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80화
“상산현이 보입니다!”
마부석에서 들려오는 고우길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적가상방을 떠난 지 석 달이 다 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우길뿐만이 아니라 풍백마저도 멀리 보이는 상산현의 모습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적가상방을 떠났던 적은 처음이군.’
생각을 해 보니 뭔가 먹먹해졌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풍백은 자신이 다시 절강성을 밟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계약된 기간이 끝나고 보상을 받으면, 반드시 절강성 상산현으로 돌아와서 적가상방을 다시 만들려고 했었다.
하지만 무려 십 년이 넘도록 절강성을 밟지도 못할지 몰랐었고, 결국 마지막까지 임무만 수행하다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게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버지와 숙부님은 잘 지내고 있겠지?’
초절정고수인 백련문주 주천구가 있으니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풍백은 문득 무혈채주 마행달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 나도 누가 의뢰한 것인지 찾아내지 못했었소.
- 의뢰가 실패하면서 의뢰주를 찾아내려고 했었지만, 내가 알아낸 것은 그저 절강성에 있는 누군가가 의뢰를 했다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소.
풍백이 마행달에게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딱 이 정도뿐이었다. 그리고 마행달은 원하는 정보를 건네준 대가로 그나마 고통스럽지 않게 숨을 멈출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절강성에서 누가 풍백을 노릴까?
몇몇 사람이 떠오르기는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억지로 끼워 맞추는 수준에 불과했다. 충분한 자금과 힘을 가지고 있으며 적당한 이유도 가지고 있는 곳은 오직 한 곳, 영파상방뿐이었다.
풍백은 과거에 새외에서 온갖 임무를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중에 가장 유용하고 높은 확률로 들어맞는 것이 있었다.
- 어떤 사건에서든지 이득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대부분 범인은 그 사람인 경우가 많다.
우발적인 살인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이익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건 실제로 조사를 해 본 결과이기에 확실했다.
그러나 영파상방은 자신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딱히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었다.
풍백이 죽는다고 적가상방이 취급하고 있던 호초나 소금이 영파상방에게 넘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새외에서 배운 것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 범인을 찾기 위해서는 간단하게 생각해라. 그렇게 해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대부분 그 사람이 범인이다.
실제로 그랬다.
사람들은 간혹 머릿속으로 온갖 계책을 떠올리며 완벽한 계획을 짜 보고는 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는 얘기를 들으면 멍청한 짓을 했다고 조롱한다.
그러나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이런 계획을 짜는 경우가 별로 없다. 대부분 우발적으로, 또는 즉흥적으로, 그것도 아니면 조잡한 계책 정도만 짜고 범죄를 저지른다.
그렇기 때문인지 복잡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사건의 실체와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일도 그랬다.
당장 절강성에서 적가상방을 노릴 곳을 골라 보라면 몇몇 곳이 떠오르기는 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금호상방의 조태명 역시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였다.
아무리 그들이 조유하와 정략혼을 제의하기도 했었고 언제부턴가 적가상방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적가상방에 악재가 생기거나 무너지게 된다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곳은 금호상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전에도 풍백을 노렸던 일들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감안하면 영파상방이 무혈채에 의뢰를 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임은 틀림없었다.
‘앞으로 영파상방의 움직임을 잘 살펴야겠어.’
이전에도 충분히 그들을 주의하고 있었기는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생각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 풍백이 탄 마차는 빠르게 상산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주약란은 거처 앞 공터에서 기마 자세를 취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호흡은 매우 느리고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쌍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그녀의 수장과 함께 자연스레 보법을 밟아 갔다.
아무런 힘도 담겨 있지 않고, 마치 춤처럼 느껴지는 주약란의 모습을 주천구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역시 내 딸이야! 이 애비를 닮아서 무공에 대한 습득력이 아주 남다르군.’
지금 주약란이 펼치는 수법은 주천구가 배운 비전 무공의 기초였다.
지금은 주천구의 명령에 의해 최대한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무공을 펼치고 있지만, 후에는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점차 속도를 높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초식을 펼치는 속도가 충분히 빨라지게 된다면, 이제 기초를 끝마치고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도 이류무인 수준은 충분히 되겠지만.’
목표는 평범한 무인이 아니었다.
주천구는 주약란이 백련문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아주 훌륭한 여류 고수로 만들 생각이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처럼 자신보다 더욱 강한 무공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려면 일단 백련문으로 돌아가서 벌모세수(伐毛洗髓)부터 시켜야 할 텐데…….’
주약란은 어렸을 적부터 무공을 배운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의 혈도에는 많은 노폐물이 쌓여 있어서, 그녀가 상승의 무공을 익히는 데 방해가 되고 있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영약과 내공 고수들을 동반하여 벌모세수를 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천문학적인 돈과 고수들이 필요하지만, 백련문에는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 힘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여기를 떠나기 싫어한다는 말이야…….’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는 주천구의 눈에 주약란이 마지막 초식을 펼치는 모습이 들어왔다.
두 개의 원을 그리던 수장이 가슴 앞에서 모아지는 순간, 그녀의 몸을 기준으로 가벼운 바람이 살랑이듯 뿌려졌다.
주천구가 같은 동작을 수행했다면, 이곳에는 광풍이 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주약란이 눈을 뜨자 파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훌륭했다.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이 아주 대단하구나.”
흐뭇한 웃음을 보이는 주천구의 모습에 주약란이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마도 백련문에서 주천구가 이렇게 칭찬하는 모습을 봤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평소에 누구를 칭찬하기보다는 윽박지르거나 부족한 부분을 냉철한 모습으로 지적하던 주천구였으니까.
그러나 주약란에 한해서는 주천구의 칭찬이 폭풍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거처의 문이 열리며 수월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하악! 하악! 소, 소란아! 큰일 났어! 큰일!”
요란하게 들어오며 소리치던 수월이는 어느새 헤벌쭉한 표정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온 주천구를 보며 얼른 허리를 숙였다.
“어? 문주님도 계셨네요.”
주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월이가 주약란의 하나뿐인 너무나 소중한 친구라는 걸 알고 있기에 주천구는 수월이를 제법 편히 대해 주고 있었다.
주약란은 수월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난리야?”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나가 봐야 해!”
“왜? 무슨 일인데?”
“지금 도련님이 상산현에 돌아오셨대! 이제 곧 우리 상방에 도착한다고 했어! 어쩌면 벌써 도착했을지도…… 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약란이 바람같이 달려 나갔다. 무공을 익히면서 당연히 경공도 익혔기에 주약란의 움직임은 매우 기민하고 민첩했다.
수월이가 순식간에 멀어지는 주약란을 멍하니 보다가 얼른 그녀를 따라 달려갔다.
“나도 같이 가!”
폭풍처럼 두 소녀가 사라지자 주천구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놈에게 너무 마음을 주고 있는 것 같은데…….’
대충 이유는 알고 있다. 그리고 주약란이 풍백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며 주약란의 마음은 곧 바뀌게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의 석 달이 지났는데도 저렇게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소중한 딸이다.
그러니 겨우 상방의 후계자 따위에게 주약란을 넘겨줄 마음은 없었다.
* * *
풍백이 마차에서 내렸다.
적가상방은 그가 떠날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굳이 달라진 점을 찾자면, 이전보다 못 보던 일꾼들이 많아졌다는 것뿐이었다.
일을 하던 일꾼들은 풍백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다가와 인사를 했다.
“도련님, 돌아오셨군요!”
“건강하게 돌아오신 것 같아서 기쁩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너도나도 인사를 하는 일꾼들의 모습은 조금의 가식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미 풍백이 적가상방을 위해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 충분히 소문이 난 상황이었다. 당장 적가상방의 주력 상품이 된 소금과 호초만 하더라도 풍백이 모두 계약해서 가지고 오는 물건이지 않던가.
또한 얼마 전에는 풍백이 무한으로 가는 도중에 무혈채를 만났던 일이 소문나면서, 풍백이 인의공자라 불린다는 얘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이전에는 개망나니가 잠깐 약기운이 떨어져서 안 하던 짓을 하는 중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적가상방을 살린 것을 떠나 이런 소문까지 나는 것을 보면 단순히 묻혀 있던 능력이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아니라, 인성마저도 고쳐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덕분에 과거에는 어디 내놔도 창피한 개망나니였을 뿐이지만, 이제는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은 소상방주님이 된 풍백이었다.
그러니 일꾼들이 풍백이 돌아온 것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몰려들어 인사를 하는 일꾼들의 모습에 풍백도 조금 당황했다.
풍백이 개망나니 시절 벌인 다양한 패악질로 인하여 손가락질을 받거나, 이렇게 몰려와서 욕을 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환영하고 반겨 주는 일은 처음이었다.
어색한 모습으로 손을 들어 보이는 풍백의 모습에 일꾼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확실히 사람이 변했어.’
‘이전이었다면 다 꺼지라고 주먹질을 했을 텐데.’
‘봐 봐! 이제는 낯부끄러운 것도 알게 됐는지 창피해하고 있잖아.’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온갖 패악질을 벌이던 사람이 완전히 변했어!’
이렇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풍백을 향해, 일꾼들을 밀어내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적 공자님!”
주약란이었다.
풍백은 일꾼들을 밀어내고 나타난 주약란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떠나기 전보다 뭔가 활기차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주약란을 향해 뭐라 말하려고 하는데, 수월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들 여기서 뭐하세요! 어서 일하셔야죠! 저기 행수님들이 오고 계신다고요!”
일꾼들에게 행수는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였다. 휴식 시간을 충분히 보상해 주는 적가상방에서 일하는 시간에 딴짓을 한다는 건 행수에게 질책을 받기에 충분했다.
일꾼들이 수월이의 말에 화들짝 놀라 빠르게 흩어졌다.
이렇게 일꾼들이 흩어지는 것도 바라보지 않고 있던 주약란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가만히 풍백을 바라보다가 점점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잘…… 돌아오셨어요.”
당장 흘러내릴 것처럼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을 보고 풍백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왜 울고 있어? 누가 괴롭힌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당연히 그럴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다음 날에는 없어졌을 것이다. 주천구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바라보고 있을 테니까.
바로 지금처럼.
풍백의 눈이 멀리서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주천구가 보였다.
주천구는 풍백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이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듯이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가 풍백을 가리켰다.
‘쓸데없는 경고를 하네.’
주천구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풍백은 그의 걱정과 달리 딱히 주약란에게 특별한 마음을 먹었던 적도 없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아무 일도 없었어요.”
“네 덕분이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 적가상방을 비울 수 있었던 것이고.”
“아, 아니에요.”
“고맙다.”
말을 마친 풍백이 손을 들어 올려 주약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자 주약란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이때 멀리 왕삼이 나타나더니 풍백을 보고 환히 웃는 얼굴로 두 팔을 벌리며 달려왔다.
“도련님! 보고 싶었…… 꾸엑!”
풍백이 달려오던 왕삼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징그러우니까 좀 꺼져 줄래?”
“아니,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그런 것 아닙니까.”
왕삼이 투덜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풍백은 그런 왕삼의 엉덩이를 한 번 걷어차 줬다. 그러자 왕삼은 죽겠다고 꽥꽥 소리를 지르며 풍백에게서 떨어졌다.
이러는 사이 소식이 전해졌는지 적호경과 진덕양이 풍백이 있는 정문까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풍백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