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209화
기양현에서 추적자들을 떨구고 떠난 풍백이었지만, 그의 뒤를 쫓는 추적자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풍백이 기양현을 나오기가 무섭게 추적자들이 다시 달라붙은 것이다.
이때부터 풍백과 추적자들 사이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추적자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이 숨바꼭질의 승자는 압도적으로 풍백이었다.
풍백은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움직이면, 일정한 거리를 이동하는 순간 똑같이 생긴 마차가 십여 대는 나타나 풍백의 마차가 어떤 것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용케 풍백의 마차를 놓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알고 보면 풍백은 이미 다른 마차로 갈아탄 경우도 있었다.
방법도 다양했다.
마차는 물론이고, 말, 수레를 이용하기도 했고, 심지어 갑자기 달리던 말에서 뛰어내려 느닷없이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험준한 산을 벽호공으로 타고 오르기도 했다.
추적자들은 이 과정에서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풍백이 남악현(南岳縣)에 도착했을 때는 적어도 기척이 느껴지는 추적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풍백은 계획했던 도피 경로를 계속해서 수행했다.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추적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풍백은 마지막 도피 경로를 수행하기 위해 형산(衡山)을 오르기 시작했다.
중원 오악 중 하나라 불리는 형산을 논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의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걸 머릿속에 그리겠지만, 사실 형산은 거의 팔백 리에 이르는 대산맥이다.
이 정도 크기의 산맥으로 들어가기만 하더라도 그를 쫓아오는 추적자는 암담함을 느낄 것이다. 무려 팔백 리에 달하는 산맥에서 한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까.
아마도 평범한 사람이 산으로 도주했다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람이 움직이면서 만드는 흔적은 추적자들에게 좋은 이정표가 되어 주니까.
그러나 풍백은 추적술에 능통한 만큼, 누군가 자신을 추적할 수 있는 흔적을 절대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니 흔적을 보고 그를 쫓아오던 추적자들은 이곳에서 풍백을 놓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움직이며 풍백이 향하는 곳은 형산에서 단장애(斷腸崖)라 불리는 곳이었다.
형산은 다른 오악에 비하여 웅장하지도, 그렇다고 산세가 아주 기이하거나 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단장애만큼은 조금 달랐다.
마치 하늘에서 신장이 거대한 도끼로 산을 뚝 자른 것처럼, 봉우리 하나가 절반으로 잘린 단장애는 원래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살을 하기 시작하면서 단장애라 불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풍백은 큰 문제없이 단장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단장애가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할 것 같겠지만, 실은 제법 넓은 공터에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황량하지 않았고, 오히려 단장애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어지간한 관광지보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워낙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몸을 던졌기 때문인지, 딱히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풍백이 단장애 절벽 끝으로 다가가며 수풀을 잘 살폈다. 그러자 곧 그의 눈에 지면에 박힌 쇠못과 그것에 묶여 있는 굵은 밧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밧줄은 단장애를 따라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비록 단장애 아래는 구름이 잔뜩 끼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밧줄은 지면까지 잘 닿아 있을 것이다.
‘암상에게 맡긴 일이니 당연히 잘해 놨겠지.’
이것이 마지막 계획이었다.
풍백을 따라온 추적자들은 단장애에서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혹시나 단장애 아래까지 쫓아오려고 하는 놈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단장애에서 내려왔을 때는 이미 풍백은 떠나고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앞에는 장강으로 통하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이용하면 더 이상 추적할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추적자들을 완전히 떼어 놓기 위해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풍백은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위해 밧줄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풍백의 귀를 파고들었다.
“흐음…… 그걸로 절벽을 내려가서 도망칠 생각이었던 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누군가의 목소리.
풍백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분명히 풍백이 지나왔던 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바위에 사내 하나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있었다는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나이는 아마도 풍백보다 대여섯 살은 많아 보이는 이십대 후반.
깔끔하게 생긴 사내의 외모는 어디를 보더라도 무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훈훈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맑은 눈으로 풍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아주 반가워. 암군이라 불리더군. 이름을 알려 줄 수 있겠나?”
“…….”
“대답이 없네. 내가 너무 놀라게 했나?”
“……넌 누구냐.”
그 말에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이름을 말해 주기는 힘들군. 그냥 이렇게 부르도록 해.”
“…….”
“사소주(四小主)라고.”
풍백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그가 말한 이름만 들어 봐도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저런 놈이 얼마나 더 있다는 말이지?’
이것이었다.
스스로를 사소주라 말한 사내에게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
고수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기세와 기파를 비롯한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길에서 만나면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지나칠 것 같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사소주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일 리가 없었다.
당장 그가 나타나는 것도 전혀 몰랐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풍백을 소름 돋게 만드는 것은…… 당장 눈앞에 사소주가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눈을 감으면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할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풍백은 이런 느낌은 지금까지 살면서 딱 한 번 느껴 봤었다.
바로 혈수마괴를 만났을 때였다.
‘사파십대고수와 비교할 수 있을 절대고수…….’
풍백은 이곳에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사소주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풍백과 정반대로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놀라게 만든 것 같군.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지금은 그냥 얘기를 좀 나누고 싶었을 뿐이니까. 나는 그대가 호남성에서 보여 준 모습들을 아주 감명 깊게 봤었거든.”
“…….”
“그거 아나? 우리마저도 그대를 놓칠 뻔했다는 걸? 하마터면 그대를 쫓던 사람들이 크게 징계를 당할 뻔했지 뭔가.”
여기서 풍백은 가볍게 혀를 찼다.
이미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어떤 추적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도주 경로를 모두 수행했었던 풍백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이들을 떨궈 내지 못했다는 말은 자신이 안일하게 행동했다는 말과 같았다.
‘해이해졌어.’
당시에는 완벽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소주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 자신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심혈을 기울여 작전을 준비한 것인지 스스로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솔직히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아마 팔 하나를 잘라 내는 한이 있더라도 더 긴밀하고 치밀하게 작전을 세웠을 것 같았다.
물론 이건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기에 자기 비판적일 수밖에 없기는 했다.
풍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사소주에게 물었다.
“화홍을 가지러 왔나?”
“그렇기도 하고,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지.”
사소주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대는 누구인가?”
“…….”
“신기하게도 그대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리 조사를 해 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가 않더군.”
당연했다.
지금 외모는 면구와 역용을 한 것이고, 지금까지 이 모습으로 강호에 직접적으로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이전에 백건상방을 멸문시킨 구천마겁의 잔당을 소탕한 것은 은밀하게 이뤄진 일이니 굳이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묻겠는데, 그대는 누군가?”
풍백은 대답을 하는 대신 사소주를 가만히 바라봤다. 사소주 역시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풍백이 이내 입을 열었다.
“여기서 굳이 내가 누군지 알 필요는 없지.”
“나는 꼭 듣고 싶은데.”
“내가 누군지보다 네가 어디서 나온 놈인지 얘기하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그러자 사소주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풍백을 바라봤다.
“호오? 말투를 보니 내가 어디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것 같은데, 맞나?”
“맞아.”
“재미있군. 좋아, 그럼 내가 어디서 왔는지 맞춰 봐.”
풍백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구천마겁.”
그러자 사소주의 눈썹이 꿈틀하고 한 번 크게 움직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하하…… 이건 좀 놀라운데.”
“나도 놀랐다. 너희들이 중원에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다시 한번 사소주의 눈빛이 빛났다.
“흐음…… 설마 천마신교에서 온 사람인가?”
이 말 한마디에 풍백은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마교와 구천마겁은 이전부터 서로 알고 있던 사이였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서로 알고 있는 것인지 등은 아직 모르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히 많은 정보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풍백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내가 마교도로 보이나?”
“마교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아닌 것 같군. 그러면 마교의 머저리들을 제외하고도 중원에서 우리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는 놈들이 있다는 말인데……. 구천마겁이라는 호칭까지 알고 있는 걸로 봐서는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나 봐?”
“글쎄…… 어떨까?”
도발적인 풍백의 말에 사소주는 피식 웃었다.
“굳이 그렇게 관심을 끌려고 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너희가 알고 있다고 해 봐야 하찮은 수준일 테니까.”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고.”
끝까지 애매하게 말하는 풍백의 모습에 사소주가 뭐라 말하려고 하는데, 문득 어딘가에서 소리라도 들려온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전음을 듣는 것 같았다.
풍백은 그것을 보자마자 거의 본능적으로 품에 있던 흑연 전부를 꺼내 사방으로 던졌다.
퍼퍼퍼펑!
한꺼번에 터져나간 흑연은 단장애 전체를 검은 연기로 뒤덮어 버렸다.
이어 풍백은 정확히 사소주가 있던 방향으로 화홍을 뽑아 마치 암기를 던지듯 전력으로 던졌다. 풍백이 던진 화홍은 구환살의 묘리를 담고 허공에서 경로를 바꿔 가며 사소주에게 날아갔다.
화홍을 끝까지 가지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얼마든지 화홍을 포기할 생각이기도 했다.
지금은 바로 화홍을 포기해야 될 순간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테니까.
휭휭휭!
살벌한 소리를 내며 화홍이 사소주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 풍백은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곧장 절벽을 향해 달려갔다.
흑연 때문에 가려진 시야 속에서 풍백은 정확히 밧줄이 묶여 있던 곳으로 달렸다.
천천히 내려갈 시간도 없었다. 곧바로 절벽으로 뛰어내린 다음, 길게 늘어져 있는 밧줄을 잡아서 속도를 줄일 생각이었다.
바라는 것은 그저 풍백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소주가 조금이라도 당황을 해 주고 바로 움직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흑연을 터뜨리고 딱 두 걸음 내딛는 순간, 무언가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봤다.
풍백의 옆에는 사소주는 어느새 미소 띤 얼굴로 나타나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수장을 내미는 중이었다.
쩍!
사소주의 수장이 옆구리 조금 위쪽을 정확히 찍었다. 그 순간 풍백은 아주 익숙하면서도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으지직!
그 소리는 섬뜩한 고통과 함께 다가왔다.
치지지지지직!
두 개의 밭고랑을 만들며 주욱 밀려난 풍백은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리며 한쪽 무릎을 꺾었다.
그리고 목을 타고 올라오는 주먹만 한 무언가를 기침과 함께 뱉어 냈다.
“쿨럭…….”
선홍빛 선지피가 지면을 붉게 물들였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풍백은 사소주의 수장에 찍힌 옆구리를 만졌다. 손가락이 특정 부위를 만질 때마다 뇌리를 자극하는 통증이 올라왔다.
‘부러졌군…….’
아마도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진 것 같았다.
이건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정도 부상으로 끝난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사소주는 풍백은 단 일 장에 죽일 수 있는 강자였으니까 말이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다가온 사소주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췄다. 그의 손에는 풍백이 던졌던 화홍이 들려 있었다.
“이렇게 그냥 가려고 하면 섭섭하지. 이제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인데 말이야.”
그러면서 사소주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가볍게 손을 휘저었을 뿐이지만, 그 가벼운 손놀림에 주변을 자욱하게 메우며 시야를 가리던 흑연이 송두리째 하늘 위로 흩어져 버렸다.
풍백은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고절한 한 수였다.
흑연을 치워 버린 사소주는 화홍을 흥미로운 눈으로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참 훌륭한 검이야. 그렇지 않나? 직접 사용을 해 봤으니 알 텐데.”
“…….”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나? 명검은 스스로 주인을 가린다는.”
굳이 강호의 무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 봤던 말이다.
“그래서 남이 사용하던 명검을 손에 넣으면 반드시 그 검으로 전 주인을 죽이라고 하더군. 그래야 검이 완전히 새로운 주인에게 충성은 한다나?”
“……그래서 화홍으로 나를 죽이겠다는 건가?”
“사실 이런 미신은 나도 믿지는 않아. 검은 그저 쇳덩이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
“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찝찝한 것을 남겨 놓을 필요는 없겠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니. 내가 검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사소주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곤 요상한 표정을 짓다가 풍백을 바라보며 뇌까렸다.
“독이구나!”
풍백은 그 말에 미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랬다.
풍백은 사소주가 자신의 옆구리를 가격하는 순간, 반구혈장을 은밀히 사소주에게 뿌렸다.
사소주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미간을 좁혔다.
아마도 사소주는 내공을 움직여 반구혈장을 밀어내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평범한 독이 아닌 반구혈장이기에 생각처럼 독이 밀려나지 않고 있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