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222화
“서문세가 상황은 여전합니까?”
“네……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풍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문세가의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암울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 서문세가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믿기지 않게도 청랑파 때문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서문세가의 전력은 청랑파를 압도하는 수준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청랑파 역시 분탕질을 치면서도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기 위해 발악을 하듯이 도주하고 다녔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나마 그것도 개방이 서문세가에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개방의 빠르고 정확한 정보 제공으로 인하여 점차 청랑파가 도주하지도 못하고 서문세가에게 따라잡히는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곧 청랑파가 절강성에서 완전히 발을 빼고 강소성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절강성에서 서문세가에 의해 완전히 박살 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뀐 것은 대략 한 달하고도 보름 정도 전이었다.
이번에도 개방에서 정보를 받은 서문세가는 이곳에 청랑파의 문주를 비롯한 최고 수뇌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최고 무력단체인 뇌룡대를 출동시켰다.
서문세가는 청랑파를 처단하거나 적어도 절강성에서 완전히 몰아낼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청랑파와 드잡이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이렇게 출동한 뇌룡대는 그날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말았다.
‘여기서 설마 고죽마군(枯竹魔君)이 튀어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지.’
고죽마군은 전대(前代)의 거마(巨魔)다.
이미 죽은 걸로 알려졌던 고죽마군이 느닷없이 청랑파와 함께 나타나더니, 서문세가의 뇌룡대를 거의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후에 생존자가 들려준 얘기는 사람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고죽마군이 청랑파에게서 나타난 것만 하더라도 뇌룡대에게는 끔찍한 일인데, 심지어 고죽마군은 대략 이십여 명의 절정고수마저 대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라면 뇌룡대라 하더라도 답이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서문세가는 크게 당황하고 분노했다. 무엇보다 서문세가의 가장 큰 힘인 뇌룡대가 거의 몰살을 당했다는 것만 하더라도 서문세가가 휘청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곧 서문세가주 서문자건이 나서서 그의 별호인 광풍패도라는 말에 걸맞게 청랑파와 고죽마군을 부숴 버릴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서문자건이 나서는 일은 없었다.
이후로 청랑파는 이제 눈치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대놓고 서문세가를 노리며 공세를 펼쳤다.
그 공세를 받아 내는 서문세가는 고죽마군을 상대할 사람이 없어 소극적인 저항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체 왜 나서지 않는 거지?’
풍백 역시 뇌룡대가 몰살당한 이후 당연히 서문자건이 나설 거라 생각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서문자건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아마도 일거에 쓸어버리기 위해 모종의 계략을 짜는 중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믿음을 보일 수도 없었다.
이제 서문세가는 항주 밖으로는 거의 모든 영향력을 잃을 정도의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이렇게 서문세가가 무너졌던 건가?’
일단 과거와 조금 달라진 것은 있었다.
풍백이 알기로는 과거에는 고죽마군과 같은 전대의 거마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전직 뒷골목 흑도패였던 혈불 적웅이 전면에서 활약하며 서문세가를 압박했을 뿐이다.
‘아마도 청랑파에는 적웅 같은 고수가 없었나 보지?’
그러니 적웅과 같은 역할을 맡아야 할 고수가 필요했고, 그 고수를 파견해서 서문세가를 압박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 분명했다.
풍백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고민이었는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문세가를 노리는 곳이 어디일까?’
현재 서문세가를 노리는 곳이 영파상방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영파상방이 전대의 거마인 고죽마군을 움직일 정도로 힘이 있는 곳인지 의문이었다.
영파상방이 자신을 노린 적도 있지만, 그래 봐야 일류고수 수준이거나 돈을 풀어서 수적을 움직였던 것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상방은 모두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고죽마군과 같은 전대의 거마는 단순히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설프게 돈으로 움직이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작살이 나는 수가 있으니까.
그러니 현재 서문세가를 노리는 것은 청랑파를 앞세운 다른 어떤 곳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가능성은 열어 놔야 하니까.’
서문세가를 노릴 만한 곳은 많았다.
굳이 구천마겁이나 마교와 같은 암중에 숨어 있는 단체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당장 사도련과 사사천문만 하더라도 서문세가를 박살 낼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곳이지 않은가.
그리고 사도련과 사사천문 같은 곳에는 고죽마군과 같은 전대의 거마들이 은밀하게 몸을 담고 있을 가능성도 컸다.
‘대충 생각해도 영파상방을 제외하고 네 군데나 되네.’
어쩌면 영파상방도 이 네 곳과 연관된 전초 기지와 같은 곳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아마도 이번에 서문세가가 청랑파에 의해 무너진다면 과거와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과거에는 혈불 적웅이 절강성 남부부터 밀고 올라가고 있었기에 서문세가가 안휘성으로 옮겨 가 남궁세가를 만나 의탁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청랑파가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며 안휘성으로 가는 길목을 모두 점거한 상태다.
그러니 서문세가가 밀리면 이전처럼 안휘성으로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남쪽으로 내려오겠지.’
남쪽에서 서문세가를 도와줄 수 있는 곳이라면…… 적가상방밖에는 없다.
한참을 이런 식으로 짜 맞추던 풍백은 이내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털어 냈다.
‘이것도 병이네, 병.’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면서 너무 복잡하게 살지 않으려고 했다. 당장 내 옆에 있는 가족만 지키면서 말이다.
그런데 또 서문세가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자연스럽게 한정된 정보로 온갖 상황을 추측하며 대응할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과거에 얼마나 악착같이 훈련을 했는지, 이런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뼛속까지 새겨진 모양이다.
‘일단 보류하자, 보류. 서문세가가 절강성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것이 적가상방에게는 더 좋기는 한데,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고우길은 풍백이 깊게 고민에 빠진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이게 내가 아는 도련님의 모습인데…….’
한동안 볼 수 없었던 풍백의 모습에 고우길은 자신이 알던 풍백이 사라진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무래도 호남성으로 갔을 때,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풍백은 그런 고우길에게 물었다.
“더 이상 보고할 내용은 없나요?”
“나머지는 저희 적가상방에 관련한 소소한 내용들인데, 중요한 것들은 도련님이 더 자세히 아실 테니 일꾼들 사이에서 도는 얘기까지는 굳이 보고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풍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만 돌아가 보세요.”
풍백의 말에 고우길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풍백의 거처에서 나갔다.
혼자가 된 풍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정원으로 나왔다.
이제 혼자가 됐으니 차분히 명상을 하며 무공에 대한 고찰을 해 볼 시간이었다.
고우길은 모르겠지만, 이제 풍백은 굳이 몸을 움직이며 수련을 할 수준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고우길이 해가 지고 떠난 이후에나 지금처럼 명상을 하며 무공을 계속해서 수련하는 중이다.
풍백은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 * *
마치 성처럼 생긴 거대한 장원.
이 장원은 강호에서 많은 정파의 무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곳이었다.
사파십대고수 중 하나이자, 이존 중 하나인 만독존이 만든 독선장이 바로 이곳이었으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독이 만들어지고, 그와 함께 새로운 암기도 만들어진다는 독선장은 사천당가 이후로 가장 강력한 독과 암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사천당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자리는 모두 독선장이 차지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독선장에 대해서 말을 하면 당연히 음침하고 코를 자극하는 독향이 가득한 곳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독선장은 다른 어느 곳보다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심지어 풍기는 향기도 독향이 아닌 약향이 나고 있었고.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독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약제를 손댄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그렇기에 현재 강호에서 가장 의학이 뛰어난 곳을 논하면 황궁과 함께 언급되는 곳이 바로 독선장이었다.
이런 독선장에서 한 사람이 어딘가로 걸아가고 있었다.
대략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남자가 보기에도 참 멋지게 생긴 사람이었다.
문사풍의 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다부진 몸과 남자답게 생긴 얼굴은 바라보는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천독공자(天毒公子) 제옥강.
독선장의 소장주가 바로 이 사내였다.
사파십대고수 중 하나로 이름이 높은 만독존이 그의 조부이기에 만독존의 성명절기를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명실상부한 독선장의 실세이자 손꼽히는 고수였다.
이미 수없이 많은 고수가 존재하는 독선장이지만, 제옥강의 무위는 나이로 평가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기도 했다.
비록 아직 강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는 않으나, 간혹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보여 주는 무위는 다른 후기지수와 비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이런 제옥강이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이 걸어가고 있으니, 지나는 길에 그를 보는 사람마다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 제옥강이 도착한 곳은 독선장에서 특히 아름다운 화원이 있기로 유명한 내원의 한 전각이었다.
전각이 있는 외문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나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소장주님.”
“그대도 수고가 많군. 안에 채매는 있는가?”
“네, 화원에 있는 정자(亭子)에 계십니다.”
“그렇군. 들어가도 되겠지?”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는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자리를 비켜 줬다. 그러자 제옥강은 당당한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지나고 나오는 화원의 모습은 독선장에서 왜 이름이 높은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그럼 화원 가운데에는 제법 큼직한 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냇물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과 같은 곳에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분명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제옥강의 시선은 전혀 끌지 못했다.
이건 제옥강이 이전부터 많이 봐 왔던 곳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고 놔주지 않는 사람이 정자에 앉아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옳았다.
조용히 정자에 앉아 있는 여인.
커다랗고 투명한 눈동자는 밤하늘의 달이 반사되어 반짝였고, 미려하게 뻗은 콧대는 날카로울 지경이었으나 붉은 입술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밤바람에 살랑거리는 하얀 머리카락은 신비로워 눈을 뗄 수 없었다.
과거에는 은발마녀로, 지금은 누군가에게 은하협녀라 불리고 있는 채설지였다.
아마도 지금 광경은 강호의 누군가가 이들에 대해 설명을 듣고 본다면 크게 경악하고 말 것이다.
사파는 물론이고, 강호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독선장과 유명암의 두 혈육이 함께 있는 것이니 말이다.
독선장과 유명암이 각각 강북과 강남에 위치하고 있기에 엄청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묘한 눈으로 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테고.
제옥강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채설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거의 매일 만나고 있는 채설지였지만, 이렇게 만날 때마다 제옥강에게 충격을 안겨 주는 미모와 분위기였다.
자신을 다잡은 제옥강이 웃는 얼굴로 채설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채매, 내가 왔소.”
채설지는 고개를 돌려 무감정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도 제옥강은 채설지의 눈에 자신이 담겼다는 사실 자체에 기분이 좋아졌다.
맞은편에 앉은 제옥강은 채설지에게 물었다.
“혼자 있으면서 심심했을 텐데, 뭐하고 있던 것이오?”
“…….”
“미안하오. 내가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맡은 일이 끝나지 않아서 늦을 수밖에 없었소.”
“…….”
“식사는 하셨소? 내가 오늘은 특별히 채매의 식사에 신경을 쓰라고 말을 해 놨었는데 말이오.”
채설지는 제옥강의 말에 한 마디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옥강은 익숙하다는 듯이 혼자 계속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이 관계는 벌써 거의 반년이 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채설지는 제옥강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생각했다.
‘재미없어.’
원래 그녀의 성격이었다면, 이대로 자리를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갔어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인 혈수마괴와 했던 약속 때문이었다.
- 창룡봉무지회를 구경하는 대신, 독선장 소장주와 반년 동안 만나거라.
이 약속 때문에 아주 긴 시간을 이곳 독선장에서 보냈다.
아마도 혈수마괴는 시간이 지나면 채설지가 제옥강을 마음에 담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확실히 제옥강이 여인의 방심을 움직일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이었다면 제옥강과 함께 미래를 그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채설지는 딱히 제옥강에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고.
‘그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채설지는 풍백과 함께 보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호북성 무한까지 가면서 있었던 일들부터 사천까지 갔던 일, 그리고 헤어지던 순간까지.
어쩌면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웠던 때가 바로 그때였는지도 몰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풍백이 제옥강처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오히려 마차에서는 서로 침묵을 유지하는 일이 많았는데도 이상하게 즐거웠던 걸로 기억됐다.
‘이제 곧 약속했던 기간이 끝날 텐데…… 그러면 한 번 찾아가 볼까?’
채설지가 눈빛을 살짝 반짝였다.
이미 풍백이 적가상방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잊어버릴 수도 없는 기억이었고 말이다.
채설지가 제옥강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제옥강 역시 그녀를 보며 묘한 눈빛을 흘리고 있다는 걸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