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79화
커다란 배 하나가 장강을 유유히 가르고 있었다.
마치 대낮처럼 밝게 불을 밝히고 있는 배에서는 음악 소리와 함께 여인들이 웃는 소리, 사내가 호탕하게 외치는 소리가 함께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배 위에서 여자와 남자들이 이렇게 요란하게 놀고 있는 것과 달리, 배의 선미에서는 몇몇 무혈채의 수적들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적 중 하나가 말했다.
“너는 누가 마음에 드냐?”
“조용히 해. 그러다가 채주님이나 부채주님 귀에 들어가면 다 뒈지는 거야.”
“들리겠냐? 저렇게 죽어라 소리 지르고 있는데?”
“조심하라는 말이지.”
“그딴 걱정은 집어치우고 누가 마음에 드냐고.”
다른 수적이 눈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마음에 들기는 뭐가 마음에 들어?”
“기녀들 말이야, 기녀들.”
“우리를 위해서 데리고 온 기녀들이 아니다. 관심 꺼라.”
“예기(藝妓)를 빼고도 여덟 명이나 되는데? 아무리 채주님이랑 부채주님이라고 하더라도 두 명 정도나 데리고 가겠지. 그러면 남은 기녀들은 우리가 데리고 놀아도 되잖아.”
동료의 말에 수적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호위대에 처음 들어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채주님이나 부채주님이 겨우 두 명으로 만족하실 것 같냐?”
“……그러면 다 데리고 들어간다고?”
“그것도 부족해서 아마 예기한테도 손을 대려고 하실걸? 아까 보니까 채주님이 예기를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더라.”
“씨벌…… 함께 사는 세상에 이런 치사한 일이 있을 수 있나? 서로 좀 양보하는 미덕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미친놈. 수적이 무슨 개소리냐? 그리고 행여나 기회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기녀들에게 손대지 마라. 잘못하면 네 하물이 통째로 잘리는 수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수적이 콧방귀를 뀌었다.
“킁! 상황을 봐서 기회가 되면 슬쩍 손을 댈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굴어?”
“이전에도 너 같은 놈을 봐서 그래. 그래도 같은 호위대 소속이 됐는데, 동료의 하물을 자르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그 말은 진짜 잘린 놈이 있다는 말이야?”
“그럼 없었겠냐?”
퉁명스럽게 말하는 동료의 말에 수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름다운 기녀들의 모습에 정욕이 동하기는 하지만, 그 대가로 하물이 잘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끓어오르던 정욕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에이, 씨벌! 더럽게 치사하네.”
“그러다가 진짜 채주님하고 부채주님 귀에 들어간다. 잘못하면 혀가 뽑힐 수 있으니까 조심 좀 하라고.”
“알았다고. 보수가 좋아서 호위대에 들어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냥 수채에 있을 걸 그랬어.”
“오늘만 참아 봐. 아쉬우면 내일 너도 기루를 찾아가 보든지. 나는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러든지 말든지.”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온 수적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수적이 주변을 둘러보려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몇 걸음 걸었을 때였다.
퐁당!
아주 작은 소리.
아마도 밤이 아니었다면 들리지도 않았을 소리였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야, 무슨 소리 못 들었냐?”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응? 어디로 갔지?’
수적이 다시 뒤로 걸어가며 나지막이 동료를 찾았다.
“어디 갔어? 아무리 엿 같아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지.”
그런데 주위를 둘러봐도 동료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대답도 없었고 말이다.
‘설마…… 강에 빠졌나?’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진짜 빠졌다고 하더라도 알아서 기어 올라왔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을 부르기 위해 소리를 쳤거나.
그래도 혹시 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강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이었다.
푹!
“끄륵…….”
난간에 고개를 내밀기가 무섭게 자신의 뒷덜미를 잡는 손과 목을 파고드는 단검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물에 빠지며 들린 것은 방금 전 그가 들었던 그 소리였다.
퐁당!
순식간에 두 명을 죽인 풍백이 그들의 시신을 줄에 묶어 배에 매달았다.
그리고 나서야 소리도 없이 배로 올라간 풍백이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선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선실에 있는 다른 호위를 찾아가는 것이다.
꿀꺽! 꿀꺽! 꿀꺽!
커다란 술 항아리를 들고 단번에 마시는 모습에 기녀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부채주님, 멋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꺄악! 진짜 다 마셨어!”
기녀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으며 부채주가 빈 항아리를 배 밖으로 집어 던졌다.
“어떠냐! 으하하하하!”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부채주에게 기녀들이 양팔에 달라붙거나 입에 안줏거리를 넣어 주고 있었다.
낄낄거리며 웃고 있던 무혈채주 마행달은 문득 눈동자만 돌려서 한편에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풍성한 궁장을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차분한 모습으로 금(琴)을 타고 있었다.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금 위를 수놓는 순간, 아름다운 운율이 배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금을 타며 울리는 아름다운 운율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채주는 자신의 호기로움을 자랑하기 위해서인지 술을 잔뜩 마시며 주량을 뽐내고 있었고, 기녀들은 그런 부채주에게 환호를 보내기 바빠서 금의 운율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비록 무혈채주 마행달이 그녀가 금을 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 마행달은 이런 쪽에 아무런 소양도 없었다. 그저 들어 보니 듣기는 좋다 수준이었다.
마행달은 평소에 예기를 부르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옆에서 방향을 풍기며 안기는 기녀만을 불렀다.
기루에서 술을 마시면서 간혹 예기를 불러 금을 타거나 춤을 추도록 만들기는 했지만, 이렇게 배를 띄우면서 예기를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에 탄 예기를 본 마행달은 좀처럼 예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기루에서 봤었던 예기는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외모가 그리 눈을 끌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 배에 탄 예기는 오히려 옆에서 지분거리는 기녀들보다 훨씬 아름답지 않은가.
‘오늘 저년은 꼭 내 걸로 만들고 말겠다.’
음심이 가득한 탐욕의 시선이 예기를 향하고 있었다.
예기 역시 마행달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왜 하필 나한테 배를 타라고 하셔서…….’
원래 예기는 외부로 나가는 일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청루에서 한정된 점잖은 손님만 상대하며 시(詩), 서(書), 화(畵), 금을 보여 줬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거의 강압적으로 배를 타라고 보내졌다.
예기는 몰랐다.
사실 그녀의 미모에 대한 명성이 점점 무혈현에서 입소문이 나고 있었고, 이 소문을 들은 부채주가 마행달에게 바치기 위해 기루주를 협박해서 그녀를 배로 보냈다는 것을 말이다.
예기가 탄주(彈奏)를 마치자 전혀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시작은 부채주였다.
부채주가 은근한 얼굴로 마행달을 바라봤다.
“어떻습니까? 금을 아주 잘 타지 않습니까?”
“그렇구만. 내가 별로 금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렇게 놀지도 못하고 금을 탄주하는 걸 듣고만 있었어.”
솔직히 예기의 미모를 탐하고만 있었으면서도 어울리지 않게 점잖게 말하는 마행달이었다.
“저도 저 아이가 금을 타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로 채주님께 보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었지요.”
의미심장한 부채주의 말에 마행달은 흡족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채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리로 와 보거라.”
부채주가 예기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예기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금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예기가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부채주가 말했다.
“뭐하고 있느냐? 어서 채주님 옆에 앉지 않고.”
“저, 저기 저는 손님을 받지 않는 예기이옵니다. 그래서…….”
“뭔 혓바닥이 이렇게 길어? 그래서 앉지 않겠다고?”
“죄, 죄송하지만 저는…….”
“확! 혓바닥을 뽑아 버리기 전에 앉아!”
부채주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예기가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에 마행달이 여전히 흐뭇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 소리를 칠 이유가 있는가.”
“어이쿠! 죄송합니다. 저년이 주제도 모르고 가만히 있기에…….”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그러면서 마행달이 은근히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알아본 부채주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럼 소피를 좀 보고 와야겠군요. 이것들아, 너희는 모두 나를 따라와라.”
“어머! 저희 전부요?”
“침상에서는 천하제일고수라고 하시더니, 그 엄청난 무공을 보여 주시는 건가요?”
기녀 하나가 하는 말에 다른 기녀들이 까르륵 웃으며 박수를 쳤다.
“흐흐흐……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단다. 천하를 진동시키는 명검을 보여 주마.”
그러고는 부채주가 무려 여덟 명이나 되는 기녀들을 데리고 선실로 들어갔다.
예기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조금씩 더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은 배 위였다. 그녀가 강으로 뛰어들지 않는 이상, 도망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행달이 예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리 오거라.”
“채, 채주님, 저는…….”
“알았으니까 이리 가까이 오래도.”
예기는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그러자 마행달이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며 다시 말했다.
“거기 서서 뭐하나? 어서 앉지 않고.”
“그…… 럴 수 없어요.”
“네가 금을 타는 솜씨가 아주 대단하더구나.”
뜬금없는 말에 예기가 마행달을 바라봤다. 마행달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런데 손가락을 다치면 다시는 금을 탈 수 없겠지?”
“……네?”
“내가 셋을 셀 때까지 자리에 앉지 않으면, 네 손가락 하나를 잘라 주겠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처럼 웃으며 말하는 마행달의 모습에 예기는 소름이 돋았다. 말로만 듣던 수적의 잔혹함을 직접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 숫자를 세겠다. 하나.”
“이, 이러지 마세요! 저를 배에서 내려 주세요!”
“둘.”
“제가 잘못했어요! 배에서만 내려 주시면…….”
“나는 내가 한 말을 꼭 지키는 사람이다. 이제 숫자를 세면 네가 자리에 앉더라도 손가락 하나를 잘라야 한다.”
태연히 말하는 마행달의 모습에 예기는 결심한 것처럼 품에서 일반적인 단도보다 조금 작은, 여인의 손바닥만 한 단도를 뽑았다.
“다, 다가오시면…… 저는 이걸로 죽을 거예요!”
진짜라는 것처럼 자신의 심장으로 단도를 가져가는 예기의 모습에 마행달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예기와 즐기고 싶은 거지, 예기를 죽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귀찮게 하는군.’
마행달은 호위대를 부르기 위해 소리쳤다. 호위대를 이용하여 적당히 예기의 시선을 흔들고, 손에 든 단도를 빼앗을 생각이었다.
“거기 누구 있으면 이리 와 보거라.”
하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행달이 조금 더 크게 소리쳤다.
“아무도 듣지 못했나? 누구 좀 나와 보라고!”
그러나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거나 튀어나오질 않았다.
‘이 새끼들이 선실에서 술 퍼마시는 중인 거 아니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마행달이 자리에서 일어서 선실로 향했다.
지금 이 배는 복도식으로 생긴 통로가 선미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복도 좌우로 네 개의 선실이 배치되어 있었다.
가장 가까운 선실을 열며 마행달이 물었다.
“왜 아무도 대답이 없…… 으헉!”
그러나 마행달은 하려던 말을 모두 끝마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 기절하여 쓰러져 있는 기녀 여덟 명과 혀를 길게 빼물고 천장에 매달려 죽어 있는 부채주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무려 절정고수인 부채주였다.
그런데 절정고수가 이렇게 죽어서 매달리는 동안,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 대단한 공포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술기운이 확 날아간 마행달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다들 뭐하는 거냐! 아무도 없는 거냐! 여, 여기 부채주가…….”
누구도 마행달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어나 서둘러 다른 선실을 열어 봤다.
그곳에는 호위대 두 명이 천장에 매달려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만이 아니었다. 선실을 열어 볼 때마다 두 명씩 죽어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호위대가 나타났다.
‘씨…… 씨발, 엄청난 놈이 여기에 있다!’
마행달이 황급히 예기가 있는 곳으로 뛰쳐나왔다.
그런데 분명 선실로 들어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서 있었던 예기가 기절해서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을 뽑은 마행달이 버럭 고함을 쳤다.
“어떤 놈이냐! 나와!”
하지만 누구도 그의 고함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죽인다! 어떤 놈이든 꼭 죽인다!’
내공을 잔뜩 담은 검을 부여잡고 마행달이 살기를 키워 나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자신이 먼저 무너질 것 같았다.
콰직!
그런데 이런 마행달이 밟고 있던 갑판에 두 개의 구멍이 생기며 손이 불쑥 튀어나와 그의 두 발목을 덥석 잡았다.
“으악! 이, 이 새끼! 죽어라!”
설마 발밑에서 뭔가 튀어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마행달이 갑판을 향해 검을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검이 갑판에 닿기도 전에 그의 발목을 잡은 두 손이 그를 끌어 내렸다.
콰지직!
갑판이 부서지며 두 팔을 제외하고 가슴까지 아래로 빨려 내려갔다. 그리고 뜨끔한 느낌과 함께 점혈을 당했다.
이것이 끝이었다.
잠시 후, 풍백이 갑판 위로 걸어 나오더니, 마행달의 앞에 서서 말했다.
“네가 무혈채주 마행달이냐?”
아혈을 점혈당한 마행달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마행달을 보며 풍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한테 대답해 줘야 할 일이 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하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 지르게 될 테니까.”
점혈을 당한 마행달이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극한의 공포가 사로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