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63화
풍백의 인사에도 당한수는 잠시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만큼 풍백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실이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당한수가 당황스럽다는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달려왔다.
“이, 이게 어쩐 일이십니까? 절강성에 계셔야 할 적 공자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제가 우연히 창룡봉무지회 초대장을 얻어서 무한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세기 소협을 만날 수 있었고요.”
“아…… 그렇게 만나게 됐던 것이군요.”
“그런데 이전에 당세기 소협에게도 얘기했던 것이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저에게 연락을 달라고 얘기를 드렸었는데 왜 연락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섭섭합니다.”
“그, 그게……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한수는 굳이 적가상방이 당가타를 지속적으로 도와줄 능력이 없을 것 같아 연락하지 않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으니 말을 가린 것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당가타의 사정에 대해서는 당세기 소협을 통해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곳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네, 그랬습니다만…….”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일단 논의를 해 봐야겠지만, 현재 적가상방에서는 당가타를 지속적으로 지원해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긍정적으로요.”
너무나 쉽게 말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풍백의 모습에 당한수는 눈을 끔뻑이며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까지 온갖 문파와 대상방 등을 돌아다니며 지원을 받기 위해 고생을 해 왔다. 그런데도 단 한 곳도 나서서 당가타를 도와주겠다 말하는 곳이 없었다.
그 결과, 금벽궁과 합병한다는 협의까지 체결하게 된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풍백이 너무나 쉽게 지원을 약속해 주겠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니 허탈할 지경이었다.
“지, 진짜입니까?”
“그럼요. 저희가 긍정적으로 당가타를 지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굳이 중원 정반대편에 있는 사천성까지 찾아왔겠습니까.”
“적가상방에 큰 부담이 되시는 건 아니신지…….”
당한수는 말을 돌려서 했다. 지원을 해 주겠다고 찾아온 풍백이 행여나 기분이 상할 것을 의식해서였다.
그가 알기로 적가상방은 절강성에 있는 흔한 군소 상방 중 하나로 알고 있었다. 그저 군소상방이면서도 오대세가 중 하나인 서문세가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점이 특이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적가상방이 당가타에게 지원을 해 주겠다는 것을 쉽게 믿기가 어려웠다.
풍백은 당한수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적가상방에게 그 정도 역량은 충분히 있으니까요. 고 무사님?”
풍백의 부름에 고우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제법 묵직해 보이는 고급스러운 궤짝이 들려 있었다. 고우길은 궤짝을 열어서 보여 줬다.
당한수는 궤짝이 열리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 금원보?”
궤짝 안에는 금원보 열 개가 붉은 비단 위에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리고 궤짝의 크기를 보면 위에 보이는 금원보 말고도 적어도 세 판은 아래로 더 있을 것 같았다.
고우길이 보여 주는 궤짝에는 금원보가 무려 수십 개나 있다는 말이었다.
청송무관이 처음 표국을 세우면서 빌려 갔던 자금이 금원보 삼십 개였다. 그러니 지금 고우길이 보여 주는 금원보가 얼마나 큰돈인지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이 돈은 혹시라도 창룡봉무지회에서 어떤 인연을 맺고 계약을 체결할지 모르기에 적가상방주인 적호경이 들려서 보낸 자금이었다.
매번 생각지도 못했던 계약을 가져왔던 풍백이었으니, 이번에도 혹시 모른다고 생각하며 넉넉한 자금을 챙겨 줬던 것이다.
당한수는 고우길이 보여 주는 금원보를 보고 소리도 내지 못하며 입만 벙긋거렸다. 그 역시 이렇게 막대한 돈을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 이건…… 이 돈은…… 금원보가…….”
크게 당황했는지 간신히 입 밖으로 나오는 당한수 말은 두서가 없었다. 풍백은 그런 당한수를 보며 환히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지요?”
당한수는 말도 하지 못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서로 협의할 부분에 대해 얘기를 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말에 당한수가 뭐라 대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다. 당가타의 총리 위덕천이었다.
“당 대주는 당가타의 지원에 대해 어떤 협의도 할 수 없네. 그럴 권한이 없으니까 말이네.”
풍백은 위덕천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당가타의 총리 직책을 맡고 있는 위 모라는 사람일세.”
그제야 풍백은 위덕천이 누군지 알아봤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아! 당가타의 위덕천 총리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당한수는 위덕천이 앞으로 나서자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제야 이미 당가타가 금벽궁과 협의를 마쳤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위덕천은 당세기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꽤 놀란 상태였다. 분명히 금벽궁에서 처리를 해 주기로 했었는데 어떻게 돌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전일비가 내게 당주 자리를 빼앗겼다고 대충 감시했던 모양이군.’
이미 죽은 전일비에게 욕을 쏟아 내는 위덕천이었다.
중원에 당가타를 도와줄 곳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위덕천은 풍백이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금벽궁과 협의를 끝마쳤기도 하고, 당세기가 어디서 뜨내기 하나를 데리고 왔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풍백이 엄청난 양의 금원보를 보여 주고 있었다. 막대한 금액을 보고 마음속에서 강렬한 욕심이 솟구쳐 오른 위덕천은 당한수가 나서기 전에 서둘러 끼어든 것이다.
“듣자 하니 적가상방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듯한데, 우리 당가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위덕천은 근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웃기게도 그의 시선은 고우길이 보여 주고 있는 금원보를 연신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런 위덕천의 눈동자에서는 숨길 수 없는 끈적한 욕심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말이다.
그건 위덕천만이 아니었다. 청수대주인 허지명은 물론이고, 당가타의 중역들 역시 노골적으로 금원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중역들은 욕심이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허공을 주물럭거리기도 했다.
풍백은 그런 당가타 중역들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상인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저희는 향후 당가타와 긴밀히 협력을 하며,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관계를 맺길 바랄 뿐입니다.”
“그 말은 사천성에서 당가타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상행위를 하겠다는 말이겠군.”
완전히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아직 풍백은 상행위에 대한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또한 당가타는 사천성에서 어떤 영향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과거에 엄청나게 잘나갔던 세가였다는 과거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정말 당가타가 사천성에서 영향력을 발산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도 금벽궁과 합병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뻔뻔스럽게 이상한 말을 꺼내고 있었다.
풍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절강성에 위치하고 있는 저희가 사천성까지 상권을 넓히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러면 어떤 협력을 말하는 건가?”
“일단은 당가타의 부족한 자금을 지원해 주고, 대신 당가타의 뛰어난 무인들을 제공받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요?”
“시작이다? 그러면 결국 이곳 사천성과 성도에서 장사를 시작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음…… 정말정말 모든 일이 아주 매끄럽게 풀린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요?”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 전에 이제 진출을 시작한 강서성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겠고, 사천성까지 진출하기 전에 호남성과 귀주성까지 진출을 마친 다음에야 사천성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가타가 이전에 사천당가라 불릴 때 수준의 영향력이 있다면 당장 진출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당가타를 믿고 사천성에 진출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위덕천은 기다렸던 대답이라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그렇군. 사천성에서 장사를 할 생각이었어.”
“말했듯이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
“어쨌건 장사를 하겠다는 것 아닌가.”
“상인이니까 당연히 그렇기는 합니다.”
“그러면 성도에서 장사를 하려고 하면서 허락도 받지 않을 생각이었나?”
위덕천의 말에 풍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허락을 말씀하시는지…….”
“어허! 감히 당가타의 앞마당인 성도에서 장사를 하려고 하면서 허락을 구하지도 않다니, 정말 우리 당가타를 무시하는 것인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저희는 당가타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장사를 하기 위한 허락을 따로 구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상인이라더니 도리도 모르고 염치도 없군. 장사를 시작하려면 그 지역에 있는 문파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정상적인 법도가 아닌가!”
비슷한 얘기는 있다.
보통은 해당 지역 관리에게 인사를 먼저 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지역 유지에게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굳이 해당 지역 문파에 허락을 구하지는 않는다.
강호에서 같은 지역에 개파를 하더라도 허락을 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상인이 상행위를 한다고 허락을 받는 경우가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지금 풍백은 성도에서 상행위를 하기 위해 당가타를 방문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가타를 지원하겠다고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윽박지르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싶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당한수가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총리님!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상인이 왜 당가타의 허락을 받습니까? 그리고 적가상방은 지금 상행위를 위해서 방문한 것이 아니라 지원을 하겠다고…….”
“당 대주는 그 입을 닥쳐라! 한 마디라도 더 꺼내면 문중의 규율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이건 당세기 너도 마찬가지다!”
당한수와 당세기가 움찔했다.
아무리 당가타가 금벽궁과 실질적인 합병 단계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한수는 평생을 당가타의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문중의 규율을 들먹이는 순간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적가상방은 큰 죄를 지었다. 먼저 성도에서 상행위를 하려고 하면서 당가타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고, 두 번째는 지원을 해 주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말로 당가타의 위신을 추락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당한수와 당세기는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앞뒤도 맞지 않는 억지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당가타의 중역들 역시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그나마 눈치가 빠른 허지명과 몇몇 중역들은 위덕천이 무슨 의도로 이런 행동을 하는 중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허지명이 먼저 나서며 외쳤다.
“총리님 말씀이 맞습니다! 적가상방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잡스러운 상인이 감히 우리 당가타를 어떻게 보고 지원을 하네 마네 입방아를 찧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장 저 돈밖에 모르는 상인 놈을 혼쭐내고 쫓아내야 합니다!”
“상방 주제에 감히 당가타를 뭘로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압을 하고 얘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혹시 어디 사파의 사주를 받은 놈들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만…….”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저들의 모습에 당한수와 당세기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저들의 시선이 고우길이 들고 있는 궤짝에 닿아 있다는 걸 알아챈 당한수는 참담함을 넘어서 절망스러워졌다.
‘이게 대체 뭔가……. 당가타가 이제는 정파가 아니라 사파나 도둑 소굴이 된 것인가?’
아니, 사파나 도둑이라고 하더라도 돕겠다고 온 사람을 이렇게 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풍백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위덕천에게 물었다.
“저는 지금 이해가 되지 않는데, 총리님은 그러면 저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위덕천은 이런 당한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당가타에게 범한 죄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하지만 모르고 저지른 짓이라 생각해 줄 수도 있다. 젊은 나이에 제대로 배우지 못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 말씀은…….”
“대신 저자에 손에 들린 궤짝을 사과의 표시로 바친다면 말이지.”
당한수는 입을 쩍 벌렸다. 지금 자신이 정파라 불리는 당가타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파의 한복판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문중의 규율이고 나발이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건 과거 사천당가라 불렸던 당가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적가상방의 재물을 강탈하겠다는 말입니까!”
“네 이놈! 방금 전에 내가 뭐라 했던가! 감히 직계라는 허울 좋은 명칭을 믿고 입을 열지 말라는 명령에 반하여 행동해? 뭣들 하느냐! 당장 당한수를 제압하지 않고!”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위덕천의 고함에 기다렸다는 듯이 허지명이 지면을 박차고 당한수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곤 바로 당한수를 향해 손을 써 갔다.
그 모습에 당한수가 이를 악물고 받아쳐 가며 소리쳤다.
“더 이상 이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여기서 싸우다가 죽겠다! 적 공자, 어서 도망치시오!”
허지명은 그런 당한수를 보며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저놈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네 목숨이나 챙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한수는 직계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지, 당한수의 수준으로는 절대 허지명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서로 손을 섞은 지 몇 초식 지나지 않아 당한수가 손이 어지러워지며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위덕천은 그런 당한수를 바라보지도 않고 풍백만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것이냐. 순순히 궤짝을 넘기고 목숨이나마 부지하겠느냐, 아니면 당가타에 죄를 지은 대가를 그 목숨으로 갚겠느냐.”
대놓고 궤짝을 빼앗으려는 위덕천의 눈동자는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중이었다.
위덕천 역시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궤짝을 빼앗으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제 당가타는 금벽궁의 품안에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어떤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금벽궁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거라 믿었다.
또한 이렇게 빼앗은 궤짝에서 금원보 일부를 금벽궁에 상납할 예정이다. 그러니 금벽궁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향후 정파로 탈바꿈을 원하는 금벽궁이지만, 아직까지는 사천성의 대표적인 정사지간이었으니까.
풍백은 이런 위덕천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너무 뛰어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