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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85화 (241/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85화

풍백이 거처 앞에 있는 넓은 공간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평소 이곳에서 바쁘게 무공을 수련하던 모습만 보이던 풍백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직접 무공을 수련하는 것보다 이렇게 서서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람이 한 차례 풍백을 휘감고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풍백이 두 손을 천천히 앞으로 살짝 뻗었다. 그의 손에서 희미하게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에 기를 담는 것처럼 풍백의 수장에도 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수장에 담긴 기는 점차 외부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마치 수장 주위 일 척 정도 빛이 감싸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수장에서 흘러나오던 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기가 줄어드는 것과 달라 빛은 오히려 강렬해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 누군가가 있으면 풍백의 수장에 서리는 상서로운 기운을 보고 강기(罡氣)라 외쳤을 것이다.

초절정고수의 상징과 같은 경지가 바로 강기였다.

그런데 풍백의 수장에 서리던 강기는 이내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훅 사라지고 말았다.

풍백은 씁쓸한 얼굴로 눈을 떴다.

‘실패네.’

사천에서 돌아온 이후 반년 정도가 흘렀다.

그동안 풍백은 거의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무공에만 전념했다. 그가 거처를 나가는 일은 얼마 전부터 시작한 진덕양에게 상술(商術)에 대해서 배울 때뿐이었다.

아직까지도 혈수마괴가 보여 줬던 수법에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했던 기억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에 조금도 여유를 보일 시간이 없었다.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무공 수련에 열중해야 했다.

이렇게 미친 듯이 무공만을 수련한 보상인지, 얼마 전 초절정고수로 가는 단초를 깨달은 풍백이었다.

그때부터 풍백은 더 이상 초식을 수련하는 걸 멈추고, 지금처럼 깨달음에 대하여 깊은 고찰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강기를 만들지도 못했던 풍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나마 육안에 보일 정도로 강기를 만들 수는 있게 되었다.

단지 강기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처럼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직접 펼친다고 하더라도 얼마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상태라면 실전에서 강기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강기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건 초절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섰다는 말과 같았으니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풍백이 작게 한숨을 쉬며 거처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잠깐 강기를 만들었을 뿐인데도 온몸에 힘이 쪽 빠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억지로 강기를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렇게 풍백이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사이, 고우길이 풍백의 거처로 들어오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고우길의 눈동자에서는 만만치 않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풍백에게 주천금단을 받아서 복용한 이후, 현진기공을 익히며 일류고수에 도달한 고우길이었다. 지금도 풍백에게 지도를 받으며 빠르게 경지를 높이고 있었다.

풍백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놨다.

“어떻게 됐다고 하나요?”

“포정사는 안찰사의 오라에 묶여서 북경으로 송환되었다고 합니다.”

기다리던 소식이었기에 풍백은 미소를 지었다.

안찰사가 자신의 비리에 대해 조사한다는 걸 알아차린 포정사는 잡혀가지 않으려고 지겹게도 버텼다.

분명 풍백이 알기로는 벌써 잡혀갔어야 했었는데, 아무래도 화오염장을 풍백이 가져오면서 무언가가 꼬인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풍백은 행여나 포정사가 풀려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포정사가 풀려나게 된다면, 적가상방은 막대한 돈을 포정사에게 바칠 수밖에 없으니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화오염장을 제외하고도 포정사가 계획하거나 한 다리 걸친 불법적인 일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결국 원래 그랬던 것처럼 포정사가 황궁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안찰사가 저희를 주시한다는 말은 없습니까?”

“처음에는 그런 시선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적가상방와 화오염장 사이에 불법적인 관계를 찾을 수 없어서 지금은 전혀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우길은 하오문을 통해서 알아온 내용을 풍백에게 알려 주었다.

사실 풍백이 직접 나서서 암향거를 통해 알아보는 것이 가장 좋았다. 아무래도 관부의 일에 대해서는 암향거가 하오문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매번 풍백이 다른 지역까지 가서 암향거를 통해 정보를 받아 볼 수는 없었다. 의심을 받는 것도 문제지만 번거롭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고우길을 통해 하오문에서 각종 정보를 사 오는 중이었다.

“서문세가는 어떻게 되고 있다고 하지요? 청랑파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아직 그대로입니다. 서문세가가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려고 하면 청랑파가 바로 도주를 하고, 대응이 조금 미흡하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고 있으니 서문세가도 매우 곤혹스러운 것 같다는 평입니다.”

풍백은 청랑파가 절대 혼자 서문세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서문세가의 사정을 손바닥 보는 것처럼 알아보고 움직인다는 점에서 매우 의심스러웠다.

‘개방은 아닐 테고, 하오문에게서 정보를 사는 건가?’

솔직히 그건 아닐 것 같았다.

하오문은 정파에게서 거의 사파 취급을 받는 곳이다. 그러니 하오문에게 정보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결국 가장 의심되는 곳은 하나였다.

‘무영각이라는 말인가?’

처음에는 흔히 잠깐 반짝이는 정보 단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이런 곳은 흔히 있었다. 암상들이 만든 정보 단체부터 상인이 만든 정보 단체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결국 이런 곳들은 모두 시간이 흐르며 무너졌다. 끝까지 살아남은 곳은 언제나 개방과 하오문이었다.

하지만 무영각은 이전의 그런 곳들과 달랐다.

이제는 정보 단체를 논하면 개방과 하오문에 이어 무영각이라는 이름이 함께 나오고 있을 수준이니까 말이다.

풍백은 아마도 무영각이 청랑파에게 서문세가의 정보를 팔아먹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다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지.’

풍백도 무영각이 어딘지, 그들이 정보를 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까지도 무영각에 대해서는 강호에 그리 많은 것이 알려지지 않았었으니까.

지금 서문세가와 청랑파의 싸움을 보면서 풍백은 묘한 기시감(旣視感)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적웅과 서문세가의 싸움을 보는 것 같아.’

과거 적웅이 만든 사파가 서문세가와 격렬하게 싸웠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서문세가가 적웅이 만든 사파를 밟아 줄 거라고 믿었다. 무려 오대세가에 들어가는 서문세가가 이제 생긴 신생 사파에 밀릴 가능성을 타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적웅의 승리.

서문세가는 절강성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기반을 적웅에게 넘기고 안휘성으로 쫓기듯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서문세령은 남궁진과 정략혼을 하게 되고, 서문표는 군부에 투신하고 말이다.

이렇게 서문세가가 신생 사파에 패하고 안휘성으로 이주를 하면서도 서문세가주인 서문자건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서문세가가 청랑파와 싸움에서 질 거라고 믿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싸움은 지지부진하게 계속 이어지는 중이었고, 언젠가부터 서문자건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주목하고 있어야겠어. 아직 서문세가주가 나설 상황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문세가주에 대한 얘기가 너무 없잖아.’

서문세가는 적가상방에게도 중요한 거래처였다. 또한 그들이 절강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서문세가가 안휘성으로 넘어가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으며 풍백이 머릿속에 서문세가에 관련된 일들을 정리했다.

“다른 이야기는 있습니까?”

“네, 이건 좀 의외인 이야기인데…… 무혈채에 대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무혈채요?”

전혀 예상도 못한 무혈채에 대한 얘기에 풍백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풍백이 무혈채주와 부채주를 암살한 이후, 무혈채는 그대로 급전직하(急轉直下)했다. 장강수로십팔채에서는 이름이 사라졌고, 무혈채에 자리에는 다른 수채가 이름을 올렸다.

이후로 풍백은 무혈채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어차피 다시 무혈채를 찾아갈 일도 없으니까.

“무슨 소식입니까?”

“장강수로십팔채에서 무혈채주와 부채주를 암살한 범인으로 녹림십팔채를 지목했습니다. 녹림십팔채에서는 이것에 대해 극구 부정했지만, 장강수로십팔채는 이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서로 전쟁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평소에도 장강수로십팔채와 녹림십팔채가 견원지간이라는 건 모두들 아는 얘기였다. 하지만 워낙 영역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관계라 서로 싸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무혈채가 몰락하게 되면서 녹림십팔채와 직접적으로 싸우게 되다니, 풍백의 입장에서는 꽤 재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이 서로 상잔을 해 주기만 한다면 정파나 상인들 입장에서는 호재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정파에서 체력을 소진한 두 곳을 토벌하게 될지도 몰랐다.

‘수적이나 산적이나 우리 상방 입장에서도 똑같은 도둑놈들이니, 이 기회에 서로 머릿수라도 많이 줄여 줬으면 좋겠군.’

풍백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제 제일 중요한 일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겠군요.”

“네. 지금 호남성에서는 매일 엄청난 혈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화홍이라는 검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다며 마검쟁탈이라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마검쟁탈이라…… 어감이 나쁘지 않네요.”

풍백은 편안하게 들었다.

이전에는 청송무관의 우검학이 사건에 엮이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우검학이 올해가 지나기 전에 개파식을 하기 위하여 정신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마검쟁탈에 끼어들 여지가 사라졌다.

운이 좋았다.

숭무장에서 쓸데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소금까지 지원을 해 줬던 풍백이었다. 그런데 대체 일이 어떻게 망쳐졌는지, 일어나지 않도록 수작까지 부렸던 일이 결국 일어나게 되었다.

‘어이가 없었지. 굳이 손대지도 않은 일들이 틀어지며 없었던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 판국이었는데, 오히려 일어나지 말라고 지원까지 해 준 숭무장에서 결국 마검쟁탈이 일어났으니까.’

이유야 어찌 됐든 숭무장주 노성한이 우검학을 초청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노성한이 우검학을 초청했었다면, 풍백은 지금쯤 청송무관주를 살리기 위해 호남성에서 중구난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고우길은 계속해서 마검쟁탈에 대해 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한 사람이 화홍을 손에 넣은 이후로 아직 주인이 바뀌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원래 별호도 없었던 사람인데, 이번 일로 인해 별호까지 생겼다고 하더군요.”

“운이 좋은 사람이네요. 누구는 별호를 얻으려고 별 이상한 짓까지 벌이기도 하는데 말이죠.”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면서도 명복을 빌어 줬다.

수십, 수백의 무인들이 그를 뒤쫓고 있었다. 그러니 초절정고수 이상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과거에는 이 화홍이라는 검이 누구 손에 들어갔을까? 그때는 누가 얻었다는 말이 없었는데.’

이런 풍백에게 고우길이 말했다.

“맞습니다. 하오문에서는 아마도 절정고수인 것 같다고 하는데,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그저 별호로 적발마도라고 불린다고 하더군요.”

풍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무 익숙한 별호였기 때문이다.

“적발…… 마도요?”

“네, 특이하게도 머리카락이 붉은빛이라고 하더군요.”

고우길은 아무래도 유금성과 연결을 시키지 못하고 있을 것 같았다.

풍백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래, 유금성은 아닐 거야. 머리카락이 붉은색인 사람이 많은 건 아니지만, 유금성은 동생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평범하게 살겠다고 했잖아. 그런 사람이 마검쟁탈에 뛰어들 리가 없지.’

굳혔던 얼굴을 핀 풍백이 머릿속에서 적발마도라는 글자를 지워 버렸다.

“보고할 건 끝난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수련을 한번 봐줄게요. 저녁 식사 이후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때 찾아오겠습니다!”

고우길이 환히 웃으며 크게 대답했다.

풍백에게 지도를 받을 때마다 성장기 대나무처럼 무공이 쑥쑥 늘어나는 걸 느끼고 있는 고우길이었다. 그러니 풍백이 무공을 봐준다는 말에 얼굴 가득 기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풍백은 고우길이 나가고 난 이후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그러고 보니 당가에서도 곧 청송표국으로 당세기를 보낼 거라고 했었지?’

당가는 매일같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풍백에게서 무공과 주천금단을 받은 당가는 반년 사이에 일류고수 한 명과 다수의 이류무인을 양성해 냈다. 여기서 일류고수가 된 사람이 바로 당세기였다.

남아 있는 이류무인 중에서도 몇 명은 곧 일류고수에 들어설 것 같다는 말도 들었다.

이것만이 아니라 독과 암기에서도 빠르게 발전 중이었다. 이미 풍백이 건네줬던 책자의 내용은 모두 흡수하고 직접 생산 중이라는 말도 들었다.

‘이 상태라면 앞으로 일이 년 후가 볼만하겠네.’

당장은 인원이 적어서 대단한 두각을 나타낼 수 없겠지만, 적어도 당가가 스스로 자립하게 되었다는 건 강호의 모든 문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가가 발전한 것처럼 적가상방은 그 이상으로 규모가 커졌다.

이전에 진출했던 지역에서는 공고히 자리를 잡았고, 절강성 남부와 강서성 서부에 있는 어지간한 현들에는 적가상방이 진출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이제 중견 상방이라는 이름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래도 아직 멀었어. 앞으로 호남성과 사천성까지 진출해야 되니까.’

나중에 당가가 사천으로 돌아갈 정도가 된다면 적가상방이 사천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진출 방향을 사천으로 잡았고, 적가상방이 사천으로 진출하면서 당가와 힘을 합칠 계획이었다.

앞으로 적가상방이 커 나갈 것을 생각하니 풍백은 입가에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곧 풍백의 귀에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금 전에 나갔던 고우길이 꼬마아이를 대동하고 급히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돌아본 풍백은 고우길과 함께 들어오는 아이를 보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물범벅인 여자아이는 바로 유금성의 동생인 유설화였다.

풍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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