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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78화 (218/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78화

떨리는 손으로 현진기공을 받아 든 고우길이 감격에 겨운 눈으로 서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드디어…….’

적가상방에 몸을 담으며 강호에서 무시받는 상방의 호위무사로 자신의 삶이 끝날 줄 알았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있었다.

이미 사상신공을 익히고 있었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통 낭인무사들이 익히는 내공심법은 아주 뛰어나지 않지만, 그 대신 범용성이 대단히 넓었다.

그래서 몇몇 대문파에서는 자파의 제자들이 처음 단전을 만들 때, 뛰어난 상승 내공심법을 배우기 전에 기초적인 내공심법으로 단전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재심법(三才心法)이었다.

사상신공도 마찬가지였다.

사상신공이 기초적인 심법과 비교하면 훨씬 뛰어나지만, 그 범용성은 중간에 다른 내공심법으로 갈아타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영향을 받을지 몰라도, 결국 지금까지 쌓아 온 내공은 곧 새로 배우는 현진기공으로 녹아들게 될 것이다.

감격한 눈으로 현진기공을 바라보는 고우길을 가만히 지켜보던 풍백이 입을 열었다.

“우선 고 무사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류 수준으로 빨리 올라서는 것입니다.”

“각골명심(刻骨銘心)하겠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다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내공만 더 빨리 늘리게 된다면 무난히 일류 수준에 오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것도 받으세요.”

풍백은 품에서 주천금단 하나를 꺼내 고우길에게 내밀었다.

주천금단을 받아든 고우길은 청량한 향기를 맡자마자 이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아봤다.

‘헉! 서, 설마 영단?’

강호의 대문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에게만 허락한다는 영단이었다.

물론 영단에도 격이 있었다.

내공을 수십 년씩 올려 주는 대환단과 같은 전설적인 영단이 있기도 하지만, 내공을 올려 주지는 못하고 보조해 주는 역할만 하는 영단도 있었다.

하지만 고우길은 그런 허접한 영단도 한 번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소원 중 하나가 영단을 먹어 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영단이 자신의 손에 있었다.

“이, 이건…….”

“고 무사님이 영약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흡수하실 수 있는지에 달려 있겠지만, 운이 좋으면 삼십 년에 달하는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풍백의 말에 고우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단지 내공을 익히는 데 보조를 해 주는 영단이기만 하더라도 감복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무려 삼십 년이라고 했다.

평생 내공을 수련을 했음에도 이제 겨우 십여 년 수준의 내공만 가지고 있는 고우길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일류고수가 되려면 적어도 이십 년의 내공이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영단 하나에 삼십 년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몽롱한 눈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주천금단을 바라보던 고우길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대체…… 도련님은 어떻게…….’

자신에게 뛰어난 절공을 가르쳐 주고, 이제는 어지간한 대문파에서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영단을 내주고 있다.

이런 수준의 영단은 그냥 대문파도 아니고,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수준이 아니라면 만들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영단이지 않은가.

고우길은 아주 잠시 떠올랐던 의문은 싹 지워 버렸다. 이런 것에 의문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이제 확실해졌다.

‘강호행? 다 집어치워! 강호행은 무슨 강호행이야! 여기가 바로 뼈를 묻을 곳이다!’

강호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주천금단으로 인하여 아침 햇살의 안개처럼 사그라졌다.

아무리 강호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이 몸담을 곳을 찾아야 했다. 영원히 강호를 떠돌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고우길은 지금 자신이 몸담을 곳을 찾았다.

강호의 그 어떤 곳에서 자신에게 이런 영단을 주겠는가?

시시각각 변해 가는 고우길의 표정을 보면서 풍백은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떠나질 못하겠군.’

그런 말이 있다.

-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 만약 돈으로 사지 못했다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는지 의심해 봐라.

지금 풍백은 돈으로 고우길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며 고우길의 마음을 사 버렸다.

물론 과한 비용이 지출된 것도 맞다.

하지만 적어도 고우길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이면서 제법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했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뛰어난 고수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 풍백이 여러 가지 일을 해 나가려면, 적어도 자신을 대신해서 입안의 혀처럼 움직여 줄 사람이 필요했다.

풍백은 그런 사람으로 고우길을 낙점한 것이다.

‘믿는 걸로만 얘기한다면 왕삼도 나쁘지 않다만…….’

대신 왕삼은 무공을 몰랐다. 그리고 천성이 경박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무언가 깔끔하게 하지를 못했다. 아마 입이 가볍기까지 했다면…… 아무리 믿는다고 하더라도 곁에 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은 착하잖아.’

워낙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개망나니 시절까지 보필했던 왕삼이기에 애써 변명하듯이 생각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고우길이 마침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전의 충성 맹세와 조금 의미가 다를 것이다.

이전에는 십 년 동안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평생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미일 것이고 말이다.

풍백은 당장 울 것처럼 눈시울까지 붉히고 있는 고우길에게 말했다.

“기대하겠습니다.”

“네!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이번 일부터 얘기를 해 보도록 하지요.”

고우길이 조심스럽게 현진기공과 주천금단을 챙기고 집중했다.

“저는 오늘 밤부터 사흘 정도 자리를 비울 겁니다. 고 무사님은 그동안 마부가 의심을 갖지 않도록 만들어 주세요. 식사도 매일 끼니마다 가져와서 적당히 처리해야 할 것이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제가 별채에 있다고 믿을 정도로 처리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믿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풍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무사님이 알아야 할 일들은 제가 알아서 얘기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얘기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헙!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세요.”

고우길이 공손한 움직임으로 별채를 나섰다.

이제 적당히 정리가 끝났다고 생각한 풍백은 숨겨서 가지고 다니던 물건들을 꺼내 들었다.

야행의와 면구, 그리고 밤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거나 암살을 하기 위해 암시장에서 구입했었던 물건들이었다.

‘적가상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무혈채 놈들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 있지.’

굳이 고우길에게 이것에 대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고우길이 알아 봤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곳 성자현에서 무혈채가 있는 곳까지 서두르면 왕복 나흘이 조금 넘게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풍백은 사흘 만에 왕복할 예정이었다. 고우길은 그 시간 동안 마부의 주위만 돌리면 된다.

풍백이 천천히 야행의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 * *

무혈채는 호북성과 호남성 경계에 절묘하게 위치하고 있는 무혈현(武穴縣)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혈현에서 이름을 따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원래 인근에서 작게 수적질을 하다가 규모가 커지며 장강수로십팔채에 속하게 된 경우였다.

사실 강서성에서 호북성으로 가려면 무조건 지나쳐야 하는 곳이 무혈채였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 부러워할 요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무혈채는 아직까지 하팔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들이 얼마나 무능한지 증명을 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비슷한 이점을 갖고 있는 다른 산채가 적어도 중오채(中五寨)에 들어가거나 대부분 상오채(上五寨)에 들어가는 걸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나한테는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풍백은 노를 저으며 생각했다.

그가 노를 저을 때마다 풍백이 탄 작은 배는 마치 빙판 위에서 밀려가는 얼음덩이처럼 죽죽 나가는 중이었다. 이런 것은 평생을 뱃사공으로 보낸 사람도 감히 따라 하지 못할 신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대략 반 시진 정도 지나자 무혈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겉으로 봐서는 장강에 붙어 있는 여느 작은 마을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돌아다니는 사내들은 모두 험상궂은 얼굴에 병장기 하나씩 패용하고 있어서 평범한 마을과 거리가 멀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늦은 밤인데도 소란스럽게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어제나 오늘 제대로 한탕 뽑아 먹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풍백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소란스러운 만큼 무혈채에 은밀히 잠입하기 쉬운 일이니까.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에 배를 멈춘 풍백은 강변을 따라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수풀에 몸을 숨겨 접근하기 시작했다.

“마셔! 마셔!”

“마시고 죽자!”

“죽기는 왜 죽어? 죽여야지!”

“오늘 두 다리로 서서 움직이는 놈들을 내일 다 죽을 줄 알아!”

망루(望樓)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모호광은 멀리서 들려오는 술 취한 동료들의 목소리에 조그맣게 욕을 내뱉었다.

“에이, 씨발.”

그 말을 들었는지, 같이 보초를 서고 있던 이선부가 낄낄거렸다.

“왜 욕을 하고 그래? 기분이 별로 안 좋나 봐?”

“씨발, 그러면 좋겠냐? 오늘은 원래 내 근무도 아니었다고. 나도 저기서 술이나 마시고 있어야 됐는데…….”

“그러게 누가 근무를 바꿔 주라고 했어?”

“내가 바꾸고 싶어서 바꿨냐?”

원래 모호광은 오늘 근무가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수적이기는 하더라도 그보다 연차가 더 높은 수적이 강제로 근무를 바꾸자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무혈채가 장강수로십팔채에 속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혈채에 속한 모든 수적들이 강력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모호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간신히 삼류무사로 불릴 수준인 모호광은 원래 낭인무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박한 대접과 적은 수입에 불만을 가지고 무혈채로 투신한 인물이었다.

마침 무혈채는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로 많은 무사들을 잃고 급하게 수적을 모집하는 중이었다. 아마 그것이 아니었다면 모호광은 무혈채에 뽑히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무혈채의 수적이 된 이후, 그의 수입은 확실히 낭인무사 때보다 더 나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받는 대접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박해졌다. 겨우 삼류무사에 해당하는 무공을 가지고 있으니, 같은 서열이라고 하더라도 무공이 더 강력한 동료들이 그를 조롱하거나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근무를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자기도 겨우 이류무인인 주제에 더럽게 지랄이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채는 외부에서보다 무력에 의한 연공서열이 더욱 강하고 폭력적인 곳이다. 이곳에서 자신보다 윗선의 고수에게 잘못 찍히면 좋게 끝나야 얻어맞는 것이고, 나쁘게 끝나면 목숨을 잃는다.

살아남고 싶으면 불만이 있어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더러워서 그만두고 도망치던가 해야지 원…….’

이런 생각을 하던 모호광이 이선부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오늘 근무를 서는 건데? 너도 오늘 근무 아니지 않나?”

이선부는 무혈채에 몇 없는 삼류무사 중 하나였다. 그래서 자신처럼 등 떠밀려 근무를 서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를 바라며 물었다.

그러나 이선부는 대답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너도 오늘 근무가 맞았냐고 묻잖…… 아?”

고개를 돌린 모호광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에는 의문형으로 끝났다.

모호광의 눈에 이선부가 아무런 소리도 못 내고 두 손으로 목을 긁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의 등 뒤에는 야행의를 입은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로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자신이 보는 것이 진짜인가 싶은 얼굴로 눈을 끔뻑이던 모호광이 이내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저, 적이다!’

모호광이 고함을 치기 위해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 순간, 그의 목에 검게 옻칠을 한 단검이 닿았다.

이선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축 늘어졌고, 어느새 다가온 사내가 자신의 목에 단검을 대고 있는 것이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고함이 다시 목구멍을 통해 배 속으로 삼켜졌다.

사내, 풍백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혈채주 거처는 어디에 있나?”

모호광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지, 거짓말을 할 것인지 아니면 기회를 봐서 고함을 지를 것인지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호광의 실수였다.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귀가 떨어져 나가며 끔찍한 고통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끄…….”

“비명을 지으면 목을 자른다.”

어느새 귀를 자르고 돌아온 단검이 턱 끝에 검첨을 대고 있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모호광이 이를 악물었다. 조금이라도 입을 벌리면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니까.

“다시 묻는다. 무혈채주 거처가 어디라고?”

다른 생각은 이제 떠오르지도 않았다.

“저…… 저기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이 층짜리 전각이 있습니다. 거기가 채주님의 거처입니다.”

풍백이 고개를 돌려보자 가장 안쪽에 다른 곳보다 높은 전각 하나가 보였다.

모호광은 혈도가 짚여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런 모호광의 귀에 싸늘한 풍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 봐서 무혈채주 거처가 아니면 돌아와서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모두 잘라 주지.”

“자, 잠깐만…….”

“거짓말이었나?”

“그, 그게 아닙니다. 혹시 채주님을 찾아오신 거라면…… 거처에 계시지 않다고 얘기를 하려고…….”

“그러면 어디에 있는데?”

“부채주님과 함께 기녀들을 데리고 배를 띄우셨습니다.”

풍백의 눈이 살짝 호선(弧線)을 그렸다.

좋은 소식이었다. 배 위에서는 이곳 무혈채에 있는 수적들을 부르지 못할 테니까.

“어디로 갔는데?”

“호북성 방면으로 올라갔습니다.”

“언제?”

“한 시진 정도 지났습니다.”

뱃놀이를 하기 위해 떠난 거라면 그리 빨리 움직이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빨리 쫓아가면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아 찾아낼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풍백은 그대로 모호광의 숨통을 잘라 버렸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모호광은 풍백을 욕하지 않았다.

‘그 개새끼 때문에 죽는구나……. 죽어도 근무를 바꾸지 말았어야 했는데…….’

풍백은 모호광을 눕혀 놓고 무혈채를 빠져나갔다.

망루에 두 구의 시신이 생겨났다는 걸 모르는 무혈채는 여전히 잔치 분위기로 시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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