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48화
한참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린 다음에야 초대장을 확인하고 황학루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황학루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식탁에 앉아 소란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점소이는 식탁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주문을 받거나, 음식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금정문(金鼎門)에서 오셨군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아! 섬서성(陝西省)에서 오셨습니까? 저도 섬서에서 왔습니다! 섬서 어디에서 오셨는지…….”
“정말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협의 명성을 익히 들어와서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결국 직접 만나 뵐 수 있게 되었군요.”
강호의 후기지수들은 함께 앉은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친분을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정파라는 하나의 가치관 아래에 묶여 있는 사이라서 그런지, 후기지수들은 인사를 나누고 쉽게 친해지고 있었다.
창룡봉무지회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같은 정파의 후기지수라고 하더라도 드넓은 강호에서 만나고 인연을 맺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으로 미리 안면을 트고 친분을 만들어놓으면 차후 강호행을 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 쉬워진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강호행이나 가문과 사문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에 관심이 없는 후기지수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인연을 맺기 위해 인사를 나누는 후기지수의 태도는 지극히 진지했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젊고 혈기가 넘치는 남녀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관심이 생긴 이성을 보고 시선을 끌기 위해 은밀한 신호를 주고 받기도 했다.
한편 이런 사람들이 있는 반면,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그래서 나서서 말했지. 당장 그 손을 놓고 물러서지 않으면 내 손속이 독하다고 말하지 못할 거라고.”
“우와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이쿠! 저는 광서성(廣西省)에 있는 소흑상단(蘇黑商團)에서 왔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 도자기를 취급하신다고요? 그것참 다행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제 사문에서 도자기를 판매할 생각으로 알아보는 중이었는데요.”
이전의 그나마 순수한 목적에 비하면 이쪽은 아예 분위기가 달랐다.
누군가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늘어놓으며 은연중에 자랑을 하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친분을 얻기 위해 출신을 묻고 관심이 없는 얘기를 눈까지 반짝이며 듣기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많은 이득이 걸려 있는 계약을 논하며 조금이라도 이문을 더 남기기 위해 열띠게 말하기도 했다.
아마 원래라면 풍백 역시 이들 사이에 앉아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대화에 끼어드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서문세가의 참석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없군.’
일 층을 확인한 풍백이 한 층씩 올라가며 서문표가 있는지 빠르게 훑어봤다. 혹시 서문세령이 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여자들까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사 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서문표와 서문세령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지막 오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가자, 보초를 서는 것처럼 있는 두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녹수장의 표식이 수놓아져 있었다.
풍백이 다가가자 두 사내가 나서서 풍백을 막았다.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오 층에 올라가 보려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오 층은 예약이 되신 분만 올라가실 수 있습니다.”
“예약이요?”
이럴 줄은 몰랐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
명문세가나 대문파의 후기지수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면, 그들에게 온갖 사람들이 달라붙어 어떻게든 얘기라도 한 마디 나누려고 모두 달려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적가상방에서 잔치를 열었을 때에도 남궁세가에서 남궁진이 오자 온갖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려가지 않았던가.
이런 사람들을 전부 받아 주다가는 정작 그들은 중요한 사람들과 친분을 나눌 시간도 없을 것이다.
사내의 말에 풍백은 차라리 잘됐다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러면 하나만 물어봅시다. 혹시 서문세가에서 서문표 소협이나 서문세령 여협이 오셨습니까?”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시는 건 확실한 겁니까? 제가 같은 절강성에서 왔는데, 인사를 좀 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저희도 이곳에서 예약되신 분들에게 길을 내 드리는 역할만 맡고 있을 뿐이니까요.”
감사하다는 마음을 담아 가볍게 인사를 하고 풍백을 뒤돌아섰다.
‘답답하네.’
사내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정도로는 서문세가가 오는 건지 아닌지 판단이 되질 않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풍백은 주변에 있는 빈 식탁 하나에 앉았다.
원래라면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야 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차라리 여기서 서문세가가 오기는 하는지 지켜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오늘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창룡봉무지회가 진행되는 동안 연회는 몇 번에 걸쳐 추가로 펼쳐질 예정이었다.
다른 사람과 인사를 하고 다니는 것은 그때로 미뤄도 큰 문제는 없었다.
풍백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고우길에게 말했다.
“앉으세요. 어차피 저 혼자 있는데.”
“아닙니다. 오늘은 그냥 서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풍백이 이렇게 권유하면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앉았지만, 이제 풍백에게 무공을 전수받아 가면서 더욱 예의를 차리기 시작하는 고우길이었다.
풍백은 두 번 권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타다닥! 타다닥!
풍백이 식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서문세가가 이번 창룡봉무지회를 참석하지 않았다면…… 과연 누가 초대장을 보냈을까?’
머릿속으로 풍백은 몇 군데 이름을 떠올려 봤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청해상방이었다.
현재 청해상방은 거의 다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련문의 집요한 괴롭힘에 상거래가 거의 모두 끊어지고, 심지어 내원에서는 매일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들리고 있었다.
비록 적가상방이 청해상방을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지만, 무너지기 전에 마지막 발악으로 적가상방을 향해 거대한 똥을 던졌을 수도 있었다.
두 번째로 떠올린 이름은 영파상방이었다.
풍백이 기억하기로는 영파상방과 직접적으로 엮인 것은 염평과 서호에서 싸웠던 것뿐이었다.
간접적으로는 작업 중이던 호초를 중간에 가로챘고, 그들과 한창 싸우고 있는 서문세가와 지속적으로 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마겁이었지만, 이 이름을 떠올렸던 것만큼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이렇게 번거로운 수작을 부릴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청해상방하고 영파상방이 수작을 피운 거다?’
청해상방은 설득력과 실행 가능성이 좀 떨어지지만, 영파상방은 상대가 조금 비틀린 감성을 가졌다고 가정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들이었다.
말석이기는 하나 오대세가 중 하나인 서문세가의 소문주를 살수를 동원해 공격했던 영파상방이다. 그에 비하면 풍백 하나 죽이는 건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어쩌면 청해상방과 영파상방 두 곳이 전부 나를 노리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지.’
무혈채과 하오문을 보낸 곳이 서로 다른 곳이라면 전력이 너무 대비되는 이들을 보낸 것도 대충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풍백이 이렇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그가 앉아 있던 식탁에 한 사람이 앉았다.
“안녕하시오?”
생각을 정리한 풍백이 고개를 들었다.
풍백의 앞에는 값비싼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머리에는 깔끔하게 영웅건(英雄巾)을 두르고 있는 이십대 후반의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허리에 패용하고 있는 검은 굳이 뽑지 않더라도 고급스러운 어피(魚皮)로 만들어진 검집만 보면 보통 비싼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법 잘생긴 얼굴에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의 신분이 보통은 아닐 거라 짐작됐다
잠시 그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풍백이 이내 싱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왜 혼자 앉아 있소? 다른 사람들은 서로 인사하고 안면을 트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말이오.”
“사람을 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소? 누군지 말해 줄 수 있겠소? 혹시 내가 찾는 걸 도와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오.”
“서문세가입니다.”
“서문세가? 내가 알기로 서문세가는 이번 창룡봉무지회에 참석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소. 집안에 말하기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고 하던 것 같은데…….”
“그렇군요.”
풍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서문세가에 대해서 한참 고민하고 기다렸던 것에 비하여 사내의 말을 받아들이는 풍백의 태도는 상당히 담백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사내는 그런 풍백을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이제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러 다닐 생각이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이대로 있다가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을 텐데, 사람들하고 좀 어울리는 것이 좋지 않겠소?”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고우길은 뒤에 서서 풍백과 사내가 대화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뭔가 이상했다.
일 년 동안 지켜본 풍백은 서로 인사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 사내에게는 왜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계속해서 풍백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런, 어디 몸이 좋지 않은 것이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도 이런 기회를 그냥 버리는 것이 아깝지 않겠소? 초대장을 보내 준 사람의 성의도 있을 텐데 말이오.”
그 말에 고우길이 움찔했다.
고우길 역시 지금까지 풍백이 무슨 고민을 했었는지 알고 있었다. 풍백이 출발할 때부터 아까 세황조방의 양가정과 나누던 대화까지 모두 듣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나타난 사람이 초대장을 언급하고 있었다.
보내 준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말하는 분위기가 요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우길과 달리 사내의 말에 풍백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 초대장으로 인맥을 만들든, 아니면 그냥 좋은 구경만 하다가 돌아갈 것인지는 제가 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런…… 기왕 보내 준 초대장이니까 좀 제대로 써먹으면 좋으련만…….”
“초대장을 보내 준 건 감사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출발할 때부터 느꼈지만, 초대장에서 구린내가 너무 심하게 나서 계속 속이 역하더군요. 지금은 아주 코가 비틀어질 것처럼 냄새가 풀풀 나고 있어서 기분이 너무 나쁩니다. 그래서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말하는 풍백을 바라보던 사내의 얼굴에도 미소가 점점 짙어지더니 이내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이것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
“재미있었다니 다행이군요.”
“내가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라는 걸 언제 알아챘나?”
“저에게 인사를 했을 때부터 알아챘지요.”
“호오? 눈치가 빠른 건가?”
“그런 얘기는 종종 듣기는 합니다. 그런데 굳이 눈치까지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렇지?”
“당신 같은 사람이 알지도 못하고, 아무런 친분도 없는 나 같은 상인에게 먼저 이야기를 걸 리가 없잖습니까.”
“아하! 그렇군.”
사내는 하나 배웠다는 듯이 밝게 말했다.
그런 사내를 보며 풍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눈치가 빠른 것은 이런 것이겠지요.”
“어떤 것?”
“오늘 객잔으로 찾아온 하오문도는 그쪽에서 보냈다는 것?”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원래 세상 대부분 일들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맞거든요.”
“그래도 너무 막연한데? 내가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잖은가.”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무한에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기에 사파가 무한에 들어왔을 리도 없고요. 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곳이 있기는 한데, 저를 잡으려고 했다면 겨우 하오문을 보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불과 얼마 전에 무혈채를 보냈던 놈들이니까.
우연이든 필연이든, 무혈채가 실패했는데 겨우 하오문을 보낼 리가 없지 않은가.
즉, 하오문도에게 자신을 납치하라고 보낸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눈앞에 있는 사내는 그 조건에 아주 딱 들어맞았다.
대부분은 결국 추측이다.
원래라면 풍백은 이런 추측을 기반으로 결론을 내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이 없었다.
당사자가 바로 눈앞에서 미묘한 행동을 통해 풍백에게 많은 정보를 건네주고 있으니까.
말했듯이 풍백은 과거에 사람의 어떤 행동을 보이냐를 가지고 진실과 거짓을 맞추는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풍백은 이것을 아주 잘했었고 말이다.
사내는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나?”
“누군지는 모릅니다. 제가 딱히 강호에 관심이 많지 않아서요.”
“그런가?”
“하지만 어디에서 오신 분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어디에서 왔는데?”
풍백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마세가.”
사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