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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73화 (208/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73화

채설지의 쌍수가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면서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채설지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진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무언가를 떠오를 것처럼 가물거리는 것이 있었다. 이걸 꼭 기억해야 하는데, 그걸 잊어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채설지는 양진이 제대로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세 개로 분열되어 달려드는 채설지의 모습에 하마터면 헛바람 집어삼키는 소리를 낼 뻔했다.

이렇게 환술처럼 분신을 만들어 내는 보법은 오랫동안 강호를 전전하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엄청난 보법이었다. 심지어 세 명의 채설지 중 어떤 것이 진짜인지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셋 중 하나가 진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진짜는 맹교에게 달려들고 있을 거라고 믿었고 말이다.

당연했다.

원래 강호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다면, 가장 약하고 빨리 해치울 수 있는 사람부터 공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협공할 사람을 줄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양진은 확신을 하며 얼른 맹교를 도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서늘한 어떤 것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보법을 펼치며 피했다.

서걱!

“으윽…….”

어깨가 제법 깊숙이 베였다.

그나마 마지막에 피하는 걸 선택했기에 이 정도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양진의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미친…… 나한테 덤볐다고?’

채설지의 빨갛게 변한 수장이 현란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양진을 향해 쏟아져 갔다. 양진은 다급히 구명절초를 펼치며 채설지의 수장을 막아 갔다.

까가가가가강!

요란한 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채설지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검을 확인한 양진은 경악하고 말았다. 채설지의 수장과 부딪치며 이빨이 빠진 검이 마치 톱처럼 보일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뭐, 뭐냐!”

양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예기를 뿜어내는 것인지, 수장으로 검기를 품은 검날을 손상시키고 있었다.

이건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내공은 자신이 더 강해서 채설지를 밀어냈지 않은가.

이때 맹교와 소초상이 환영을 치워 버리고 채설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채설지가 다시 한 걸음 내딛자 그녀의 신형이 다시 세 개로 분열하여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양진 역시 누구를 도와줄 생각을 못했다. 적어도 자신을 노리는 환영이, 진짜 환영인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죽어!’

후욱!

작정하고 뿜어낸 검기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채설지를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환영이었는지, 검기에 맞은 채설지가 스르륵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폭음과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퍼엉!

“쿠에엑!”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맹교가 입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튕겨지듯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희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거의 죽을 것 같은 내상을 입은 모양새였다.

“이런 죽일 년이!”

양진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맹교가 당했다는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수법에 현혹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를 분노하게 만들고 있었다.

몇 차례 부딪쳐 본 결과, 채설지가 자신보다 무공이 떨어진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녀와 부딪치고 검의 이빨을 빠졌다고 하지만, 이건 그녀의 무공이 특수하기 때문이지 자신이 그녀보다 떨어진다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보여 준 보법은 아무리 양진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채설지는 양진의 욕설에도 반응하지 않고, 곧장 소초상을 향해 달려갔다.

양진이 서둘러 소초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하지 말고, 뒤로 피하면서 대응하도록 해!]

소초상은 양진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따랐다. 어차피 그 혼자만으로는 채설지를 상대할 수 없기도 했다.

채설지의 공세를 힘겹게 받아 내는 사이, 양진이 채설지를 향해 들이쳤다. 이번에는 확실히 채설지를 잡기 위해 검에 내공을 잔뜩 품고 있었다.

하지만 채설지는 이전과 달리 소초상의 검과 부딪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신기막측한 보법을 사용하여 잔상을 만들어 양진의 공세를 피하며 집요하게 소초상만 노리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소초상을 먼저 처리하고 양진과 결판을 볼 생각인 것 같았다.

‘이 약아빠진 년이…….’

채설지가 이렇게 나오면 양진도 생각이 있었다.

“적풍백이라는 놈을 잡아 놔!”

양진의 외침에 무사들이 풍백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미 호위무사로 보이는 고우길이 잘해 봐야 일류고수라는 걸 알아챈 상태였다.

그에 비하여 금벽궁 무사들 중에는 조장의 직위를 가진 세 명이 일류고수였다. 절대로 고우길이 막아 낼 수 없는 수준이라는 말이다.

양진은 무사들이 풍백을 공격하는 걸 보고 채설지가 당황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는 아직도 풍백이 절정고수라는 걸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일류고수인 조장 세 명을 필두로 하여 십여 명의 무사들이 살기를 흘리며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병장기가 달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풍백과 고우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저 풍백이 소매를 걷어서 살짝 가려지고 있던 손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풍백이 소매를 걷는 것을 보며 금벽궁 무사들은 실소를 지었다.

‘아까도 소매를 걷으려고 하더니, 상인 나부랭이가 미쳤나 보군.’

‘저러니 주둥이를 제멋대로 나불거리지.’

‘칼에 찔려 보지 않아서 그래.’

자신 있게 다가오는 금벽궁의 무사를 보면서 풍백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무공을 드러내기로 했다.

지면을 박차고 나선 풍백이 가장 먼저 노린 것은 가장 앞에서 다가오고 있는 세 명의 일류고수였다.

풍백이 난화보를 사용하여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본 세 명의 조장들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뭐, 뭐냐!”

“무, 무공을……!”

그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척에 도착한 풍백의 수장이 강대한 내공을 품고 그들을 노렸다. 막강한 위력을 가진 쇄옥장의 초식이었다.

퍼펑!

조장 중 하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하며 쓰러졌다.

풍백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곧바로 두 번째 조장에게 신속하게 다가가며 얼굴과 복부를 향해 쌍장을 휘둘러 왔다.

“어림없다!”

장법을 쓰는 조장은 대갈일성과 함께 풍백의 수장을 그대로 받아쳐 왔다. 그는 아직 동료가 일수에 절명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콰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조장이 하늘을 훨훨 날아가 지면에 처박혔다.

“쿨럭…… 쿨럭…….”

쓰러진 조장이 기침을 할 때마다 입에서 주먹만 한 핏덩이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아직 숨은 붙어 있지만, 아무래도 살아남기는 틀려먹은 것 같았다.

“히이익!”

마지막 남은 조장이 새파랗게 질리며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일류고수가 뒷걸음질로 피하려는 시도는 난화보의 빠른 움직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눈 깜짝할 시간에 접근한 풍백의 쌍수가 두 마리의 교룡처럼 움직이며 조장을 휘감으려 들었다.

조장이 기겁하며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아무리 크게 당황한 상태라고 하지만, 평생을 수련했던 검법이기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구명절초가 튀어나왔다.

자신의 검이 접근하는 풍백의 팔을 잘라 가는 것을 본 조장은 확신했다. 분명히 풍백의 팔이 자신의 검에 잘려 나갈 것이라고.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은 너무나 허무하게 깨져 나갔다.

교룡처럼 움직이던 풍백의 팔이 묵직하게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변하며 쾌속하게 그의 가슴으로 쏘아졌다. 교룡금나수에서 뇌공권으로 자연스러운 연계가 이뤄졌던 것이다.

쾅!

마지막 남은 조장마저 피를 쏟아 내며 그대로 지면에 얼굴을 처박았다.

느닷없이 벌어진 사태에 금벽궁의 무사들이 경악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풍백은 그런 금벽궁의 무사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피, 피해!”

“멍청하게 보고만 있지 말고…… 억!”

“도망쳐!”

온갖 비명이 난무했다.

금벽궁의 무사들은 풍백의 공세를 막으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누군가 등을 보이는 순간, 풍백은 도망치려던 놈을 가장 먼저 쫓아가서 격살해 버렸으니까.

양진은 무사들에게 풍백을 잡으라고 시키고 굳이 바라보지 않았었다. 당연히 그들이 무난히 풍백을 잡아다가 바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점점 격해지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짐작하게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

고개를 빠르게 돌린 양진의 눈에 풍백이 무사들을 학살하다시피 격살하고 다니는 모습이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뛰어다니며 무사들을 죽이는 풍백의 무위는 절대로 자신에 비하여 낮아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왜 저놈이 무공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알아본 정보에 따르면 풍백은 분명히 아무런 무공도 모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봤을 때에도 풍백에게서는 무인들이 풍기는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보이는 모습을 보라.

금벽궁의 무사들을 덮쳐가는 풍백의 모습은 마치 무력한 양 떼를 학살하는 늑대처럼 보였다. 아직 살아남은 무사들의 얼굴에서는 그저 절망만이 보일 뿐이었다.

양진은 곧바로 풍백을 향해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풍백을 향해 움직이기 전에 그의 귀에 한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악!”

소초상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린 양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깨부터 통째로 팔 하나가 잘린 소초상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채설지가 그 옆에서 잘린 소초상의 팔을 손을 들고 싸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렸을 뿐인데, 그 결과 채설지가 소초상의 팔을 잘라 내는 시간을 허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채설지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벌였던 일이 오히려 그에게 악재로 다가오고 있었다.

억울했다.

처음부터 풍백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로 이런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 테니까.

채설지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토해 내는 소초상을 향해 마치 검을 휘두르듯 팔을 휘둘렀다.

서걱!

소초상의 목이 잘려 허공으로 솟구쳤다.

잘린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맞으며 채설지가 양진을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 한껏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맙소사…….”

양진은 채설지의 살벌한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무사들을 모두 해치운 풍백이 채설지의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저게 진짜 은발마녀의 모습이군. 은발마녀라고 불릴 만하네.’

채설지는 양진에게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무려 다섯 개로 늘어나더니, 양진을 포위하는 것처럼 사방에서 동시에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양진이 이를 악물고 검기를 품고 있는 검을 난폭하게 휘둘렀다. 그의 검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다섯 명의 채설지를 모두 노리고 있었다.

콰가가가각!

네 개의 환영이 사라지고, 채설지의 붉게 변한 수장이 양진의 검과 충돌하며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를 냈다.

양진이 고함을 쳤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어! 내가 직접 다 죽여 주마!”

살기등등한 양진의 말은 진심인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사실 양진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도주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채설지의 무공도 만만치 않았고, 풍백은 정확한 무위를 측정도 하지 못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울 수는 없었다. 그는 정파가 아니니까.

채설지의 공세를 받아치며 빠르게 도주할 경로를 찾기 위해 눈을 굴리던 양진은 곧 도주할 경로를 찾았다.

‘이번에 공격을 받아치면서 그 힘으로 빠르게 도주한다!’

아마도 중한 내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아무리 내상을 입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런데 폭풍처럼 공세를 펼치던 채설지가 돌연 수장을 거둬들였다.

‘설마…… 들켰나?’

이런 양진의 눈에 채설지가 두 손을 합장하는 것처럼 가슴에 모으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크게 두 개의 원을 그렸다.

그 순간, 채설지의 수장이 무려 수십 개로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양진은 이런 채설지의 모습을 보고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혀, 혀, 혀…… 혈수마괴?”

왜 이제야 알아차렸던 것일까?

도검 같은 장법, 붉게 변한 수장, 환술처럼 보이는 보법까지 모두 혈수마괴의 무공이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는데 말이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양진을 향해 채설지가 만든 수십 개의 수장이 쏟아졌다.

쉬카카카카칵!

양진은 막아 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거의 도검에 난자당한 것처럼 넝마가 되어 목숨을 잃었다.

양진이 목숨을 잃은 것을 본 풍백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채설지에게 다가갔다. 채설지는 피에 절여진 모습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괜찮습니까?”

채설지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채설지를 보며 풍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굳이 혼자 싸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무공을 숨길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채설지는 그의 말에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돌연 입에서 주먹만 한 핏덩이를 울컥 토해 냈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싸움을 이어 간 탓에 내상이 더 심해진 것이다.

풍백은 비틀거리는 채설지를 보고 서둘러 그녀를 두 손으로 안아 들었다. 그러자 채설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는 함부로 움직이는 것도 위험해서 손을 빌려주는 겁니다.”

변명을 하는 듯한 풍백의 말에 채설지는 환하게 미소를 짓더니 가만히 풍백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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