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216화
우드득!
풍백이 여명회의 목을 한 바퀴 돌려 버리는 것을 본 순간, 손정방은 마치 자신의 목이 돌아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생각했다.
‘아…… 좆됐다. 이제 나도 저렇게 뒤지겠구나…….’
대수롭지 않은 일을 마친 것처럼 손을 툭툭 털어 대며 일어서는 풍백의 뒷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안타까웠다.
‘적어도 의뢰비 받은 것은 마누라한테 전해 줬어야 했는데…….’
꽤 많은 돈을 받았었다. 이것이라면 적어도 몇 달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의 부인은 아름다운 미모와 유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당찬 구석이 있었으니까.
아마 자신이 없더라도 아들을 잘 건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재혼은 하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을 하는 손정방의 눈에 객잔으로 들어오는 무량파의 무사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객잔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자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서 들어와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광경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으헉!”
“무, 문주님!”
“주, 죽었어!”
무량파의 무사들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몇몇 무사들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기까지 했다.
그런 무사들에게 아직 살아 있는 무량파 고수들이 황급히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살고 싶으면 입 닥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무사들은 눈치가 빨랐는지 고수들의 신호를 알아차리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손정방은 저들의 명복을 빌어 줬다. 당연히 풍백이 저들도 모두 죽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풍백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나? 너희 문파 문주하고 동료들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네?”
“깔끔하게 치우고 돌아가라. 그러면 적어도 너희까지 죽이지는 않을 테니.”
무량파의 무사들은 풍백의 말에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딱히 풍백을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문주와 문파의 고수들이 한꺼번에 죽어 나간 것을 확인했다. 이런 상황에서 풍백을 공격하는 짓을 벌인다는 것은 그냥 죽고 싶다는 말과 같았다.
무량파가 정사지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여명회에 대한 충성을 위해 옥쇄(玉碎)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풍백은 깜빡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죽은 시체하고 객잔에 들어왔던 놈들은 전낭은 모두 꺼내서 여기 식탁에 올려놔라.”
곧 무량파의 무사들이 모두 들어와 죽은 여명회와 고수들의 시신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식탁 하나에는 풍백이 말했던 데로 전낭이 쌓여 있었다.
풍백은 전낭들 중에서 여명회의 전낭을 집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뭔가 묵직해 보이는 전낭이었다.
“받아.”
풍백은 전낭을 손정방에게 던졌다.
이제 곧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손정방은 엉겁결에 전낭을 받아들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풍백을 바라봤다.
풍백은 남은 전낭을 객잔 주인에게 챙기라고 말하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뭐하나? 앉아서 전낭을 확인하지 않고.”
그 말에 손정방은 자신의 손에 들린 전낭을 확인했다.
전낭에는 금자와 은자가 넉넉하게 담겨 있었다.
“받아야 할 의뢰비가 들어 있나?”
“……그것보다 더 들어 있습니다.”
손정방은 존대를 했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무량파와 여명회가 풍백을 제압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 풍백의 장난과 같은 한 수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대체 풍백이 얼마나 고수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제는 믿을 것도 없었다. 살고 싶다면 풍백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운이 좋군. 모두 네가 가지도록 해.”
말을 마친 풍백이 다시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며칠 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온 이후로 풍백은 식사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즐기게 되었다. 아무리 방금 사람이 죽어 나갔지만, 그렇다고 식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 풍백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손정방이 슬그머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라 말하기 전에 알아서 행동한 것이다.
도주하는 건 이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고수의 눈앞에서 도주하려다가는 아마도 한 걸음도 내딛기 전에 죽을 것이다.
풍백이 식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손정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혹시 제게 원하는 것이라도…… 있는 겁니까?”
질문을 던지면서도 손정방은 당연히 풍백이 누군가를 찾거나 추적을 해 달라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예상은 풍백의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완전히 박살 났다.
“원하는 거? 딱히 그런 것 없는데?”
“네? 그러면 왜…….”
왜 자신을 붙잡고 있냐는 뒷말은 차마 하지를 못했다.
그런 손정방에게 풍백은 음식을 씹으며 말했다.
“쩝쩝…… 얘기를 하기 전에 일단 식사부터 하자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난 너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풍백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손정방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왜 저를 죽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미 제가 대협을 추적해서 무량파에게 알려 준 것을 알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글쎄…… 이유가 있기는 한데, 굳이 그걸 말해 주고 싶지는 않군.”
어떻게 말하겠는가?
네가 모르는 과거에서 우리는 동료였다는 말을 해 봤자, 손정방은 그런 풍백을 미친놈을 보는 시선으로 볼 텐데 말이다.
손정방은 풍백이 식사를 하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풍백이 식사를 마치고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릴 뿐이었다.
식탁에 올라온 거의 모든 음식을 다 먹은 풍백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러자 점소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차 두 잔을 가지고 얼른 다가왔다.
원래 이런 객잔에서 주는 차는 싸구려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점소이가 가져온 차는 제법 고급이었는지 향기부터가 달랐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풍백이 굳은 얼굴의 손정방을 보며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할 얘기가 있어서 붙잡았던 건데, 불편하게 만든 건가?”
“아, 아닙니다…….”
당연히 불편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풍백의 면전에서 할 수 없을 뿐이다.
“그러면 본론으로 빨리 들어가도록 하자고.”
손정방은 풍백에게 주목했다. 그런 손정방에게 풍백이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좋은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사람들은 당신의 경공에 더욱 주목을 했을지 모르지만, 사실 더 주목할 능력은 당신의 추적술이지. 아마도 강호에서 추적술만 놓고 보면 당신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거야.”
이건 사실이었다.
풍백은 부대에 배치되기 전에 이미 추적술을 배운 상태였지만, 실전에 더욱 걸맞게 많은 것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손정방이었다.
덕분에 그 지식을 기반으로 스스로 발전하여 손정방에 버금가는 추적술을 갖추게 된 것이고 말이다.
이 와중에도 손정방은 엄청난 고수로 보이는 풍백이 자신을 인정하는 말을 하자 어리둥절하면서도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나는 당신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거든. 되도록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바랄 정도로.”
“그러면…… 제가 당신을 위해 일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겁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닌데.”
풍백의 대답에 손정방은 조금 멍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방금 전까지 제 재능을 높이 산다고…….”
“당신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이지, 내가 당신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라고.”
말문이 턱 막힌 손정방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풍백을 바라봤다. 풍백은 그런 손정방을 보며 히죽 웃었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 난 그냥 네가 가진 재주가 아까워서 조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 뿐이라는 말이야.”
손정방은 풍백이 도와준다는 말이 어이가 없었다.
“도와준다니, 대체 뭘 도와준다는 말씀이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대로 놓아주기만 하더라도 고마울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풍백의 입에서 나온 말에 우뚝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를 돕는 것이 아니라, 네 가족을 돕고 싶은 거지. 이대로 있다가는 네 가족이 모두 죽을 테니까.”
손정방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무언가가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후부터 눈앞이 벌겋게 보이는 듯한 느낌과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느낌까지 한꺼번에 몰아쳤다.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았다.
‘안 돼…… 안 돼!’
자신의 가족이 죽는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손정방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죽었지, 가족이 죽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몸을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손정방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그대로 끈 끊어진 인형처럼 무릎을 꿇었다.
쿵!
무릎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워낙 크게 무릎을 꿇는 바람에 크게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피멍이 들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아픈 것은 손정방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얘기였다.
손정방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비비며 더듬거리는 말투로 간신히 말했다.
“제발…… 제 가족은 손을 대지 말아 주십시오……. 차라리 제가 대협의 눈앞에서 혀를 깨물고 죽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마지막에 절규하듯이 말하는 손정방의 모습에 풍백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언제 당신의 가족을 죽이겠다고 했나?”
“……네?”
“말 그대로야. 나는 당신의 목숨이든, 당신 가족의 목숨이든 빼앗을 생각이 없다고. 내가 방금 한 말은 정말로 당신 가족한테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하는 말이라는 거지.”
손정방은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면…… 누가 내 가족을 노린다는 말…… 인가?’
순간적으로 생각을 해 봤지만,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풍백은 그런 손정방에게 말했다.
“아까 옛날 동료에게서 당신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지?”
“그랬…… 습니다.”
“내 옛날 동료는 당신에 대해서 왜 알고 있었을까?”
“혹시 그 동료가 제 가족을…….”
“그건 절대 아니지. 너무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하는군.”
“죄, 죄송합니다.”
“동료의 말에 따르면 우연히 어떤 사람들이 계획을 하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 그 계획의 일부가 바로 당신의 가족을 죽이는 것이고.”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면 이해라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일초반식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이 계획의 일부라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잘 믿기지 않는 것 같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시면…….”
풍백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야.”
“……네?”
“말했듯이 옛 동료가 해 준 말을 들었을 뿐이거든. 딱히 궁금하지 않아서 자세한 얘기를 물어보지 않았지.”
손정방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욕을 꺼낼 뻔했다. 자세한 얘기를 모른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손정방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풍백은 말을 이어갔다.
“누가, 언제, 어떻게, 왜 당신의 가족을 죽이려는지 나도 몰라. 내가 아는 건 하나야. 누군가가 당신의 가족을 죽이려고 하는 중이라는 사실이지.”
“그, 그러면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신지…….”
“나야 모르지. 아마도 나라면 당장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겠지?”
풍백은 최대한 관심 없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정반대였다.
‘부디 내 말대로 해, 비토.’
풍백은 손정방의 가족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그저 손정방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면서 그가 했던 말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손정방은 과거에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오 년 동안 못 봤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서 오 년 전에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말해 줬었고 말이다.
이것으로 풍백은 올해에 손정방이 가족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외에 누가 손정방의 가족을 죽였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마도 과거의 손정방은 알고 있었겠지만, 그것을 풍백에게 말해 주지 않았으니 풍백이 알 리가 없다.
‘단서를 조금 더 주지 그랬어?’
손정방에 비하면 부대장이었던 서문표나 당세기는 알아보기 쉬웠다.
서문세가에 대해서는 풍백이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서문표를 만나자마자 대부분을 유추할 수 있었고, 당세기 역시 아마도 당가를 다시 세우는 것이 목표였을 거라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손정방은 그들에 비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다.
손정방은 심각한 얼굴로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비렁뱅이 차림을 하고 있는 복술사(卜術士, 점쟁이)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하더라도 괜히 찜찜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풍백과 같은 고수가 해 주는 말을 어떻게 쉽게 넘어갈 수 있겠는가?
풍백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생각해서 행동해. 괜히 나중에 후환을 남기지 말고.”
“정말…… 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풍백이 괜한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라면 일단 이사부터 가겠지만, 당신은 믿든지 말든지 그건 알아서 하라고.”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손정방을 향해 혀를 찬 풍백이 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서 건네줬다.
유설화에게 줬다가 받은 그 옥반지였다.
“이게…… 뭡니까?”
“내가 당신의 재주가 아까워서 주는 건데, 만약에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기고 어디에다가도 도움을 얻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이것을 가지고 적가상방으로 가 보도록 해.”
“적가상방이요?”
“적가상방이 운영하는 점포에 보이면 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아니면 아예 그걸 가지고 절강성 상산현에 있는 적가상방으로 가 보든가. 재주가 충분하니 섭섭하지 않은 자리를 내줄 거야.”
“대협은 적가상방 출신이십니까?”
손정방의 말에 풍백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내가 상방 출신처럼 보이나?”
“아니, 갑자기 이런 걸 주셔서…….”
“그냥 적가상방 소상방주를 도와주고 이런 징표를 받았었던 인연이 있을 뿐이다.”
“아…….”
풍백은 손정방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이 사실이라면, 너는 내게 빚 하나를 진 거다. 무슨 말인지 알지?”
“네에…… 알고 있습니다.”
어색하게 대답하는 손정방을 두고 풍백이 객잔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풍백이 마차를 타고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남아 있던 손정방은 한참을 멍하니 풍백이 나간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급하게 객잔을 나섰다.
가족이 위험하다고 하니, 이제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