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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76화 (214/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76화

반점 입구로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구부정한 허리를 가진 노인이었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어오는 노인은 아주 평범했다. 어쩌면 길에서 지나다니다가 하루에 한두 번은 만났음직한 그런 노인이었다.

굳이 평범한 노인과 조금이라도 다른 점을 찾자면, 시골 촌부들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비싼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풍백은 그 노인을 보면서 무언가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그저 값비싼 옷을 입은 평범한 노인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채설지가 평범한 노인을 보고 놀랄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이 노인은 분명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었고, 그녀가 이렇게 놀랄 만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생각한 그 사람이 맞다면…… 이 노인이 평범하게만 보이는 이유는 그저 자신이 그를 알아볼 만한 안목이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노인은 반점을 둘러보더니, 채설지를 알아보고 지팡이를 짚으며 이 층으로 올라왔다.

풍백과 채설지의 식탁으로 다가온 노인이 채설지를 보며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있었구나. 많이 찾았다.”

그 말에 채설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듯한 태도였다.

풍백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같이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노인이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도 괜찮은가?”

“당연히 괜찮지요. 따로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면 주문을 하셔도 됩니다.”

“그냥 여기에 있는 것들 몇 개만 집어 먹으면 되니 굳이 주문할 필요는 없네.”

그러고는 슬쩍 손짓을 했다.

드르륵!

그러자 옆에 있는 식탁에서 의자가 저절로 나오더니, 노인이 앉을 수 있게 뒤에 자연스레 멈췄다.

신기에 달한 허공섭물(虛空攝物)의 기예였다.

능공섭물(綾空攝物), 격공섭물(隔空攝物)이라 부르기도 하는 허공섭물은 초절정고수 이상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초절정고수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하기는 힘들었다. 이건 초절정고수를 넘어, 절대의 경지에 들어야지만 가능할 것이다.

풍백은 노인이 펼치는 허공섭물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딱히 노인의 수법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노인은 풍백의 이런 모습에 눈에서 이채를 발했다.

“자네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절강성에 있는 적가상방의 적풍백이라고 합니다.”

“상방 사람이었군. 그런데 가진 무공이 제법이야.”

풍백은 이제 절정의 수준이 되었기에 초절정고수도 쉽게 자신이 무공을 익혔는지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대는 절대고수였다.

겨우 절정고수가 절대고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풍백은 자신의 무공을 알아봤다는 사실에 딱히 놀라지도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 겨우 이 년도 지나기 전에 절정고수의 수준이 되었다는 것은 그냥 운이 좋았다는 말로 치부하긴 힘들지.”

풍백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음식을 먹었다.

그의 모습만 봐서는 풍백이 놀랐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풍백은 지금 꽤나 크게 놀라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만 봐도 대충 짐작을 했다만…… 설마 나에 대해서도 조사를 한 건가?’

풍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다시 말하겠습니다. 무공은 어렸을 적부터 익혔습니다. 아주 열심히요.”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어렸을 적부터 상산현의 개망나니라 불렸더군. 매일 술을 마시고, 사람을 때리고, 여자를 희롱하고. 무공을 익힐 시간이 없었을 텐데?”

풍백의 뒷조사를 했다는 걸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 노인이었다.

“제가 엄청 잘 숨겼거든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도 제가 무공을 익혔다는 걸 모릅니다.”

“잘 숨겼다?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절정고수 수준이 될 수 있다고?”

“열심히 하면 가능하지요.”

노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를 희롱하려 드는 건가? 일정한 수준에 들어서기 전에 술을 자네처럼 퍼마시면, 내공이 탁해지고 성장 속도도 느려지지. 그렇지 않나?”

“제가 특별한 무공을 익혀서 괜찮았습니다.”

“그래? 그러면 한번 볼까?”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형의 압박이 풍백에게 가해졌다.

마치 태산이 온몸을 누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압착되어 죽을 것처럼 숨도 쉴 수 없었다.

특히 바로 턱 밑에 날카로운 검을 대고 있는 듯한 느낌은 곧 자신이 죽는다는 걸 강제로 머릿속에 쑤셔 넣고 있는 것 같았다.

‘크윽…….’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숨도 쉴 수 없는 상황에 입을 벌릴 수도, 소리를 낼 수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풍백이 저항하기 위해 보리항마선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려 온몸으로 저항을 하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망할……. 절대고수가 되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건가?’

이것은 분명히 살기와 기세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의형살인(意形殺人)의 수법이었다.

지금까지 풍백은 의형살인이라는 수법이 그저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헛소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직접 몸으로 겪어 보았으니까.

풍백의 저항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노인이 입꼬리를 더 끌어올리는 순간, 지금까지 쏟아지던 압력은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몇 배는 더한 압박이 풍백에게 가해졌다.

‘이런…… 제기랄…….’

단전에 있는 모든 내공을 동원하여 저항을 했지만, 이건 거의 태풍을 방패로 막는 격이었다.

드드드드드!

풍백이 앉아 있던 의자가 덜덜 떨려 왔다. 두 사람의 은밀한 싸움이 외부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노인이 풍백을 압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채설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만하세요, 할아버지.”

그 순간, 풍백을 압박하던 모든 의형살인의 기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억…… 허억…… 허억…….”

풍백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여전히 노인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이제 풍백이 아니라 채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설지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동자에는 온통 애정으로 가득했다.

“허허허…… 이게 얼마 만에 들어 보는 네 목소리인지 모르겠구나.”

이런 노인의 말에 채설지는 대답을 하는 대신 지긋이 노인을 바라봤다. 마치 왜 풍백에게 손을 썼는지 추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노인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허험! 나는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을 하는 노인을 채설지가 흘겨봤다. 말도 안 되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진짜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니까. 어려서부터 술을 죽어라 퍼마시다 보니 어린 나이에 지병이 생겨서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않느냐.”

뻔뻔하게 당사자를 앞두고도 태연히 말하는 노인이었다.

이미 이런 노인의 성품을 알고 있던 채설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풍백은 숨을 가다듬으며 채설지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전음으로만 달랑 두 마디밖에 듣지 못했었다.

노인의 압도적인 무공보다는 채설지가 평범하게 얘기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어차피 노인이 이렇게 압도적인 무공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던 바였으니까.

노인은 풍백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울리지 않는 무공을 익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어려서부터 술을 마시던 놈이 어울리지도 않게 불가(佛家)의 무공을 익혔으니 하는 말이지.”

이 말에는 풍백도 꽤 놀랐다. 설마 자신의 무공 연원을 이렇게 쉽게 알아챌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채설지가 노인에게 빤히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치였다.

“흐흐…… 천하에는 다양한 무공이 있지만, 커다란 줄기로 무공들을 나눌 수가 있단다. 예를 들면 불가와 도가(道家), 유가(儒家), 마도(魔道) 등으로 말이지. 그리고 요령이 생기면 그 연원을 대충 알아볼 수 있지.”

“…….”

“네가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렇다. 너도 나중에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채설지가 말을 하지 않는 상황에 익숙한 것처럼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얘기를 이어 가는 노인이었다.

말을 마친 노인이 풍백을 돌아보며 물었다.

“불가의 무공을 익히면서 술을 마신다고? 주화입마(走火入魔)를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고로 너는 어렸을 적부터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니야.”

“…….”

“주둥이에 기름이라도 친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걸 보아하니 소림사 놈은 아닌 것 같고, 어디 사람인가?”

“저는 어디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적가상방 사람일 뿐이지요.”

“상인이라서 거짓말을 숨 쉬듯이 하는가 보군.”

어차피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렇게 끝낼 거라면 왜 풍백을 압박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노인은 자룡탈포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내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내상을 입은 기색은 없구나.”

얼마 전 풍백과 금벽궁이 싸운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정도 정보는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었다.

풍백이 말했다.

“다행히…… 제게 좋은 약이 있어서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풍백은 굳이 영단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노인을 상대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고수인 노인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그래? 다행이군.”

노인은 풍백을 돌아보며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는 바라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이 아이가 여전히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면, 일단 너를 이 자리에서 찢어 죽이고 네 가문이라는 적가상방마저도 밟아 버리기 위해 내가 직접 달려갔을 테니까.”

딱히 이전처럼 의형살기를 뿜어 대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쏟아 낸 살기만으로도 풍백의 피부에 솜털이 바짝 일어서도록 만들었다.

탕!

채설지가 가볍게 식탁을 손바닥으로 쳤다. 그러자 노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네가 좋아서 한 일이겠지. 하지만 결국 그건 네 일이 아니었잖니. 모두 이 겁 없는 핏덩이가 주제도 모르고 자기 일에 너를 이용했을 뿐이니까.”

‘이야…… 너무 정곡인데?’

풍백은 노인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대부분 채설지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옆에 있으므로 자신의 무공을 손쉽게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물론 애초에 채설지가 먼저 따라오지 않았다면 그에 맞춰 무공을 숨길 방법을 강구했겠지만 말이다.

채설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가리켰다가 풍백을 가리켰다. 억지로 따라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지. 어쨌건 중요한 건 네가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이니 그냥 넘어가 줄 수 있단다. 금벽궁이라는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들은 그럴 수 없겠지만.”

노인의 말에 채설지가 눈을 찌푸렸다.

“그러지 말라는 말은 하지 말거라. 감히 상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손을 댄 놈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야.”

고경천이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던 일이지만, 방금 노인의 말 한마디에 금벽궁의 멸문이 확정되었다. 이제 고경천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노인이 풍백을 다시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너는 내가 누군지 묻지를 않는구나. 혹시 짐작을 한 건가?”

“혈수마괴 어르신 아니십니까?”

사파의 고수들은 대협이라 부르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기에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어르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가장 무난했다. 노인의 나이가 많으니 그리 어색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흐흐흐…… 눈치가 빠르구나.”

역시 풍백의 예상대로 노인은 혈수마괴였다.

사파십대고수 중 사괴의 일인인 혈수마괴.

절대고수로 분류되는 혈수마괴는 강호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고수였다. 지금까지 풍백은 초절정고수를 두 명이나 직접 만나 봤지만,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감히 혈수마괴와는 비견할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돌아가야지?”

채설지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불만이 생긴 표정이었다.

하지만 혈수마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네 말을 들어줄 수 없구나. 이미 약속했던 일이 아니더냐. 네가 창룡봉무지회를 구경하고 돌아오면 할 일도 있으니 말이다.”

짐짓 근엄하게 말하는 혈수마괴의 모습을 보고 채설지는 이내 미간을 폈다. 지금 보이는 혈수마괴의 태도는 절대로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가자꾸나.”

혈수마괴의 말에 아쉬움이 남는 듯이 채설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잠시 풍백을 바라보다가 전음을 보냈다.

[다음에 봐요.]

굳이 왜 전음을 보내는 건지는 몰라도 풍백은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반점 밖으로 나갔다.

혈수마괴가 반점을 나서기 전에 묘한 눈으로 풍백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굳이 어떤 말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쉰 풍백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큰 충격이었다.

절정고수에 오르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던 풍백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오늘 만난 혈수마괴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

움직이기는커녕 숨도 쉬지 못했다. 아마도 채설지가 말리지 않았다면 피를 토하며 중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아직 멀었어.’

만약 혈수마괴가 적가상방을 무너뜨리려고 한다면, 풍백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할 것이다. 방금처럼 의형살인의 기세만 뿜어도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이건 매우 실망스러운 상황이었다.

다시 무력하게 적가상방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끔찍한 기억은 한 번으로 족했다.

이번에 적가상방으로 돌아가면 다시 무공을 수련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았다.

‘절대고수를 상대할 수 있을 때까지.’

풍백은 목표를 찾은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어딘가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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