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74화
채설지가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남충현에 도착하고 객잔을 잡자마자 채설지는 자신의 방에서 운공요상(運功療傷)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맹교에게 당한 일격으로 내상을 입기는 했다. 그러나 피를 보였던 것과 달리 내상이 많이 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혼신의 내력을 끌어올려 싸움을 이어 나가면서 내상이 점차 심해지게 되었다. 그 탓에 피를 토하고 풍백에게 안겨서 이동해야 했고 말이다.
모든 병이나 상처가 다 그렇겠지만, 내상 역시 가만히 놔두면 더 악화가 되는 법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 무엇보다 내상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거의 두 시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운공요상에 집중하던 채설지가 내공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후우…….”
느리고 길게 탁한 숨을 내뱉은 채설지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운공요상을 통해 내상을 다스렸지만, 원래 내상은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상보다 더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 채설지가 입은 내상은 그저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크게 고생할 수도 있었다.
내일부터는 의원에서 처방해 준 내상약을 먹으면서 운공요상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마차도 오래 타고 있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내상의 치료를 하려면 영약이나 영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채설지에게는 영약이나 영단은 없었다.
‘방심했어.’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었다면 내상을 입는 일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항상 싸움에 임하면 방심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었는데, 몇 번 싸움을 해 보면서 점차 자만심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상대가 무려 절정고수였는데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었으니, 이런 내상을 입은 것도 당연했다. 아니, 그 대가로 이 정도 내상이면 대단히 운이 좋은 것이었다.
덕분에 하나를 배웠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절대로 방심하지 마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이전에 알던 것은 죽은 지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몸으로 배웠으니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산지식이 될 것이다.
그때 채설지가 문을 바라봤다. 누군가 그녀의 방으로 다가오고 있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똑똑!
“채 소저, 안에 있습니까?”
채설지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침상에서 일어난 채설지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풍백이 서 있었다.
“다행히 아직 주무시는 건 아니었군요.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채설지가 들어오라는 듯이 길을 비켜 줬다.
방으로 들어온 풍백은 의자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채설지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풍백의 물음에 채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겁니까?”
채설지는 대답을 하는 대신 찻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어차피 말할 수 있다는 걸 아는데, 그냥 말로 하면 안 되는 겁니까?”
풍백의 말에 채설지는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을 뿐이다.
‘하여간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라니까.’
하지만 이 여자가 자신에게 꽤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심한 내상을 입으면서까지 풍백을 위해 싸워 준 것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단지 그녀가 대체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이 무공을 드러내는 걸 막아 주는지 아직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말을 하지 않는 이유도 그렇고 말이다.
‘이유라도 알고 있다면 답답하지는 않겠는데…….’
가볍게 한숨을 내쉰 풍백이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무모하게 싸움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풍백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싸움은 간단했다.
나는 때리지만, 적은 나를 때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를 위해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과정을 논하다가 죽어 나간 동료들을 수도 없이 봤으니까.
그런 면에서 오늘 채설지가 피운 고집은 풍백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결국 그런 행동들이 나를 돕기 위해 움직인 것이기는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지.’
채설지는 풍백의 말을 듣는 건지 어떤 건지, 그저 조용히 창밖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차를 홀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풍백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빚을 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상이 심해서 마차를 타는 것도 힘든 상태고요. 그러니…….”
풍백이 말을 길게 늘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받으세요.”
채설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내밀자, 풍백이 그녀의 손에 작은 단환 하나를 올려 줬다.
사천당가의 유산 중 하나였던 주천금단이었다.
“영약입니다. 그걸 먹으면 내상도 바로 고칠 수 있을 것이고, 내공 진전도…… 어? 어? 어?”
주천금단에 대해 설명을 하던 풍백은 채설지가 주천금단을 냉큼 입에 넣는 걸 보고 당황하여 소리를 냈다.
풍백은 채설지가 이렇게 바로 주천금단을 먹어 버릴 줄은 몰랐다.
“아니, 그걸 바로 먹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준 것이 약이 아니라 독이면 어떻게 하려고요! 나는 지금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내일 의원에서라도 확인을 해 보고 먹으라는 말이었다고요!”
채설지는 그런 풍백의 말에 배시시 웃어 보였다. 마치 풍백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냥 풍백만의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침상에 오른 채설지가 곧바로 운공을 시작했으니까.
당연하지만 운공을 할 때는 외부 위협에 취약해진다.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내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채설지는 분명히 사파였다. 사람을 믿지 않기도 하고, 남을 속이기 바쁘다는 바로 그 사파 말이다.
그런데 누구도 쉽게 믿지 않아야 할 채설지가 자신을 앞에 두고 운공을 시작하다니, 풍백은 대체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망할…….’
못 봤다면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채설지를 보니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풍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호법을 서는 것처럼 침상 옆에 섰다.
운공을 하던 채설지는 그걸 알아챘는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곧 운공에 빠져들었다.
* * *
적가상방 방주 집무실.
적호경과 진덕양은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한 장의 서신이 놓여 있었다.
서신이 도착한 것은 며칠 전이었다. 하지만 워낙 내용을 믿을 수 없어서 사실 확인하는 과정에만 며칠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적호경과 진덕양은 말없이 서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다.
가만히 서신을 바라보고 있던 적호경이 입을 열었다.
“이게 진짜가 맞는 거냐?”
“맞겠지요. 그래서 진짜가 맞는지 확인까지 했던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면 진짜가 맞는 거지?”
“확실히 진짭니다.”
“그러면 이걸 왜 우리에게 보낸 건데?”
“그건…… 백아에게 물어봐야겠는데요.”
진덕양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적호경 역시 진덕양이 대답을 해 줄 거라 생각해서 물어봤던 것도 아니었다. 워낙 황당한 일이기에 넋두리하듯이 물어봤던 것일 뿐이다.
적호경과 진덕양의 넋을 빼앗은 서신은 다름 아닌 사마세가에서 발송한 서신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서신이 아니라 일방적인 협정서였다. 그것도 무려 오대세가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사마세가의 협정서 말이다.
온갖 항목이 달려 있어 제법 두툼한 협정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향후 사마세가는 적가상방를 적대시하거나 피해를 유발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세세한 항목으로 들어가면, 사마세가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입힌다거나 무력을 사용했을 경우를 대비한 내용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상방인 적가상방이 무가인 사마세가를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거나 의도적으로 피해를 입힐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건 일방적으로 적가상방에게 유리한 내용들이었다.
이 협정서만 있으면 당장 적가상방이 사마세가가 위치한 낙양으로 들어가서 장사를 하더라도 아무 소리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항목 중에는 사마세가가 취급하는 품목이 아닌 경우에는 상행에 도움을 주겠다는 내용마저 포함되어 있었고, 몇몇 물품에 대해서는 직접 납품을 받고 싶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이건 강서성에서 백련문이 적가상방을 도와주는 것처럼, 사마세가도 적가상방을 도와주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마세가가 이렇게 해 준다는 건가?”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이 직인을 보셨습니까? 이거, 사마세가주의 직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왜 사마세가주가 직인까지 찍어서 협정서를 보낸 거냐니까?”
“백아가 돌아오면 물어보시라고요. 저한테 그러지 마시고.”
평소처럼 항상 투덕거리는 모습이었지만, 워낙 믿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인지 두 사람의 목소리는 조금 허탈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원래 풍백이 원했던 것은 그저 사마세가가 적가상방을 건들지 못하도록 협정서를 써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건 사마진걸이 사마세가로 돌아가서 풍백이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며 일이 커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단리세가가 요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서 신경이 쓰이는 참이었다. 원래 하남성의 터줏대감이 단리세가였던 만큼, 이런 단리세가의 움직임이 사마세가를 굉장히 거슬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느닷없이 적가상방이 막대한 금액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사마세가를 단번에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사마세가는 단순히 적가상방을 위협하거나 해하지 않는다는 협정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주며 자신의 편으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적가상방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상방이 괘씸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적가상방이 향후 대상방으로 커 나갈 준비가 충분한 것을 보고 결정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마세가의 결정에 분노한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당연히 사마진걸이었다.
자신이 먼저 풍백을 자극하고 협박했다는 걸 잊어버리고, 자신이 그에게 모욕을 당하고 사마세가를 우습게 봤던 것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던 것이다.
몇몇 사마세가의 중진들은 사마진걸의 의견에 동의했다.
사마진걸이 단초를 제공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상방 따위가 감히 사마세가를 상대로 그런 언행을 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의견은 사마세가주의 추상과 같은 외침에 그대로 묵살되고 말았다.
- 그러면 너희들이 나가서 적가상방 수준의 상방을 데리고 와!
적가상방이 벌어들이는 돈은 막대한 수준이었다. 이미 어지간한 대상방과 비견될 정도였다.
아무리 사마세가라고 하더라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대상방을 마음대로 끌어오거나 휘어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대상방은 그들의 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관부나 대문파 몇 군데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물론 청해상방처럼 그런 관계를 맺지 않는 곳도 있지만.
아무튼 이런 막대한 수준의 돈을 만지는 적가상방과 비견할 수 있는 상방을 포섭하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절대로 적가상방이 단리세가와 손을 잡는 일이 벌어지도록 만들 수 없었다.
행여나 적가상방이 단리세가와 손을 잡게 된다면, 그 이후 사마세가가 겪어야 할 일은 단순히 협정서를 보내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말이다.
중진들의 의견을 한 번에 묵살한 사마세가주는 능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다. 애초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단리세가를 누르고 올라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실리를 택했다.
비록 시작은 사마진걸이 만든 악연(惡緣)이지만, 이것을 우호적인 협정서를 보냄으로써 선연(善緣)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진걸은 길길이 날뛰다가 사마세가주에게 끌려갔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사마세가 일족이 사는 내원에서 무지막지한 소리와 처절한 곡소리가 들려왔다는데, 정확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적호경이 조심스럽게 협정서를 챙기는 것을 보며 진덕양이 말했다.
“참…… 걱정이 됩니다.”
“뭐가 말이냐?”
“백아가 사천에 들렀다가 돌아온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랬지.”
“백아가 무한에 가서 뜬금없이 하남성에 진출할 초석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천성에 들렀다가 돌아온다는 말을 하니, 사천에서는 대체 무엇을 가져올까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말은 걱정이라고 하면서도 흐뭇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걱정이 아니라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였다.
“너무 백아에게 큰 기대를 거는 모습을 보이면 그 아이가 힘들어질 수 있다. 그러니 그 아이 앞에서는 자중하도록 해.”
“당연히 그래야지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전에도 말했던 것이지만, 아무래도 백아는 형님 아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형님이라는 명칭을 보니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어서 적호경이 그를 쏘아봤다.
“또 무슨 소리냐.”
“이전에는 형님 아들 같지 않게 워낙 사고만 쳐서 그렇게 말했었는데, 지금은 형님 아들이 이렇게 뛰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적호경이 고리눈을 뜨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걸 본 진덕양이 후다닥 집무실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저놈은 왜 날이 갈수록 저렇게 철이 없어지는지…….’
길게 한숨을 내쉰 적호경이 슬슬 돌아오고 있을 풍백을 떠올렸다.
‘부디 조심해서 돌아오도록 해라. 굳이 무언가를 가져오지 않아도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