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99화
상초진은 풍백이 소매를 걷는 것부터 장법으로 싸우려는 모습이 모두 허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풍백이 만들어 낸 수영을 쳐 내는 순간,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따앙!
“으음…….”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생각으로는 당연히 베어 냈어야 했다. 무려 검기를 두른 검이 아닌가.
하나 화홍과 마주쳤을 때와 완전히 달랐다.
쾌검을 기반으로 했었던 풍백의 검법은 화홍의 날카로움에 의지했을 뿐, 그의 검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금 풍백이 만들어 낸 수영은 부딪치는 순간 자신의 손아귀에 통증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의 장법에 담긴 거력이 화홍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걸 말해 주었다.
상초진은 수영과 부딪친 자신의 검이 튕겨져 나오자 그 반동을 이용하여 풍백의 하체부터 머리까지 검을 올려쳤다.
그 속도는 튕겨져 나올 때보다 몇 배는 빨랐다. 그래서 풍백의 몸 어딘가에 검상을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검이 풍백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풍백의 신형이 기이하게 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들더니 유령처럼 스르륵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정확하게 검기가 닿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다.
그 모습은 마치 새벽녘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검에 밀리는 모습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그 자연스러움이 너무나 기이하게 다가왔다.
‘이게 무슨…….’
부운연화미리보의 묘용에 상초진이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황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풍백의 수장이 허공에서 팔랑거리며 만들어 낸 수영들이 상초진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초진은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풍백이 만들어 낸 수영을 쳐 내기 시작했다.
따다다다당!
쇠와 쇠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풍백이 화홍을 들고 싸웠을 때처럼 상초진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며 검을 휘둘렀다.
이건 몰라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명백하게 상초진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목격한 금정문의 무사들에게서 점차 웅성거림이 늘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히 무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일류고수들인 조장들은 상초진이 곤혹스러운 모습으로 밀리는 것을 보며 전음으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려울 것 같아.]
[이거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니야?]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쩌려고? 암습이라도 하자는 말이야?]
이 말에 조장 중 하나가 얼굴에 살기를 드러냈다.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그런…….]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이러다가 다른 놈들이 여기로 쫓아오기라도 하면 늦는다고.]
이 말에 누구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정파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정파의 도리를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고지식한 문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은 문파가 더 많았다.
이건 금정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자신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함부로 그런 짓을 하지 않겠지만, 지금 이곳에는 오직 금정문뿐이었다.
여기서 풍백의 후방을 공격하고, 간간이 풍백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합공을 한다고 그들을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조장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차피 조장을 제외한 다른 무사들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들로서는 풍백에게 접근하는 것도 힘들 테니까.
조장들은 풍백과 상초진이 싸우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기회가 생기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풍백의 현란한 수영을 받아 내던 상초진은 조장들이 슬그머니 접근하는 것을 목격했다.
눈빛을 슬쩍 빛낸 상초진이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미세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곤 풍백의 등이 조장들을 향하도록 위치를 이동했다.
조장들과 눈이 마주친 상초진이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받은 조장들은 상초진이 승낙했다는 걸 알고 더욱 눈에 불을 켜고 풍백을 암습할 상황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 기회는 상초진이 만들어 줬다.
“으아아압!”
거센 기합과 함께 상초진이 검기를 두른 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그 움직임에 따라 수십 개의 검기가 사방으로 폭사하며 풍백이 만든 수영을 부숴 갔다.
비록 뒤로 물러서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풍백은 빠르게 수장을 움직이며 수영을 부수거나 튕겨 내고 다가오는 검기를 받아치는 데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다!]
전음으로 신호를 교환한 금정문의 조장들은 자신들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내며 풍백의 배후로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병장기에서는 일류고수의 강력한 내력이 담겼다는 걸 알려 주듯 위협적인 기세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풍백을 향해 몸을 날리고 몇 걸음 움직이기도 전에 하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파라 불리는 금정문이 이렇게 비겁한 짓을 벌이다니!”
파라락!
옷자락을 나부끼며 표홀하게 날아온 한 사람이 검을 뿌렸다. 그러자 검이 마치 부챗살처럼 늘어나며 조장들의 병장기를 일제히 튕겨 내고 말았다.
태태태탱!
“크흑…….”
“이건 또…… 뭐냐!”
“어떤 년이!”
금정문의 조장들이 풍백과 자신들 사이에 사뿐히 내려서는 여인을 노려보며 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곧 금정문의 무사들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는 여인이 서 있었다.
비록 면사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정도로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숨기지 못했다. 오히려 면사가 그녀의 미모를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것 같았다.
카가각!
풍백은 상초진의 검세를 받아치며 얼른 나타난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가 누군지 확인하는 순간, 한쪽 눈썹을 위로 들어 올리고 말았다.
‘이 여자는 여기에 왜 또 나타나는 건데?’
나타난 사람은 미래에 검후라 불릴 조유하였다.
조유하는 마검쟁탈에 뛰어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굳이 화홍을 들고 있는 유금성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가며 쫓아다니지도 않았고,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하며 여러 가지 경험만 습득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지, 마침 조유하의 시야가 닿는 거리에서 풍백과 금정문이 조우하는 것을 목도하고 말았다.
‘역시 저 인간…… 화홍을 노리고 있었던 게 맞네!’
조유하는 풍백이 화홍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이전에 만났을 때는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애매하게 대답하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슨 대단한 걸 숨긴다고. 어차피 이 시기에 호남성에 나타났다는 말은 화홍 때문이라는 말이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풍백은 황궁의 어사였다.
그리고 황궁은 강호와 또 다른 무학의 보고였다. 심지어 강호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황궁무고라는 엄청난 곳이 있고 말이다.
그런데 굳이 풍백이 위험을 감수하고 화홍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던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흥! 저 음흉한 인간의 속을 내가 어떻게 읽겠어?’
조유하는 풍백의 속에 능구렁이가 수십 마리는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딱히 풍백이 그녀에게 음흉한 수작을 부렸던 건 아니지만, 첫 만남부터 무언가 숨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풍백을 쉽게 믿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풍백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백건상방을 멸문시킨 놈들을 쫓는 사람이기도 하고…… 확실히 나쁜 사람은 아니기는 하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조유하의 눈에 금정문의 무사들이 슬금슬금 움직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조유하가 강호 경험이 많지 않지만, 적어도 금정문 무사들이 그리 좋은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비겁해.’
이렇게 정통으로 정파가 수작을 부리는 광경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의를 수호한다는 정파가 암습을 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다니, 그녀의 인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강호에서는 쉽게 통용되는 일이라는 걸 조유하는 몰랐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심한 짓을 벌이는 정파도 수없이 많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금정문의 조장들이 풍백을 암습하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에는 풍백이 저들의 암습에 당하든지, 아니면 암습에 신경을 쓰다가 앞에서 달려드는 상초진의 검에 당할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보는 순간, 조유하는 자신도 모르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외치고 있었다.
“정파라 불리는 금정문이 이렇게 비겁한 짓을 벌이다니!”
조유하는 검을 뽑아 보타암의 절학인 팔만사천반야검형을 펼쳐 금정문 조장들의 병장기를 단숨에 튕겨 냈다.
그리곤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검을 늘어뜨리고 조장들이 노리고 있는 풍백의 등을 막아섰다. 마치 풍백을 노리려면 자신부터 해치워야 한다는 것처럼.
“부끄러운 줄 아세요! 적어도 정파라면 정당하게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요?”
추상같은 조유하의 외침에 생각지도 못한 조유하의 미모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팔렸던 금정문의 조장들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자신들의 행색을 깨닫고 얼른 소리쳤다.
“동료가 있었다!”
“모두 쳐라!”
“상 당주님을 협공하기 전에 우리가 저 여자를 처리해야 한다!”
조장들은 지체하지 않고 동시에 소리쳤다.
자신들이 풍백을 암습하려던 것을 들킨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조유하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암습을 하려고 했었으면서, 오히려 조유하가 풍백과 함께 상초진에게 협공을 가하려고 한다고 외친 것이다.
조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금정문의 무사들이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병장기를 앞세우고 조유하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무인들이 달려들기 시작하자 조유하가 살짝 당황하며 소리쳤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못할망정, 오히려 살인멸구(殺人滅口)를 저지를 생각을 하다니!”
“시끄럽다, 이 마녀야!”
“사파의 마녀 주제에 어디서 큰 소리야!”
평생 처음으로 들어 보는 사파의 마녀라는 고함에 조유하의 이마에 핏대가 일어섰다.
“누구보고 사파의 마녀라는 거야!”
그러나 조유하의 말에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그녀에게 달려들며 병장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설마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조유하는 어쩔 수 없이 수십 명의 금정문 무사들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풍백은 조유하가 저들을 맡아 주는 걸 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설마 조유하가 도움이 되는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이미 금정문의 무사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뒤를 노릴 거라 예상하고 있던 풍백이었다.
저들이 자신을 공격하면, 한 놈이나 두 놈 정도를 붙잡아서 저들을 흔들어 볼 생각도 했었다. 아무래도 정파에게는 제법 협박이 잘 먹히니까 말이다.
하지만 조유하가 저들을 상대해 주고 있으니, 지금까지는 혹시나 싶어서 남기고 있었던 여력을 모두 상초진에게 쏟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풍백의 수장이 움직이며 허공에 점점이 남는 수영은 거대한 다라수나무에서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눈을 현혹했다.
그에 맞춰 둥실거리며 상초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풍백의 기이막측한 보법은 그가 펼치는 무공을 더욱 신비롭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황룡사 삼대 무공이 모두 함께 펼쳐지는 모습이었다.
부운연화미리보를 펼치며 보리패엽수를 함께 운용하고, 그 기초는 보리항마선공이 받쳐 주면서 황룡사 무공의 제대로 된 위력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풍백의 수영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늘어난 수영은 상초진을 중심으로 휘날리듯 회전하며 그에게 떨어져 내렸다.
까가가강!
두 개의 수장이 만들어 낸 수영은 상초진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도록 만들었다.
상초진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위험해…….’
생각보다 풍백이 펼치는 수영은 훨씬 위협적이었다.
수영을 자르지도 못하고 튕겨 내는 것이 전부였고, 심지어 풍백의 수영은 점점 더 강력해지는 중이었다. 이제는 검파를 잡고 있는 손아귀가 점점 마비되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풍백의 보리패엽수에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때, 풍백의 쌍장이 거대한 잎사귀 모양으로 변하더니 마치 해일과 같이 상초진을 향해 밀려왔다.
그 위력도 위력이지만, 마침 상초진이 다른 수영을 쳐 내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펼쳐진 한 수였기에 지금까지 상초진이 보여 줬던 보법으로는 피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상초진의 두 다리가 기묘한 방위로 움직이더니 이내 표홀히 떠올라 스르륵 모습이 사라졌다가 장력의 바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이형환위(以形換位)를 보는 듯한 움직임.
풍백은 그 보법을 보는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보법은…….’
모를 수가 없었다.
새외에서 풍백이 자주 싸웠던 놈들 중 한 부류가 자주 사용하던 신법이자 보법이었으니까.
상초진은 풍백에게 달려들며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이제는 진면목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인지, 검법마저 그들의 살기가 풀풀 날리는 검법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검법을 가볍게 받아 가며 풍백이 전음을 보냈다.
[천마재림(天魔再臨), 만마앙복(萬魔仰伏)!]
그러자 상초진의 눈동자가 극심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