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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38화 (138/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38화

무혈채의 수적들이 물러가고 난 이후, 풍백이 타고 있는 배는 천천히 움직이다가 작은 포구에 멈췄다.

원래는 무한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배가 제법 손상되기도 했고 승객들도 더 이상 배를 타고 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갑판은 부서져 있었으며, 온통 피바다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배를 타고 무한까지 갈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장강상운이 불미스러운 사태에 사죄를 하며 서둘러 마차를 섭외해 무한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는 점이다.

배가 포구에 멈춰 서고 사람들이 배에서 내렸다. 포구에 내려선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하아…… 진짜 무서웠어.”

“화살 날아오는 거 봤어? 난 화살이 그렇게 무서운 건지 처음 알았어.”

“그런데 아까 그 여자는 대단하면서도…… 무섭더라.”

“사람을 그냥 막 죽이던데.”

“쉿! 조용해. 강호 무인들은 멀리서 쥐가 움직이는 것도 다 듣는다고 하더라.”

“헙!”

채설지를 입에 올리던 사람들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자신들의 말을 들은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채설지는 보이지 않았다.

풍백이 배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최 대주가 다가와 그를 불렀다.

“적 공자님.”

“네, 대주님.”

“아까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최 대주가 뭔가를 보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을 해 보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채설지에게 무공 쓰는 걸 들통나는 바람에 예민해진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무혈채로 넘어가시겠다고 하신 것 말입니다.”

“아! 그건 당연히 그랬어야 할 일이었지요.”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일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살려 달라고 저희에게 매달렸을 겁니다.”

진지하게 말하는 최 대주의 모습에 풍백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만 넘어가면 되는 일이었는데…… 무사님들이 많이 다치지 않으셨는지 걱정입니다.”

“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은 자상을 입었을 뿐, 중상은 입은 사람도 없으니까요.”

당연했다. 결과가 이렇게 나오도록 풍백이 열심히 나뭇조각을 암기 삼아 날렸으니까 말이다.

정중하게 말하는 풍백의 모습에 최 대주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이번 일로 적가상방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잘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이제 조금씩 커 가는 중인 상방인데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적 공자님만 보더라도 적가상방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상행을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제가 여러 사람에게 알려서 적 공자님의 의로운 행동을 여러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럴 필요까지는…….”

굳이 자세한 사항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었다. 오늘 자신이 무혈채로 알아서 넘어가려 했다는 걸 적호경과 진덕양이 알게 된다면 절대 좋은 소리는 들을 수 없을 테니까.

최 대주와 인사를 마친 풍백이 배에서 내려 포구 밖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를 고우길이 따랐다.

지금 마부는 배에 실었던 마차를 꺼내는 중이었다. 굳이 장강상운이 준비해 주는 마차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무안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일정이 조금 빠듯하네.’

배를 타고 이동했으면 조금 여유가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무한까지 강행군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에 있었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풍진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협, 어디를 다녀오는 중이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보이시지 않아서 찾았습니다.”

“잠깐 옆에 좀 다녀왔소.”

자세히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에둘러서 말하는 풍진개였다.

이런 풍진개의 모습에 풍백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개방도를 만나러 갔거나, 아니면 밀마라도 남겨 놨겠지.’

오늘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은 풍백만이 아니었다. 풍진개 역시 진행하던 일이 모두 어그러지고 말았다.

은밀히 채설지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정체를 밝히게 되었고, 무한까지 타고 가려던 배도 멈춰 버렸다.

아마 그에 따른 내용을 개방에 보고했을 것이다.

풍진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그…… 여자는 어디 있소?”

“네?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풍백은 의뭉스럽게 모르는 척했다. 그러자 풍진개가 다시 말했다.

“그 왜 있잖소. 오늘 배에서 거하게 살겁을 일으킨 여자 말이오.”

“아! 그렇지 않아도 저 역시 그분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데…… 보이지 않더군요.”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풍백은 채설지와 제법 깊게 할 얘기가 있었다. 자신이 무공을 숨기고 있는 걸 알고도 왜 대신 싸움에 나섰는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선실로 들어간 이후, 채설지의 종적이 묘연해졌다. 심지어 그녀가 머물던 객실을 열어 봤지만, 그곳에도 채설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풍진개는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음…… 중간에 배에서 내린 건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곳에는 개방의 후개인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이 정체까지 숨기고 있다는 걸 봤다면, 채설지는 아마도 자신이 그녀를 쫓아다니는 중이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쫓아다니는 중이었는데……. 빨리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찾아봐야겠군.’

채설지를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풍진개가 그녀를 쫓는 이유는 그 반대였다.

지금까지 분석한 것에 따르면 채설지는 창룡봉무지회가 열리는 무한으로 가는 중이었다.

정파의 후기지수가 모이는 장소에 채설지가 등장하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러다가 만약에 정파의 누군가와 시비라도 붙어서 채설지가 다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적어도 그녀를 다치게 만든 문파는 박살이 나겠지.’

혈수마괴의 분노가 그 정도에서 끝난다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풍진개는 채설지를 쫓아다니며 불필요한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기에 막아 낼 준비를 하고 그녀를 쫓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무한으로 가 버리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쫓아야 했다.

“이제 대협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음…… 중간에 어디를 들러야 할지 모르지만 무한으로 가기는 할 걸세.”

“저도 무한으로 갑니다. 우연히 창룡봉무지회 초청장을 받아서 그곳에 가는 중입니다.”

“그런가? 그럼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대협께서도 창룡봉무지회를 가시는 중입니까?”

“정식으로 참석하는 건 아니고, 어쩌면 무한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네.”

채설지가 무한으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빠졌다면 무한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풍백은 그런 풍진개의 이야기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런…… 만약 무한으로 오시면 꼭 저를 찾아 주십시오. 오늘 제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제대로 대접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하하! 난 술만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는 사람이지. 무한으로 가게 된다면 꼭 찾아가도록 하겠네.”

“꼭입니다.”

“알겠네. 나는 바빠서 이만 먼저 가 보도록…….”

풍진개가 말하는 동안 마부가 마차를 끌고 풍백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마부의 표정이 요상했다.

고우길이 먼저 나서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게…… 한 분이 미리 마차에 타고 내리지 않고 계셔서…….”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주인 허락도 없이 누군가 타고 있다는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우길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혹시나 수적이 타고 있는 건가 싶어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면서.

그러나 문을 열고 마차 안을 본 고우길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히이익!”

느닷없는 고우길의 모습에 풍백과 풍진개가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저, 저, 저기…… 저 사람이…… 아니, 저분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우길의 모습에 마차 안을 들여다봤다.

채설지가 마차를 타고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채설지의 모습은 마치 자기 마차를 타고 있는 것처럼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황당한 표정의 풍백이 얼른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여협께서 제 마차를 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배에서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려 찾았습니다.”

풍백의 말에 채설지가 고혹적인 시선으로 그를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여기 포구에서 장강상운이 마차를 가져와 무한으로 모신다고 하던데……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채설지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심지어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이 고개마저 돌리려고 했다.

‘대체 이 여자는 뭐야?’

은발마녀 채설지에 대한 소문 중에서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나하고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건가?’

풍백은 다시 한번 물었다.

“저희는 무한으로 가려고 합니다. 여협께서 가시는 곳을 알려 주시면 그곳까지 제가 모셔다 드릴 수…….”

풍백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채설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으로 가시는 중이라는 말이십니까?”

끄덕끄덕!

“저와 함께 가시려는 겁니까?”

끄덕끄덕!

‘흐음…….’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채설지와 할 얘기가 있으니, 같이 움직이며 무슨 의도인지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는데, 풍진개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어흐흠! 저기…… 나도 생각이 바뀌었는데, 같이 무한까지 가도 되겠나?”

그 말에 풍백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대협께서 바라시면 무한에 들렀다가 저희 적가상방까지 함께하셔도 괜찮습니다.”

물론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풍백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아니, 은밀히 추적하려던 것 아니었어? 여기서 굳이 당신이 끼어들면 이 여자와 대화를 나누기가…….’

“하하하! 그렇게 말을 해 주니 마음이 가볍구먼. 오랜만에 마차를 타 볼까?”

풍진개가 활짝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채설지는 그런 풍진개를 힐끔 쳐다보기는 했지만 관심이 없다는 듯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뭔가 조합이 이상하게 되고 있었다.

‘미래의 사파 고수와 개방의 후개, 그리고 상방의 후계자가 같이 움직인다……. 무슨 이런 막장 조합인지…….’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한숨을 내쉰 풍백은 마차에 올랐다. 그가 풍진개 옆자리에 앉자 곧 마차가 무한을 향해 출발했다.

* * *

“그래서?”

“그, 그게…….”

“실패했다?”

삼소주는 섭선을 살랑거리며 물었다. 입가에 미소를 보면 크게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 앞에 부복하고 있는 중년 사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 일은…….”

“또 우연히 일이 틀어졌다?”

“그렇습니다! 적풍백이 타고 있는 배에 풍진개와 정체불명의 여고수가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적풍백을 예정대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착!

삼소주는 섭선을 접으며 신형을 돌려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첫 번째에도 적풍백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했었지. 그리고 청해상방이 끼어들면서 실패했었지?”

“그,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적가 놈들을 노리지도 않았어. 그런데 백련문주가 튀어나와서 실패했고.”

“으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계획은 문제가 없었는데 예상치 못한 놈들이 튀어나와서 실패했다는 거지.”

“…….”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야. 우연이라면 네가 정말 환상적으로 재수가 없어서라는 이유밖에 없지 않나.”

“한 번만 기회를…….”

“나는 이 정도로 재수가 없는 놈이 내 주위에 있는 걸 원하지 않아.”

“사, 삼소주!”

무릎걸음으로 걸어온 중년 사내가 삼소주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땅에 연이어 찍으며 외쳤다.

쿵! 쿵! 쿵! 쿵!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에도! 실패하면! 제 손으로 목을…… 끄으윽!”

머리를 찍으며 말하던 중년 사내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삼소주는 중년 사내를 향해 접힌 섭선을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중년 사내는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잡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삼소주는 그런 중년 사내를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기회는 충분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죽어.”

착!

말을 마친 삼소주가 섭선을 펼쳤다. 그러자 목을 부여잡고 있는 중년사내 손가락 사이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눈도 감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중년 사내를 내려다보던 삼소주가 다시 섭선을 가볍게 흔들며 나지막이 말했다.

“치워라.”

그의 명령과 함께 나타난 흑의를 입은 자들이 중년 사내의 시신을 신속하게 치우기 시작했다.

‘운이 좋아도 너무 좋단 말이야. 이걸 어쩐다?’

삼소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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