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59화
흑의인 세 명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객잔에서 풍백 일행에게 몽혼향을 사용하려던 자들이었다.
점혈을 당해 움직일 수 없는 흑의인들은 열심히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주변은 온통 나무들로 가득했다. 그 어디에도 인기척이라고는 없었고, 주위에는 오직 작은 날벌레만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씨, 씨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별것 아닌 놈들이라며? 이게 별것 아닌 놈들이야?’
‘엄청난 고수였어. 이런 고수를 암살하라니, 미친놈들…….’
풍백에게 거의 손도 쓰지 못하고 제압을 당했다. 이 정도 고수를 암살하라고 시킨 자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마 그들이 눈앞에 있으면 그대로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
잠시 후 풍백이 두 손에 남아 있던 동료 두 명을 들고 나타났다.
풍백은 그들도 옆에 같이 무릎을 꿇리곤 그들의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뽑았다.
꿀꺽!
흑의인 중 하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풍백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시끄럽게 소리를 치려고 하면 이걸로 혀를 잘라 줄 거다. 한 놈의 혀를 자른다고 하더라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네 명이나 남아 있으니까.”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는 단검을 그들의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보통 위협을 하면 어떻게든 강하게 말하며 위압감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풍백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혀를 자르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히 말하는 게 더 섬뜩하게 다가왔다.
‘미친…….’
‘살려 줘!’
풍백이 다섯 흑의인의 아혈을 풀어 줬다.
아혈이 풀렸음에도 흑의인들은 함부로 입을 열지도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 모습에 풍백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흑의인 중 하나가 어색하게 따라서 웃으려고 했다.
“웃어?”
빡!
“억!”
단검 자루로 코를 찍힌 흑의인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풍백이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로 말했다.
“시끄럽게 하네?”
풍백은 한 손에 단검을 들고 흑의인의 입을 우악스럽게 벌렸다. 턱이 잡힌 흑의인은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흑의인의 간절한 눈을 바라보던 풍백이 피식 웃더니 턱을 놔줬다.
“조심하자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혀부터 자르면 서로 피곤하잖아.”
흑의인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한 명씩 아는 것에 대해 몽땅 털어놓는다. 어디 소속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주위에 다른 동료는 없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하는 거야. 자신만의 고급 정보가 있으면 그걸 털어놔도 좋아.”
풍백의 말에 흑의인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떻게 할 것인지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흑의인들을 보며 풍백이 말했다.
“그리고 모두 얘기가 끝나면 네 명은 바로 죽인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보다 유용한 정보를 꺼내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 말이 끝나자 흑의인들이 교환하던 시선에 담긴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죽고 싶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러면 너부터 시작할까?”
풍백이 가장 오른쪽에 있는 흑의인부터 지목했다.
어차피 이들이 아는 정보는 거기서 거기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갈수록 털어놓을 비밀이 없어진다.
왼쪽 끝에 있는 흑의인이 사색으로 변해 갔다.
하지만 이들은 몰랐다.
처음부터 풍백이 면구나 역용도 하지 않고 나타난 순간, 이미 풍백은 이들 중 누구도 살려 둘 생각이 없다는 것을.
* * *
금벽궁의 무력부대 중 하나인 암벽대(暗碧隊)는 그 존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곳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금벽궁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사람들을 은밀히 처리하는 것.
그런데 암벽대 대주인 전일비는 이번 임무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일비가 이번 임무를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드는 건, 딱히 대기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은 아니었다.
전일비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건 당가타였다.
‘빌어먹을 당가타의 뒷구멍까지 왜 우리가 닦아 줘야 하는 거냐고.’
당세기를 처리하는 건 당연히 당가타에서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그것조차 처리할 자신이 없는지, 그 일이 자신에게 넘어온 상황이었다.
아니, 이것까지도 괜찮다.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당가타처럼 다른 문파의 일을 대신해서 처리했던 일은 제법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전일비가 이렇게 짜증을 내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음지에서 움직이는 암벽대라고 하지만, 금벽궁이 현재 어떤 일을 하는 중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현재 금벽궁은 이 당가타를 흡수할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당가타가 흡수되면서 현 당가타의 총리인 위덕천이 새로 신설될 당(黨)의 당주로 내정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전일비가 속된 말로 눈이 돌아갔다.
원래라면 그가 새로운 당의 당주가 되었어야 했으니까.
은밀히 더러운 일을 처리하느라 명성을 얻을 수도 없는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고생 조금 하더라도 나중에 그만한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일비가 약속받은 것은 새로운 당의 당주였었다. 그렇기에 어디를 가더라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도 암벽대를 이끌며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자리를 위덕천에게 넘겨준다고 한다.
하마터면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서 당가타로 쫓아갈 뻔했다.
자신보다 무공도 떨어지고, 쌓아 온 공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 놈이 고작 역사만 길고 다 무너져 가는 문파 하나를 넘긴다는 걸로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 가니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궁주가 그를 불러 조금만 참아 주면 곧 더 나은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위덕천은 그날 밤에 어떤 형식으로든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위덕천의 요청으로 당가타의 더러운 일까지 처리하려다 보니 배알이 뒤틀리는 중이었다.
‘참아야지……. 조금만 참으면 곧 이 생활도 청산할 수 있어.’
전일비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위덕천 때문에 조금 멀어졌지만, 고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것을 모두 망칠 수는 없는 일이다.
되도록 기분 나쁜 생각을 애써 외면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임무 대상인 당세기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당세기는 혼자가 아니었다. 마부를 제외하고도 세 명이나 되는 일행이 있었던 것이다.
전일비는 당세기가 지원을 받기 위해 창룡봉무지회로 떠났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누구도 당세기를 지원하는 곳은 없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당가타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들을 지원하는 곳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전일비의 예상이 틀리고 말았다.
보고에 의하면 세 명의 일행 중 한 명은 호위무사라고 했다.
보통 강호의 무인이 호위무사를 대동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당세기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강호의 무인은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전일비는 그들 모두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대원 다섯을 보냈다.
이들이 무난히 당세기와 그 일행들을 처리하고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섯 명 모두 암살에는 잔뼈가 굵은 대원들이었으니까.
자신의 대원들이 이류무인인 당세기와 고작 호위무사 따위에게 암살을 실패하게 될 거라는 가정은 하지도 않았다.
큼직한 바위에 앉아 있던 전일비는 문득 달이 기우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들은 왜 아직도 복귀하지 않는 거야?’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오기에 충분할 만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대원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전일비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새끼들이 설마 또?’
그러고 보니 보고를 하면서 기막힌 미녀가 있다는 말을 했었다.
이전에도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시간을 크게 지체했던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역시 그런 짓을 벌이는 것 같았다.
‘망할 새끼들 같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군. 나중에 크게 일을 망치기 전에 오늘은 절대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어.’
굳은 결심을 하고 있는 전일비의 귀에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원들이 복귀하는 중이라 생각한 전일비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숲속에서 묵직한 다섯 개의 무언가가 튀어나오더니 바닥을 굴러다녔다.
전일비는 그것을 보고 눈이 살짝 커졌다.
대원들의 머리통이었다.
“적이다!”
머리통을 확인한 전일비가 크게 경고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경고가 튀어나오는 것과 함께, 숲에서 다섯 개의 단검이 암벽대원들을 향해 빛살처럼 쏘아졌다.
십여 명의 암벽대 대원도 갑자기 숲에서 나온 머리통을 바라보고 있는 참이었기에 단검이 날아오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억!”
“아악!”
단검은 여지없이 암벽대 대원들 다섯에게 박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세 명은 급소에 박히는 바람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지만, 두 명은 상대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곳에 단검이 박혀 목숨을 건졌다는 정도였다.
동료의 머리통이 굴러 나오고, 갑자기 날아온 단검에 동료가 죽어 나갔기 때문일까?
크게 당황한 암벽대원들은 제대로 대응할 준비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암벽대원들을 향해 숲에서 뛰쳐나온 인영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어 공격을 펼쳤다.
퍼펑!
복부에 장법을 얻어맞은 암벽대원 두 명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칠공에서 쏟아지는 피를 보니 그대로 절명한 것 같았다.
암벽대원들이 동료를 죽인 자를 포위하듯 포진하기 시작했다.
숲에서 나타난 사내, 풍백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자신을 포위하는 암벽대원들을 둘러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야밤에 남자 새끼들이 모여서 무슨 즐거운 작당질을 하고 있어?”
암벽대원들이 풍백을 향해 병장기를 겨누며 살기를 쏟아 냈다.
전일비가 포위망 바깥에서 풍백을 보고 물었다.
“넌 누구냐!”
“그걸 꼭 물어야 하는 건가? 우리가 지금 통성명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던졌던 머리통을 제외하고 말하더라도 눈앞에서 다섯 명을 죽이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풍백의 말대로 지금은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전일비는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의 기척이 있는지 확인해 봤다. 그러나 숲속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전일비가 물었다.
“혼자 온 건가?”
“시끄럽고, 혹시 일행들이 일어날 수 있어서 빨리 돌아가야 되니까 얼른 끝내자.”
말을 마친 풍백이 허리를 숙이더니 땅을 박차며 퉁기듯이 뒤로 쏘아졌다.
몸의 탄력을 이용해 펼치는 금리도천파(金鯉倒千波)의 경신법이었다.
풍백의 뒤를 점하고 있던 암벽대원은 무서운 속도로 확대되어 가는 풍백의 모습에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눈만 커다랗게 떴다.
그 대가로 뇌공권에 맞은 암벽대원은 가슴이 움푹 파이며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이놈!”
“죽어라!”
양옆에 있던 암벽대원이 풍백의 목과 무릎을 잘라 갔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풍백에게 위협이 되기에는 너무 느렸다.
풍백의 두 팔이 두 사람의 도검을 뱀처럼 휘감는가 싶더니, 도검을 쥐고 있는 그들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우드드득!
“으아아악!”
“아아악!”
교룡금나수의 손목이 산산조각 난 암벽대원이 병장기를 놓치고 고통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들을 맞이하는 건 풍백의 족장(足掌)이었다.
쩌적!
암벽대원의 얼굴이 곤죽이 돼서 날아갔다.
순식간에 세 명의 암벽대원이 죽어 나가자, 나머지 암벽대원이 본능적으로 풍백을 향해 달려 나가며 공세를 펼쳤다.
그 모습을 본 전일비가 황급히 소리쳤다.
“물러나라!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그 말에 달려들던 암벽대원들이 황급히 초식을 거둬들이고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풍백과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암벽대원 두 명이 미처 물러서기도 전에 풍백이 다가와 두 사람의 숨통을 쥐고 목을 부러뜨려 버렸다.
살아남은 암벽대원들이 전일비의 뒤로 물러섰다.
십여 명의 암벽대원 중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이제 겨우 다섯 명뿐이었다. 처음 단검을 맞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두 명까지 더해도 일곱에 불과했다.
전일비는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면 암벽대가 와해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암벽대를 이 정도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전일비가 했던 고생은 대단했다. 심지어 몇몇 암벽대원은 직접 무공까지 손봐 줬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암벽대가 겨우 숨 몇 번 쉬는 시간 만에 절반도 남지 않은 것이다.
전일비는 눈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분노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대기해라.”
말을 마친 전일비가 풍백에게 성큼성큼 다가서기 시작했다. 풍백은 그런 전일비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뿌드득!
살벌하게 이를 간 전일비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사지를 잘라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어디 그때도 한번 웃어 봐.”
전일비가 풍백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