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205화
천라지망이라는 것은 말했듯이 단순히 많은 인원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다.
진법과 군부의 포진법을 이용하여 철저히 정해진 구역을 설정하고, 천라지망에 갇힌 상대를 원하는 곳으로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결국 원하는 곳으로 유도당한 상대는 본대에 의해 죽거나, 수없이 많은 고수들을 상대로 차륜전(車輪戰)을 치르다가 죽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풍백은 이런 천라지망에 정말 철저하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분명 천라지망을 구성하고 있는 사사천문과 사파의 무사들은 그를 한곳으로 몰기 위해 노력했다.
피리 소리를 이용해 앞에 위험한 곳이 있으니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라는 신호도 보냈고, 그의 앞에 독을 뿌리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실제로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무사들을 동원하여 함정을 파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풍백을 원하는 곳으로 몰아가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풍백은 이들의 바라는 점을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피리 소리를 이용하여 속이려고 했을 때는 오히려 뛰어들어서 수작을 부리던 무사들을 도륙하고, 독이 뿌려져 있으면 교묘하게 독이 뿌려져 있는 곳만 피해서 움직였으며, 무사들이 함정을 파고 있을 때는 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듯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다른 방향으로 뛰었다.
어쩔 때는 상대가 무려 백여 명이 넘어가는 함정을 힘으로 돌파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풍백을 쫓는 천라지망의 무사들은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당장 풍백이 잡히면 천참만륙을 내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삐이익!
삐이이익!
피리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렸고, 앞에서 달려가는 풍백을 수없이 많은 무사들이 쫓았다.
“흐억, 흐억, 흐억…… 개 같은 새끼가!”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어!”
“어떻게 저 새끼는, 흐어억…… 지치지도 않냐…… 우웨엑!”
무사들이 풍백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몇몇 무사들은 사흘 동안 그를 쫓아다니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구토를 하며 걸음을 멈췄다.
본래는 풍백이 쉽게 달리지 못하도록 그의 진로를 방해하는 무사들이 나타났어야 했지만, 거의 사흘에 걸쳐 천라지망을 헤집고 다녔던 풍백의 앞을 더 이상 막아설 무사들이 없었다.
즉, 사실상 풍백은 천라지망을 벗어난 것과 같았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천라지망을 구성하고 있던 사사천문과 사파의 무사들은 다시 풍백을 천라지망으로 집어넣기 위해 전력으로 그를 뒤쫓을 수밖에 없었다.
풍백은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사파의 무사들을 힐끔 보고는 시선을 들어 멀리 바라봤다.
‘저기구나.’
풍백이 바라보는 곳에는 매 두 마리가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치 이곳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처럼.
‘암향거에서 꽤나 신경을 써 주네.’
이번 호남행에서 암향거에게 호남성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들에 대한 보고를 맡겼다.
하오문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일발성으로 시키는 일이라면 모를까, 돈을 많이 주면 의뢰를 한 상대를 팔아먹기도 하는 하오문을 믿을 수는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 일은 직접적으로 풍백을 팔아먹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오문이 사사천문에 함정을 만들었던 것을 팔아먹으면 함정을 의뢰했던 풍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하오문이 자신의 명령으로 만든 함정을 팔아먹을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서 일을 맡겼던 거니까.
그에 비하여 암향거는 믿을 수 있었다.
상부와 차단된 철저한 독립성, 차후에 절대로 뒤를 밟지 않는 폐쇄성을 가진 암향거다.
‘적어도 황궁에서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않는 이상 나를 쫓아올 리는 없지.’
그래서 중요한 일은 암향거와 다른 한 곳을 선택해서 맡겼다. 하오문은 그저 풍백이 어설프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암향거는 풍백이 믿었던 만큼 일을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장강수로십팔채의 낭산채 습격에 대해 미리 알게 된 것도 모두 암향거에서 미리 정보를 전해 준 덕분이다. 그리고 풍백은 암향거를 통해 녹림십팔채에 이 사실을 은밀히 전하도록 지시했다.
지금 매 두 마리가 빙빙 돌고 있는 곳에서는 장강수로십팔채와 녹림십팔채가 미친 듯이 싸우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두 곳의 총표파자는 자신들이 정면으로 부딪치도록 만든 것이 풍백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모를 테고 말이다.
풍백은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지나면 자신을 쫓아오는 놈들도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품에서 큼직한 주머니를 꺼낸 풍백은 그곳에서 조그맣고 까만 구슬 같은 것들을 꺼냈다.
바로 흑연이었다.
풍백은 달리면서 흑연을 아낌없이 던지기 시작했다.
퍼펑!
퍼퍼펑!
흑연이 터지면서 쫓아오던 사파의 고수들이 움찔했지만, 그저 흑연이라는 걸 깨닫고는 풍백이 도주하기 위해 흑연을 터뜨리는 중이라 생각했는지 더욱 힘을 내서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속력으로 내달리니, 당연하게도 나무나 동료들과 부딪치는 일들이 벌어졌다.
“비켜! 이 병신아!”
“너 누구야! 누군데 병신이라는 거냐!”
“알아서 어쩌려고? 이 새끼야!”
“망할, 내 코!”
앞이 보이질 않으니 무사들의 추적 속도는 점차 떨어졌다.
그런 무사들의 귀에 요란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익!
삐이이익!
당연히 천라지망을 구성하던 동료가 부는 피리 소리라 생각한 무사들이 빠르게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렸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달리, 피리는 분 것은 풍백이었다. 풍백은 신속하게 달려가면서 흑연을 사방에 던져서 터뜨리고, 입으로는 피리를 불고 있었다.
뒤에 검은 흑연을 휘날리며 풍백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 나갔다.
* * *
삐이익!
삐이이익!
부범악은 멀리서 피리 소리와 함께 점점 다가오는 흑연을 보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직 제법 거리가 있고 당장 해금파와 싸우는 데 정신이 없는 상태지만, 분명히 흑연 속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숫자가 많았으니까.
‘나를 속였구나!’
부범악이 장검을 해금파를 향해 휘둘러 갔다. 그의 장검에서 일어난 찬란한 검강이 일어나며 마치 검이 주욱 늘어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해금파 역시 도강이 흐르는 분수도를 휘두르며 부범악의 검강을 맞아 갔다.
콰콰콰콰쾅!
두 사람의 검강과 도강이 부딪칠 때마다 무지막지한 폭발음이 사방을 울렸다.
한 번의 격렬한 격돌을 마친 두 사람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거리를 벌린 부범악이 먼저 버럭 소리를 쳤다.
“이 간악한 놈! 네놈이 숨겨 뒀던 수적들이냐?”
“그게 무슨…….”
뭐라 대답을 하려던 해금파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깨닫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흑연과 함께 몰려오는 다수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당연히 부범악이 준비한 녹림십팔채의 산적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분통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이로써 이곳에 몰려온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적들은 거의 모두 죽을 것이고, 자신도 어쩌면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데 부범악이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저들은 적어도 녹림십팔채의 산적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해금파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으하하하하! 내가 네놈이 움직였다는 걸 모를 줄 알았느냐? 이 자리가 네놈을 끌어낼 구실이었을 뿐이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치는 해금파의 모습 어디에서도 거짓말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었다. 아무렴 강호에서 굴러먹었던 세월이 얼만데 자신의 표정 하나 숨기지 못하겠는가?
이런 해금파의 모습은 부범악에게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으드득!
이를 갈며 부범악이 물었다.
“누구냐! 내가 여기로 직접 행차한다는 것을 말해 준 놈이 누구냐는 말이다!”
부범악이 함정을 준비하면서 직접 낭산채에 나설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행여나 자신이 직접 움직였다는 소식이 해금파에게 들어가면 뒤로 빠질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철저하게 비밀로 부친 것이다.
그래서 낭산채에도 겨우 며칠 전에 도착했었고, 낭산채주 등은 예고도 없이 나타난 총표파자의 행차에 기절할 듯이 놀랐었다.
그런데 이걸 알고 있었다니, 그 말은 자신이 측근이라 생각한 놈들 중 첩자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볼살을 푸들푸들 떨면서 분노하는 부범악의 모습에 해금파는 속이 시원해졌다.
물론 이것이 모두 거짓이기에 지금 몰려오는 저들이 누군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나 적어도 저들과 장강수로십팔채가 부딪치기 전에 포위를 하고 있는 녹림십팔채가 먼저 갈려 나갈 것이니, 최소한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적들은 포위망이 뚫리는 효과 정도는 볼 수 있을 것이다.
해금파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그보다 중요한 것을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상황 아닌가?”
방금 전, 부범악이 해금파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그걸 알아챈 부범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 잡종 놈! 반드시 네놈의 목을 잘라 장강을 달래는 제사상에 공물로 올려 주마!”
“으하하하! 그 전에 멧돼지 같은 네놈을 잡아다가 통으로 구워서 잔칫상에 올려 주도록 하마!”
두 사람의 초절정고수가 다시 서로를 향해 강기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쿠콰콰콰쾅!
두 사람이 부딪치는 일정 반경 안으로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싸움에서 흘러나온 강기에 스치기만 하더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는 사이, 흑연은 어느새 장강수로십팔채를 포위하고 있는 녹림십팔채의 뒤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삐이이이익!
조금이라도 싸우는 소리를 덮기 위해 요란하게 피리 소리를 울리며 풍백이 흑연의 바로 앞에서 달려왔다.
그리고 흑연이 그들을 덮치기 직전, 지면을 차고 뛰어오른 풍백이 주머니에 있던 흑연을 모두 꺼내 사방으로 던졌다.
퍼퍼퍼퍼퍼펑!
흑연이 연속으로 터지며 사방은 검은 연기에 시야를 모두 잠식당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사천문과 사파의 무사들이 녹림십팔채와 부딪치고 말았다.
사사천문과 사파의 무사들은 풍백이 내공을 담아서 불어 재끼는 피리 소리 때문에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전방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앞에 있는 것이 누군지, 얼마나 되는 인원인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사천문이다!’
‘상대가 누구든지 다 죽여 버리면 되는 일이야.’
‘천라지망을 만들려고 이천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는데, 앞에 누가 얼마나 있다고 뒤로 물러서겠어?’
‘죽이고 시체라도 뒤지면 돈 좀 만질지도…….’
이런 자신감과 자만심, 욕심이 범벅이 된 사파의 무사들이 흑연 속에서 녹림십팔채와 부딪쳤다.
푸푹!
서거걱!
“죽어랏!”
“어억…….”
“여기가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너희는 누구냐!? 나는 사사천…… 어윽…….”
“뭔 말이 많아, 이 수적 새끼야! 모조리 도륙을 내 주마!”
섬뜩한 절삭음과 악다구니가 사방에서 터졌다. 흑연 속에서 싸움에 상대를 제대로 특정하지 못하고 같은 동료끼리 싸우는 놈들도 있었다.
그렇게 싸우기 시작하면서 사사천문과 사파의 무사들을 깨달았다.
‘수, 숫자가 너무 많아!’
‘이 정도면 우리하고 차이가 별로 없는데…….’
‘대체 암군의 뒤에는 누가 있는 건가!’
이들의 의문에 대답을 해 줄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이곳은 서로 앞에 보이지 않는 지옥이었고,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쇳소리와 고통에 찬 비명, 그리고 죽어 가며 내지르는 단말마뿐이었다.
정작 이런 사태를 유발한 풍백은 앞이 보이지 않는 흑연 속에서 너무나 유려하게 움직여 싸우는 이들을 피해 몸을 숨기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연에서 빠져나온 풍백은 언덕배기에 올라 아래를 바라봤다.
풍백이 뿌린 흑연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밀려온 흑연도 있었지만, 풍백이 직접 터뜨린 흑연만 하더라도 열 개는 넘어가는 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욱한 흑연이 사방을 뒤덮는 것으로 모자라 낭산채까지 뒤덮고 있었다. 그나마 삼 층짜리 거대한 전각만이 흑연 위로 나와서 이곳이 낭산채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흑연 속에서 소란스럽게 싸우고 있는 산적과 수적, 사사천문과 사파의 무사들의 고함을 들으면서 풍백은 싸늘히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개판을 만들어 준다고 했지?”
자신이 한 말은 잘 지키는 풍백이었다.
그런데 이때, 반대편 언덕배기에서 우렁찬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그 목소리에는 막대한 내공이 담겨 있었기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듣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흑연 속에 있는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산적과 수적들은 자신들의 총표파자가 외친 소리일 거라고 믿었고,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사사천문의 무사들은 상대가 병장기를 멈추지 않으니 싸움을 멈출 수가 없었고 말이다.
풍백은 목소리에 담긴 웅혼한 내공을 듣자마자 알아챘다.
‘초절정고수다!’
그리고 그의 눈에 맞은편에 서 있는 문사풍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탈혼수사 능광이었다.
능광은 풍백을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능광 역시 풍백이 지금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자, 자신이 쫓던 암군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