가는 것보다 가을이 나을 것 같습니다. 복건성에서 벌리고 있는 일이 안정세에 들어가려면 그 정도 시간은 있어야 합니다.”

순식간에 냉철한 총관의 모습으로 돌아온 진덕양이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렇구만. 그러면 내년 가을 즈음을 생각해 보자꾸나. 그러면 무한에 가서 황학루를 돌아보고…….”

“형님! 동호도 가 봅시다, 동호!”

어느새 총관의 모습을 버리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진덕양이 외쳤다. 그런 진덕양의 모습에 또다시 적호경이 혀를 찼다.

물론 진짜 한심하다고 생각해서 혀를 차는 건 아니다. 두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모두 유대감에서 나오는 장난이었으니까 말이다.

풍백은 두 사람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게 행복이지.’

언제나 꿈에서만 봤던 광경이었다.

자신이 여행을 떠나자고 말하고, 그 여행에 대해서 언제 갈 것인지 논의하며 무엇을 구경할지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

왜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스스로를 자책하며 한 번만이라도 이렇게 했다면 마음에 한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절규했었다.

그렇게 꿈꾸던 모든 것들이 하루하루 다시 살아가며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풍백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의 눈에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적가상방의 호위무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마차는 거의 이십여 명의 무사들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적가상방의 중요 인사 세 명이 이동하는 중이라 호위무사들이 거의 총출동한 상황이었다.

마차의 선두에서는 유금성이 말을 타고 인솔하는 중이었다.

유금성은 적가상방의 호위대장이 되면서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염색했다.

이미 강호에서 유금성은 죽은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적발마도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올 수 있었다.

특히 걱정되는 것은 행여나 그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화홍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 무인들이 몰려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강호는 마검쟁탈로 인해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그러니 미연에 이런 일을 방지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유금성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염색하기로 했다.

머리카락까지 염색한 유금성은 적가상방의 호위대장이 되었고, 그 이후 적가상방의 무사들은 유금성의 인솔 아래 혹독한 훈련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이런 유금성의 훈련에 반발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무사들과 유금성이 따로 면담을 한 이후에는 입을 다물고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풍백은 이유를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이렇게 혹독한 훈련을 하니, 당연하게도 무사들의 무공은 가파르게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절정고수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훈련을 하는 상황이다. 이 정도도 상승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상방의 호위무사지만 굳이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이제 상방 호위무사도 슬슬 충원을 해야겠지.’

일단 풍백의 목표는 상방 호위무사는 적어도 오십 명, 가능하면 백 명 이상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면 백건상방과 같은 돌발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대응이 될 테니까.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는데, 마침 졸고 있던 유설화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적호경과 진덕양이 여행 얘기로 떠드는 소리에 잠을 깬 모양이었다.

본래 유설화가 따라갈 이유는 없지만, 유금성이 유설화와 오랜 시간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함께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유설화가 일어난 것을 본 적호경이 얼른 하던 말을 멈추고 유설화를 바라보며 자상하게 말했다.

“어이쿠, 이 할애비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 우리 화아가 잠을 깨 버리고 말았구나.”

유설화는 자신이 깜빡 잠이 들었다는 것이 창피했는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에요.”

“괜찮다. 원래 마차를 타면 졸린 것이 정상이야. 나도 소싯적에 마차를 타기만 하면 잠이 들고는 했었다.”

그러자 진덕양이 히죽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랬었지요. 한 번은 마차에서 조는 바람에 내려야 할 곳도 지나쳐서 노숙을 하며 돌아갔던 기억이…….”

“나만 잤었냐? 너도 같이 잤잖아.”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그랬다는 얘기지.”

두 사람의 투덕거림에 유설화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적호경은 유설화를 마치 친손녀처럼 자상하게 대해 주는 중이었다. 그것은 단지 그녀의 오라비가 적발마도라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어서 백아가 혼인을 해야 나도 손녀나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예뻐해 줄 텐데…….’

적호경은 아쉬움이 듬뿍 묻어나는 눈으로 풍백을 바라봤다.

대충 적호경의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한 풍백은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슬슬 목적지인 구주현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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