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39화
마차 하나에 타고 있는 세 사람이 각각 정파, 사파, 상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삭막한 분위기를 상상할 것이다.
아무래도 정파와 사파는 서로를 경원시하거나 싫어했으니 일반적이라면 이것이 맞았다.
그러나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풍진개인 이상 분위기가 그렇게 될 수 없었다.
풍진개는 말이 참 많았다.
손에 술 한 병 쥐여 주면 안주를 먹는 대신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끝없이 말을 꺼냈다.
원래라면 이런 사람은 대단히 귀찮을 수 있다. 그만 쉬고 싶은데도 계속해서 말을 걸면 그 귀찮음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풍진개는 다른 사람과 차별점이 있었다.
바로 견문이 넓어도 너무 넓다는 것이다.
“그거 아는가? 청해성에 있는 곤륜산에 가면 말이야…….”
“운남(雲南)에는 가 봤나? 운남에 가면 애뇌산(哀牢山)이라고 있는데, 이 산의 산세가 얼마나 험하고 안개가 심한지 산 전경을 볼 수도 없는…….”
“흑룡강(黑龍江) 너머에 색목인(色目人)들이 살고 있는 곳이 있는데, 남자들 팔뚝이 이따만 하고 털이 얼마나 많은지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 새끼처럼…….”
정말 이 모든 곳을 다 돌아본 것인지, 남쪽 끝에 있다는 운남성부터 시작하여 새외는 물론이고, 색목인이나 곤륜노(崑崙奴)에 대한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지명과 각종 진기한 물건, 신기한 사람, 신비한 자연 현상 등은 듣는 사람이 온갖 상상을 하도록 만들었다.
얘기를 듣다 보면 한번 직접 가서 구경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쉬지 않고 계속 떠드는 풍진개의 모습에 채설지가 짜증을 내지 않을까 싶었다. 워낙 아무런 말도 없는 여자다 보니 시끄럽다고 풍진개를 향해 수장을 날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의외로 채설지는 풍진개가 떠드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 듣는 것처럼 시선은 창밖을 향하면서도 귀는 쫑긋거리는 모습이 충분히 집중해서 듣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볼수록 희한한 여자라니까.’
풍진개의 이야기는 마차가 황석현(黃石縣)을 지나 무한까지 가기 전에 있는 마지막 현인 악주현(鄂州縣)을 지나고서도 계속되었다.
풍백은 풍진개의 이야기가 꽤 유익했다.
이미 풍백은 많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거의 절강성과 인근 성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 외 나머지는 정말 큰 사건들에 대해서만 대략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풍진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과거에 어떤 방식으로든 무심코 들었다가 잊어버렸던 것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 풍백은 풍진개의 해박한 견문을 조금이라도 더 들어 볼 요량으로 열심히 옆에서 맞장구쳐 주고 있었다.
한참을 말하던 풍진개가 손에 들린 술병을 흔들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이런…… 벌써 다 마셔버렸군.”
“어떻게, 한 병 더 드릴까요?”
“그래도 되겠나? 이렇게 비싼 술을 계속 얻어 마시는 것이 미안해서…….”
“미안하실 것 하나도 없습니다. 대협이 바로 제 생명의 은인 아닙니까. 제 목숨값에 비하면 이 정도 술값은 한 푼도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섭섭합니다.”
“으하하하! 그래그래, 우리 적제가 그렇다면 내가 열심히 마셔 줘야지!”
풍진개는 풍백이 내민 모태주를 받아 병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이제는 적제라고 부르는군.’
처음 마차를 탈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거리를 뒀었다. 아무래도 딱히 깊은 얘기를 나눴던 것도 아니고, 풍백과 적가상방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니 친근감을 보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곧 언젠가부터 풍진개가 자신을 대하는 것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풍백은 아마도 풍진개가 개방의 연락을 받았을 거라고 예측했다.
‘개방을 통해 적가상방에 대해 알아보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았겠지.’
그때부터 점점 편하게 대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풍백을 아우라 부르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전개였다.
개방과 친분을 쌓는 건 사파를 제외하고 누구나 환영할 것이다.
일단 이들과 친분을 쌓으면 정보 부분에서 도움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다. 스스로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면 무력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아니, 평소에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만약 적가상방을 둘러싸는 묘한 기류만이라도 미리 알아채고 연락을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사소한 정보라도 서둘러 알 수 있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 전에 마겁을 인지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겠지만.’
엄청난 정보력을 자랑하는 개방이니만큼 암향거도 파악하지 못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 있겠지만, 아직은 개방 또한 마겁의 존재 자체도 모를 확률이 높았다.
풍백은 우선 개방이 마겁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만약 모르고 있다면 그들에 대한 정보를 풍진개를 통해 은밀히 흘릴 생각이었다.
어떻게 이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까 풍백이 고민하던 그때, 풍진개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지금 적제를 보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군.”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일 년 정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산현에서 적제를 모르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하던데.”
“아…….”
무슨 얘기를 할지 짐작이 갔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적가상방과 자신에 대해 조사를 끝마친 것이 분명했다.
“듣자 하니 적가상방 개망나니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며?”
아니나 다를까, 풍진개가 예상했던 질문을 던졌다.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기에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린 채설지가 풍백을 바라봤다. 커다래진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풍백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방증하고 있었다.
풍진개는 그런 채설지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당사자가 가만히 있는데 왜 그쪽 소저가 놀라시나?”
채설지는 풍진개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귀가 쫑긋거리는 것을 보면 풍백이 무슨 말을 하는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보고 있으면 참…… 속을 알기 쉬운 여자이기는 한데…….’
속은 알기 쉬운데 아직 왜 자신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걸 숨겨 줬는지 알지 못했다. 풍진개가 옆에 붙어 있다 보니 물어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간혹 풍진개가 자리를 비우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섣불리 채설지와 대화를 나누기 애매했다. 아마도 풍진개는 그때 개방으로부터 정보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풍백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별로 대단한 건 없습니다. 그저 정신을 차렸을 뿐이죠.”
그러자 채설지에게서 시선을 돌린 풍진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정신을 차렸다. 일 년 전부터 활약이 대단했더군. 적가상방이 큰 위기에 빠지면 어김없이 자네가 해결을 해 왔더라고.”
“우연히 일이 잘 풀리더군요.”
“내가 알기로 사람이 변하려면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자네는 그런 계기가 있었던 건가?”
있었다.
풍백이 후회와 회한 속에서 살아온 십여 년이 바로 그 계기였다.
그러나 그 계기를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아마 미쳤다고 할 테니까.
“대단한 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희 상방이 위험해지면서 이렇게 살다가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정신을 차렸을 뿐입니다.”
“호오?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더군요.”
“정신력이 대단한 모양이군. 아무리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적제처럼 바로 정신을 차리기는 힘든데.”
“그래서 행여나 다시 흐트러졌던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 술도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좀 아깝군. 같이 한잔해 보고 싶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적제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이상하기는 했지. 그래도 이제 막 자기 자신을 추스르는 사람에게 술을 권할 수는 없으니 내가 참겠네.”
“하하! 감사합니다.”
풍진개가 모태주를 다시 맛깔나게 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풍백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제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마음껏 물어보게. 대단한 기밀 사항이 아닌 이상 술값으로 얼마든지 얘기를 해 줄 테니까.”
“저희 적가상방을 하룻밤에 멸문시킬 수 있는 문파가 얼마나 될까요? 다른 현에 만들어진 점포를 제외하고 상산현에 있는 적가상방만 말하면 말입니다.”
“많지. 너무 많아서 손으로 세는 것도 힘들 정도로. 적가상방은 아직 군소 상방에 들어가지 않나? 군소 문파도 하룻밤에 이유도 모르고 멸문당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군소 상방 하나 멸문시키는 정도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
풍진개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적가상방은 무림세가가 아니다. 이제 중견 상방으로 슬슬 얘기가 나올 정도인 평범한 상방이다. 그나마 만약을 대비하여 데리고 있는 무사들 중에서 최고 고수가 고우길이었다.
그런데도 고우길도 지금이야 거의 일류고수를 넘보는 수준이 되었지만,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이류무인 초입에 불과했다.
이런 적가상방을 무너뜨리는 건 적당한 군소 문파라도 가능할 것이다.
풍백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전제 조건을 달았다.
“만약 적가상방이 멸문당하는 것을 외부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처리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응? 아무도 모르게?”
“네.”
“음……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해야 한다라…….”
잠시 고민하던 풍진개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했다.
“그래도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이름을 언급하기가 힘들다.”
“그렇게 많나요?”
“당연하지. 하나하나 열거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니까.”
풍진개는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사파만 하더라도 그럴 역량을 가지고 있는 곳이 엄청나게 많아. 대표적으로 말하자면 일단 사도련(邪道聯)부터 손꼽을 수 있겠네. 사도련 알지?”
“그럼요. 사도련을 모를 수는 없죠.”
사파의 하늘이라 부르는 사도련.
강호는 험하고 무정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문파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당장 정파만 하더라도 세가 연합인 군웅회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사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파들이 서로 목적이나 의도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 한다.
물론 군웅회와 사도련은 그 성격이 조금 다르기는 하다.
군웅회는 일 년에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만나서 서로 친분을 다지고 강호에서 일어나는 대소사에 대해 논의를 하는 정도다.
그러나 사도련은 각 사파에서 보내 준 무인과 무사들을 모아서 부대를 형성하고, 추가로 문파에 소속되지 않은 사파의 고수들도 영입하여 스스로 세를 늘린다.
사도련은 과거 사파가 하나였을 때 존재했던 사혈련(邪血蓮)과 비슷한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사도련을 사파를 대표하는 곳으로 칭하기는 하지만, 이전에 존재했던 사혈련과는 많이 다르지. 과거의 사혈련은 사파를 모두 끌어모았지만, 사도련은 그러지 못하고 있거든. 아무튼 사도련이라면 적가상방을 조용히 멸문시키는 것은 차고 넘치지. 무려 사파십대고수 중 최강자인 일신(一神)이 련주로 있으니까.”
“그렇군요.”
“천잔사존(天殘邪尊)과 만독존(萬毒尊)이 문주로 있는 백마성(百魔省)과 독선장(毒仙莊)도 충분히 가능하지. 백마성은 인원은 적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강호에서 알아주는 고수로 이뤄져 있고, 독선장은…… 한 사람이 쓱 들어가서 독 몇 개만 뿌리면 모두 한 줌의 혈수로 변해 버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