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207화
폐장원에 들어선 풍백은 마치 이곳에 자주 와 봤던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빠르게 내원으로 들어간 풍백은 곧장 거미줄이 가득한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그곳에 있는 네 개의 아궁이 중 두 번째 아궁이로 기어 들어갔다.
아궁이로 기어 들어간 풍백의 손에 작은 고리가 잡혔다.
‘이거구나.’
덜컹!
풍백이 고리를 잡아당기자 작은 소리와 함께 사람 하나가 기어 들어갈 수 있는 땅굴이 나타났다.
이곳 역시 풍백이 암향거에 의뢰를 해서 준비된 곳이었다.
원래 풍백의 계획은 자신을 쫓아오는 강호의 무인들을 녹림십팔채와 장강수로십팔채의 싸움터에 집어던지고 모습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추적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그를 쫓아오던 대부분의 무인들을 떨치는 건 가능할 거라는 계산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풍백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작전이 예상에서 빗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물론 그것이 작전 전체를 흔들 정도의 문제인 경우는 많지 않지만, 적어도 그런 경우를 대비하여 보조 계획 정도는 미리 준비해 놓는 것이 좋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준비 하나하나가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기는 하나, 이제 풍백에게 돈을 가지고 준비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렇게 써먹을 수 있고.’
사사천문의 천라지망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사천문을 이끌고 있는 탈혼수사 능광 역시 마찬가지고.
다행히 준비했던 계획대로 사사천문을 녹림십팔채와 장강수로십팔채의 싸움에 집어던지는 것은 성공했지만, 무려 초절정고수가 자신을 뒤쫓는 일은 예상을 벗어나도 너무 많이 벗어난 문제였다.
머리 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탈혼수사를 쫓아오던 수하들도 도착한 건가?’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 괜히 밖으로 나갔을 때 저들과 부딪치면 골치 아플 테니까.
풍백은 계속해서 땅굴을 기어갔다. 지면 아래에 있다곤 하지만, 행여나 소리가 들릴 것을 최대한 주의하면서 기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땅굴을 기어가던 풍백의 귀에 능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여기서 도망쳐라!”
풍백이 히죽 웃었다.
‘들켰나 보네.’
그리곤 손을 들어 땅굴에 들어오면서부터 천장 쪽에 길게 붙어 있던 줄을 잡아당겼다.
폐장원에 설치된 함정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암향거에게 말해서 준비한 함정은, 바닥에 기름과 함께 뇌화분(雷火噴)을 뿌려 달라는 것이 첫 번째였다.
뇌화분은 군부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화약인데, 이것을 불을 향해 뿌리면 평소보다 더욱 강렬한 불길이 치솟게 된다. 그 불길이 얼마나 강한지, 군부에서는 이것은 염라분(閻羅噴)이라 부르기도 했다.
본래는 군부에서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전략물자지만, 암향거라면 이런 물건을 손에 넣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뿌려진 기름과 뇌화분의 냄새를 가리기 위해 대량의 짐승 배설물을 폐장원 전체에 뿌려야 했다.
그리고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런 준비를 한 것이 단순히 쫓아오는 적들을 물러나게 하기 위함은 아니었으니까.
풍백이 진법에 대한 지식이 많기는 하더라도 직접 진법을 펼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암향거를 통하면 진법사 하나 정도 포섭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렇게 설치된 진법이 바로 만상이절진(萬想理節陣)이었다.
만상이절진은 엄청나게 대단한 진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파훼를 할 정도로 허접한 진법도 아니었다.
이 진법은 진법 안에 있는 자가 밖으로 나가려 하면, 다시 안으로 돌려보내는 효과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풍운조화를 일으킨다는 진법의 세계에서 이 정도 진법을 만나면 운이 좋은 것이겠지만, 돌려보내지는 곳이 불구덩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지옥의 염화처럼 타오르는 불구덩이라면?
이런 불구덩이에서 진법의 축을 찾는 일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으아아악!”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뜨, 뜨거워! 어디로 가야 나갈 수…….”
풍백의 귀에 능광의 수하들이 지르는 비명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딱히 불쌍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사람 목숨을 개미 목숨만도 못하게 생각하던 인간 백정 같은 놈들이었고, 이들은 몰랐겠지만 풍백의 뒤를 쫓아왔을 때부터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땅굴을 기어가던 풍백이 마침내 출구를 막고 있는 바위를 밀어내며 지상으로 올라왔다.
지상으로 올라온 풍백은 폐장원을 보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뇌화분을 뿌리면 진짜 지옥같이 변한다니까.”
풍백의 눈에 보이는 폐장원은 하나의 거대한 불덩이가 된 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이 거의 십 장가량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는데, 거의 이십 장에 가까운 거리가 떨어진 풍백조차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저 안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자! 그러면 이제 또 자리를 피해 볼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상태라면 화홍을 손에 넣은 상태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풍백이었다.
‘그런데 진짜 화홍에 전대 천하제일인의 무공이 있는 걸까?’
지금까지 화홍을 직접 사용해 왔던 풍백이지만, 아직 화홍에 어떤 비밀이 있다는 건 느끼지 못했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기로 결정한 풍백이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풍백이 자리를 뜨기 전, 또 다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쿠콰콰콰쾅!
무지막지한 굉음이 폐장원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폐장원을 집어삼키고 있던 불길조차 잠깐이나마 사라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폐장원의 담벼락 한쪽이 박살이 나며 엄청난 검강이 하늘로 쏘아졌고, 그 뒤를 따라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으아아아! 죽여 버리겠다!”
미친 듯이 고함을 치고 있는 것은 탈혼수사 능광이었다.
불타오르고 있는 폐장원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나 능광이라고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능광의 모습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큰 낭패를 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문사풍의 옷차림은 거의 모두 타 버리고 간신히 고간만 가리고 있었고, 드러난 그의 피부 역시 화상을 입거나 심하면 녹아내린 흔적까지 보이고 있었다.
일반적인 불길이었다면 초절정고수인 능광이 이렇게까지 피해를 보지 않았겠지만, 뇌화분을 촉매로 이용한 불길은 거의 대장장이들이 사용하는 용광로만큼 뜨거웠기에 피해를 입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렇게 엄청난 화상을 입었을 정도였으니 그의 머리카락이나 눈썹과 같은 털들이 온전할 리도 없었고.
괴성을 지른 능광의 희번덕거리는 눈이 풍백을 향했다. 그러자 곧장 지면을 박차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능광의 모습에 풍백이 황급히 보리패엽수를 펼칠 준비를 했다.
상대는 초절정고수였다.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 화홍을 뽑거나 쓸데없는 수를 사용할 수 없었다. 분노에 찬 초절정고수가 상대였으니, 애매한 수법을 사용하다가는 한 수에 목숨이 달아날 수 있으니까.
살기를 줄기줄기 흘리며 능광이 풍백을 향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검에서 거의 일 장에 가까운 길이의 검기가 뿜어져 나오며 풍백을 베어 갔다.
능광의 검은 아무런 변화도 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변화가 없는 만큼 그 속도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잠깐 방심을 했다가는 단 일 수에 두 동강이 날 정도로 말이다.
당연하게도 풍백은 능광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검이 움직이는 궤적을 두 눈을 부릅뜨고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기에 검이 어디를 노리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허리!’
풍백은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한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향하는 능광의 검기를 받아 갔다.
카가각!
푸슉!
두 가지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풍백의 수장이 검기를 받아 내기는 했지만, 능광의 검기가 풍백의 수장을 밀어내며 허리를 옅게 베고 지나간 것이다.
화끈한 고통에 인상을 쓸 틈도 없었다.
능광의 검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쾅! 쾅! 쾅!
능광의 검기와 풍백의 수장이 부딪칠 때마다 요란한 폭음이 사위를 진동시켰다.
풍백은 처음 부딪쳤을 때는 옆구리에 자상을 입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최소한 상처를 더 늘리지는 않았다.
능광의 검은 여전히 무시무시했다. 그의 검에서 예리하게 빛나고 있는 검기는 막대한 힘을 가지고 풍백을 찍어 누르고 있었고, 풍백은 그 검기를 받아 내며 힘겹게 자신을 보호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풍백이 더 이상 상처가 늘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의 부운연화미리보의 효과 덕분이었다.
쉬카칵!
살벌한 소리를 내며 능광의 검이 풍백의 목과 가슴, 허리를 향해 매섭게 날아왔다.
이를 악문 풍백이 목과 가슴을 노리는 검기는 쌍수로 막을 수 있었지만, 허리를 노리는 검기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면에서 둥실 떠 있는 듯한 풍백의 신형이 허리를 노리는 검기에 맞춰 뒤로 스르륵 물러서며 피할 수 있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풍백의 허리를 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능광이 버럭 고함을 치며 더욱 매섭게 검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후로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풍백의 쌍수는 최대한 능광의 검을 받아 갔고, 그가 받아 내지 못한 검기는 귀신처럼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풍백의 신형에 생채기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부운연화미리보를 대성하면 수십만 명이 싸우는 전쟁터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절대로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부운연화미리보가 어떠한 공세든지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능광의 검이 쾌검을 포기하고 변검으로 바뀌며 십여 개로 늘어나 풍백의 전신을 노려 갔다.
풍백은 그런 능광의 검을 보리패엽수로 최대한 방비했지만, 결국 네 개의 검영을 받아 내는 것은 실패했다.
놓친 네 개의 검영이 풍백을 향해 밀려갔다. 그에 따라 풍백의 신형이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려 네 군데에서 동시에 노리는 공세를 모두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스악!
가벼운 소리와 함께 풍백의 팔뚝에 제법 큼직한 자상이 생기고 말았다.
그것을 본 능광의 눈이 반짝였다.
그와 함께 능광의 검은 미려하게 변화를 일으키더니 마치 부챗살처럼 검영을 만들어 냈다.
‘기가 막히네…….’
단번에 이십여 개의 검영을 만들어 내는 수는 초절정고수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엄청나게 고급 수법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검영이 일제히 풍백의 요혈을 향해 찔러 오고 있었다.
풍백은 서둘러 보리패엽수의 절초를 펼쳤다. 그의 수장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생겨난 수영이 풍백을 주위로 빙글빙글 돌며 그를 노려 오는 능광의 검영과 상쇄되어 갔다.
쾅! 쾅! 쾅! 쾅!
연이어 폭음이 터질 때마다 풍백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명백하게 풍백이 능광의 힘에 압도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침내 검영과 수영이 부딪치면 한 걸음에서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풍백이 뒷걸음질 칠 때마다 그의 발바닥이 지면에 푹푹 파고 들었다.
꽈광!
마지막 검영이 수영과 부딪치는 소리는 특히나 컸다. 그와 함께 풍백도 단 번에 다섯 걸음으로 물러섰고 말이다.
능광은 풍백과 오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런 능광을 바라보는 풍백의 입에서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지금까지 오히려 보리패엽수라는 절정의 무공과 나이에 걸맞지 않은 내공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찍어 누르던 풍백이었다. 이렇게 내상을 입는 경우는 처음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풍백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과거에 온갖 작전을 하면서 내상을 입었던 경우는 많았다. 그렇기에 내상을 입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확실하게 알았고, 지금 내상을 입은 정도로 당황하기에는 너무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풍백을 압도하고 있다는 걸 때문인지 능광은 뒤로 물러선 풍백이 입에서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잔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가 미소를 짓는 순간, 화상을 입은 상처에서 잊고 있었던 고통이 밀려왔다.
능광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져 봤다.
“크윽…….”
얼굴에 손을 대자마자 불에 닿은 것처럼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동경이 없기에 스스로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지만, 그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상체의 거의 절반이 극심한 화상을 입고 울퉁불퉁하게 물집이 잡히고 있었고, 얼굴도 왼쪽 입술 위는 전부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얼굴까지 화상을 입은 것은 눈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도 폐장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다.
진짜로 죽을 뻔했다.
무려 초절정고수인 자신마저도 어마어마하게 타오르는 지옥과 같은 곳에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절대의 경지에 올라 수화불침지체(水火不侵之體)가 되지 않는다면 버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이렇게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느낀 적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네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것 같았다.
이전까지 죽을 뻔 했던 기억은 모두 그가 아직 강호에 대해서 잘 모를 때뿐이었다. 그러니 이번 죽을 뻔한 기억은 무려 수십 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라는 말이다.
차라리 무공으로 압도당한 거라면 창피하지는 않았으리라.
이 정도 경험과 무공을 가지고 겨우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다니, 창피해서 어디에 얘기하기도 힘들었다.
물론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강호의 온갖 사람들이 자신의 화상을 보며 별의별 얘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능광에게 치욕으로 다가왔다.
뿌드득!
능광이 요란하게 이를 갈았다.
“절대로 쉽게 죽이지 않겠다. 반드시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도록 만들어 주마.”
악의가 가득한 능광의 말에 풍백은 소매로 입가에 흐르는 선혈을 닦았다. 그리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던 놈들이 참 많았는데 공교롭네.”
“과거에 나한테 사흘에 걸쳐서 죽어 갔던 놈이 있었지. 네놈은 적어도 오 일은 살려 두마. 그러니 최대한 버텨 보도록 해라.”
“그런데 그런 말은 나를 잡고 나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내 손에서 도망칠 수 없다.”
풍백은 으르렁거리는 능광에게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누가 도망친다고 했나? 이런 멍청한 놈이 차라리 불타서 죽을 것이지, 굳이 기어 나와서 사람 귀찮게 만드네.”
“오냐, 그럼 지금 당장 네놈을 잡아다가 다리뼈부터 아작을 내 주마.”
능광이 움직이려고 하자 풍백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비웃음을 날렸다.
“웃어?”
“이제 그만 움직이는 것이 좋을 거야. 조금이라도 살아서 숨을 쉬고 싶다면.”
뜬금없는 풍백의 말에 능광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만, 거기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곧…….”
말을 하며 앞으로 걸어 나오던 능광은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
‘뭐지? 갑자기 왜 속이…….’
그리곤 그대로 입에서 속에 있던 것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우웨엑!”
능광이 토해 낸 것은 구토물이 아니었다. 검게 죽어 버린 주먹만 한 핏덩이였다.
떨리는 눈으로 자신이 토해 낸 핏덩이를 바라보던 능광이 풍백을 바라봤다.
“이, 이건…… 이건…….”
“독이야.”
“……독?”
“내가 말했잖아. 너는 이미 죽어 있다고.”
“대, 대체 언제…….”
“처음 네 검과 부딪쳤을 때 이미 하독이 끝난 상태였지.”
이제는 잊힌 사천당가의 하독술이었다. 과거 강호에서 사천당가를 무서워했던 이유 중 하나가 지금처럼 인지하지도 못하도록 하독하는 하독술이기도 했다.
무려 이백여 년이나 강호에서 사라진 하독술을 경계할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초절정고수인 능광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능광은 서둘러 내공을 움직였다.
아무리 대단한 독이라고 하더라도 내가고수는 강제로 독기를 배출할 수 있었다.
물론 본인의 내공과 독의 얼마나 독하냐에 따라 다르지만, 능광은 초절정고수였으니 어지간한 독은 모두 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공을 운기해 본 능광은 떨리는 눈으로 풍백을 바라봤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독이냐…….”
중독되었다는 건 운기를 해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독기가 자신의 내공에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독이 아니라 질병 같았다.
독을 밀어내는 건 고사하고, 간신히 누르고만 있었다.
그러나 반구혈장은 그런 능광의 내공을 밀어내며 장기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정말 사악할 정도로 끔찍한 독이었다.
그런 능광에게 풍백은 차갑게 말했다.
“반구혈장.”
“바, 반구혈장?”
능광은 반구혈장이 무엇인지, 머릿속 한구석에 있던 지식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천당가의 삼대극독!”
“알고 있네.”
“그, 그럴 리가 없다! 사, 사천당가는 이미…….”
“사천당가가 없을 뿐이지, 반구혈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니까.”
이렇게 몇 마디 하는 동안에도 몸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점차 숨이 차오르고 있었고, 다리도 후들거리며 떨렸으며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독에 중독되자마자 내공으로 독을 몰아냈어야 했다. 그러나 능광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연했다.
사천당가의 삼대극독이 무서운 점 중 하나가 바로 무색, 무취하다는 점과 중독이 되더라도 자신의 몸을 점검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으니까.
독에 중독되고도 내공을 거세게 움직이며 풍백과 싸웠으니, 그가 싸우는 동안 반구혈장은 그의 몸을 완전히 독으로 물들여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능광은 미칠 것처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함정으로 몰아넣고 불로 태우려고 했던 놈이 눈앞에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놈이 풀어 버린 독에 죽어 가는 중이었다.
‘죽어도…… 너는 데리고 가겠다!’
몸속에 있는 반구혈장을 누르려고 하던 내공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반구혈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그의 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능광이 지면을 박차고 풍백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크아아악!”
풍백에게 쏘아지듯 달려가는 능광의 검에 찬란한 서광이 솟아올랐다.
검강이었다.
하지만 그가 풍백의 앞에 이르렀을 때는 그의 검에 솟아올랐던 검강은 흐릿하게 사라지고, 검마저 아무런 힘도 담기지 않은 상태로 무력하게 풍백을 향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몸은 반구혈장에 완전히 잠식되어 내공마저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풍백은 그런 능광의 가슴에 무심하게 일장을 때렸다.
쩍!
가벼운 소리와 함께 능광이 가랑잎처럼 날아가서 쓰러졌다.
능광의 입에서 검은 선혈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꼴을 보니 지면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목숨이 끊어졌던 모양이었다.
‘이게 반구혈장…….’
초절정고수마저도 죽이는 사천당가의 삼대극독이 가진 위력을 직접 목격하니, 과거의 사천당가가 왜 공포의 대상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풍백이었다.
가만히 죽은 능광을 바라보던 풍백은 나뭇가지를 가져와 그의 시신 위에 뒤덮고 불을 질렀다.
화장을 해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반구혈장을 숨기려는 것이다. 이 정도로 대단한 극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풍백에게 어마어마한 이점이니까.
불길에 능광의 시신이 타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풍백은 팔과 허리의 상처를 지혈했다.
‘이번에는 많이 위험했어.’
폐장원에서 나온 뒤 바로 몸을 숨겼어야 했다. 아주 약간의 안일한 마음이 목숨을 앗아 갈 뻔했다.
길게 숨을 내쉰 풍백은 이내 몸을 돌렸다. 이제 다시 몸을 숨겨야 할 시간이었다.
멀리서는 아직도 장강수로십팔채와 녹림십팔채가 사사천문, 사파의 무사와 싸우며 악다구니를 퍼붓는 소리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