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81화
먹먹한 얼굴로 풍백을 바라보던 적호경이 천천히 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풍백도 걸어오는 적호경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주했을 때는 감동적인 해후의 모습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너 이 녀석!”
짝! 짝! 짝!
적호경이 매섭게 풍백의 등짝을 두드렸다.
“아야! 아야야! 아픕니다, 아버지!”
“아프라고 때리는 거다, 아프라고!”
풍백의 등짝을 두드리는 적호경의 모습에 주약란은 슬그머니 수월이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아무래도 다 큰 성인인 풍백이 아버지에게 맞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건 창피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삼은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려고 했다. 그러나 왕삼 역시 수월이에게 귀를 잡혀서 끌려갔다.
“아니, 왜 때리시는 건지 얘기라도 좀 하시고…….”
“그걸 몰라서 물어?”
풍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곤 다가오는 진덕양에게 물었다.
“숙부님? 아버지가 왜 이러시는지…….”
“백아.”
“네, 숙부님.”
“지금은 일단 좀 맞자. 나도 네 아버지와 같은 생각이니까.”
“네?”
풍백의 등짝을 두드리는 손이 더 늘어났다. 진덕양 역시 적호경과 같이 풍백의 등짝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짝! 짝! 짝!
“아이고, 아버지! 숙부님! 이제 그만…….”
“아직 멀었어!”
“그래, 너는 좀 더 맞아야 다시는 그런 짓을 벌이지 않지!”
그러면서 왜 적호경과 진덕양이 풍백을 이렇게 때리고 있는지 그들의 입에서 이유가 흘러나왔다.
“내가 몸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냐, 안 했냐!”
“그렇지! 나도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었다!”
“그런데 수적들에게 스스로 잡혀가겠다고 해?”
“수적들에게 잡혀가면 죽는 거야, 죽는 거!”
“이 아비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스스로 잡혀가겠다고 해!”
그제야 무한으로 가면서 무혈채에게 습격당했을 때, 스스로 잡혀가려고 했던 일 때문에 맞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러나 풍백은 변명을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분명히 계획이 있었다.
일단 잡혀가는 것처럼 끌려가서, 오히려 무혈채 놈들을 붙잡고 누가 시킨 일인지 확인한다는 아주 안전하고 효율적인 계획 말이다.
하지만 이런 변명을 지금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어떤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할 수도 없고 말이다.
아마도 풍백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앞으로 무공을 믿고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더 붙잡힐지도 몰랐다.
물론 이것 때문에 얘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결국 풍백은 잘못했다고 비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하지!”
풍백의 약속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적호경은 지나가는 말투인 것처럼 작게 말했다.
“그래도…… 잘했다.”
“네?”
적호경의 칭찬에 풍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진덕양이 말했다.
“흐흐흐! 네가 인의공자라 불린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입술이 귀에 걸렸었다.”
그 말에 적호경이 눈을 부라렸다.
“내가 언제 입이 귀에 걸렸다는 거냐!”
“형님은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니까 몰랐던 거겠지요. 그때 봤을 때는 확실히 입술이 하늘로 솟구쳐서 내려올 생각은 안 하던데요.”
“끄응…….”
앓는 소리를 한 번 낸 적호경이 입을 열었다.
“그때 당시에 네가 했던 일은 잘한 것이기는 했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던 것은 충분히 칭송받아도 될 일이지.”
“아, 예…….”
“하지만! 네 목숨이 너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애비도 죽고 네 숙부도 죽으며, 적가상방도 무너지는 것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러자 진덕양이 슬그머니 말했다.
“아니, 저는 왜 죽이는 겁니까?”
“이놈이!”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그래야 복수도 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듣고 보니 진덕양의 말도 맞았다.
진덕양은 씨익 웃으며 풍백과 적호경의 등을 떠밀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할 얘기가 얼마나 많은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겁니까?”
풍백과 적호경은 진덕양과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 들어오고, 시비가 세 사람 앞에 차가 대령한 다음에야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설명을 해 보도록 하거라.”
“자세하게 얘기를 해야 돼. 네가 돌아오기는 네 아버지는 물론이고, 나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적호경이 진덕양이 닦달하는 것을 들으며 풍백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적호경과 진덕양이 끼어들었다.
“지금…… 개방이라고 했느냐?”
“그것도 풍진개라고? 개방의 차기 방주라는 후개?”
“그렇습니다.”
풍백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에 먼저 소문을 들었던 두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소문이다 보니, 풍백을 무혈채에게서 구해 줬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특히 당시에 풍진개가 개방 특유의 오의를 입고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풍진개가 아니라 정파의 고수라 알려지기도 했었다.
풍백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풍진개를 알아보고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술을 대접했던 이야기, 무혈채의 협박에 풍백이 자진해서 먼저 나섰다는 이야기, 그에 풍진개가 나서서 무혈채와 싸우기 시작한 이야기까지.
적호경과 진덕양은 풍백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험한 순간에는 걱정 어린 표정을, 통쾌한 순간에는 자신의 허벅지를 때리며 집중했다.
“오오! 여자 고수도 있었구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걱정이었다. 그 여자 고수가 바로 은하협녀라 불리는 그 여류 고수구나!”
풍백은 진덕양이 은하협녀를 입에 담는 것을 보며 이 자리에 채설지가 있었으면 재미있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후 풍진개와 채설지를 동행하고 무한으로 향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적호경과 진덕양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개방의 후개와 동행을 했다고 한다!’
‘구파일방의 대문파와 함께했다니…… 이렇게 운이 따라 줘도 되는 겁니까?’
이미 서문세가와 제법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적가상방이다. 그러나 개방은 서문세가와는 또 다른 영역에서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지 않은가.
정파의 열 개의 기둥이라 부리는 구파일방이다. 이런 곳과 연을 맺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충분히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적호경과 진덕양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이야기를 하는 풍백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평생 동안 상행을 하면서 고위 인맥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만들었던 적이 없던 두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상산현의 중간 관리자급 인맥도 없어서 아등바등했겠는가?
풍백의 이야기는 창룡봉무지회를 참석하기 위해 무한에 도착한 이후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두 사람이 너무나 궁금해했던 사마세가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적호경과 진덕양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해 갔다.
특히 하오문의 무사들에게 객잔에서 습격을 당했다는 부분에서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기도 했다. 다행히 고우길이 그들을 모두 물리쳤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사마세가에 관련된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적호경과 진덕양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사마세가에서 보내온 협정서를 탁자에 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 협정서가 그런 과정에서 나온 거라는 얘기인 거냐?”
“아무리 사마세가지만…… 소가주라는 놈이 보통 미친놈이 아니구나!”
풍백은 분노를 겉으로 발산하고 있는 적호경과 진덕양을 보며 사마세가의 협정서를 빠르게 읽어 갔다.
협정서를 읽어 본 풍백은 이것이 처음 자신이 요구했던 것보다 더욱 유리한 항목을 확인하고 쉽게 결론을 내렸다.
“손을 잡자는 말이네요.”
원래 풍백이 요구했던 협정서는 단순히 사마세가에 목줄을 채우는 정도였다. 혹시라도 적가상방을 물려고 하면 밀어낼 수 있는 목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손에 들린 협정서는 그것을 뛰어넘어 향후 동반자가 되자고 권유하는 중이었다. 그 일환으로 적가상방에서 취급하는 상품을 자신들이 구입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그 상품은 소금이나 호초가 될 것이다.
“이리 내놔라. 당장이라도 찢어 버릴 테니까.”
적호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협정서가 적가상방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감히 풍백을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시도를 하고 협박까지 했다는 얘기를 듣고 보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적가상방에게 유리한 협정서라고 하더라도 풍백의 안위와 비교하면 하찮은 것이었다.
하지만 풍백은 협정서를 잘 접어서 봉투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러면 안 되지요. 이렇게 좋은 협정서를 왜 찢으려고 하세요?”
“이번에는 나도 네 아버지와 같은 생각이다. 그까짓 낙양이야 우리가 진출하지 않으면 그만이야. 굳이 하남성에 진출하지 않아도 어차피 바쁜 상황이니까.”
솔직히 하남성에 진출할 계획 자체가 없었다. 이제 겨우 강서성 동부에 점포를 만들고 진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남성을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만약 강서성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다고 하더라도 하남성에 진출하기 전에 호남성, 호북성, 안휘성을 진출하는 것이 먼저였다.
굳이 이런 협정서에 목을 맬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럴 수 없지요.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사마세가와 직접 거래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협정서만 있으면 사마세가는 더 이상 우리에게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찢으면 안 되지요.”
당사자인 풍백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적호경과 진덕양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넘어갔다. 비록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표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풍백의 이야기는 창룡봉무지회에서 당가타의 당세기를 만나 사천성으로 떠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사천성에서 원래 목적인 당가타의 지원은 불발로 끝났지만, 당가타의 직계인 당가와 대략적인 협상을 하고 그들이 상산현으로 오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당가 사람들을 이곳까지 불러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냐?”
“네가 지원을 약속한 금액도 적은 돈은 아니다. 금자 일백 냥이면 금원보 열 개에 해당하는 금액인데…….”
적호경과 진덕양은 당가를 상산현으로 불러오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방계에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하지만, 무려 이백 년이 지나도록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지원을 받아 오던 당가타다. 그런 당가의 직계가 상산현으로 온다고 해서 빠르게 스스로를 정비하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또한 당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강호의 무인이지 상방이 아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지원을 해 줄 이유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풍백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만, 당가는 반드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무가를 다시 세우는 일이 단순히 금전적인 지원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가를 도와줄 사람도 찾아 놨습니다.”
“응? 도와줄 사람?”
느닷없이 나온 도와줄 사람이라는 말에 두 사람이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풍백을 바라봤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무려 이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스스로 일어서질 못한 당가를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준다는 말인가?
“도지휘사님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누군데 그러느냐?”
“그건 말씀드리기가 조금……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서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거짓말은 얼굴색 하나도 변하지 않고 웃으며 할 수 있는 풍백이었다.
“아마도 이 사람이 도와주기 시작하면 당가는 빠르게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 적가상방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벌어질지 모르는 불상사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고요.”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풍백이 말한 불상사가 백건상방을 의미한다는 걸 두 사람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적호경과 진덕양 역시 백건상방의 멸문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언제 적가상방이 저런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서문세가를 비롯하여 백련문과도 아주 긴밀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당가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되고, 적가상방 인근에서 적극적으로 보호를 해 줄 수 있다면 대단히 안정적인 상황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아무리 백아가 능력이 있다지만 이건 좀…….’
그러나 두 사람은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능력을 한껏 뽐내고 있는 풍백이다. 그리고 한 달에 지원하기로 한 금자 일백 냥 정도는 적가상방 입장에서 크게 부담되는 금액도 아니었고 말이다.
정말 풍백의 말처럼 될지 모르지만, 한번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다. 네가 그렇게 자신한다니, 한번 두고 보도록 하자꾸나.”
“그럽시다. 백아가 가능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쉽게 승낙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풍백은 기쁜 미소를 보였다.
누군가는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풍백은 이렇게 적호경과 진덕양이 자신에 대한 신뢰를 보일 때마다 항상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이전 삶에서 한 번도 이런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세 달 동안 별일을 다 겪고 돌아왔구나. 고생이 많았겠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됐었던 것 같습니다.”
풍백의 말에 적호경은 흐뭇한 웃음을 보였다.
아버지의 흐뭇한 웃음에 풍백 역시 기분이 좋아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