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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37화 (137/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37화

풍백은 멍하니 정신을 빼놓고 있는 무사들 뒤에서 채설지가 수적들을 도륙하는 걸 바라보았다.

‘이렇게 사방을 피 칠갑으로 만드니 은발마녀라고 불리지.’

온갖 살벌한 별호가 많은 사파에서도 마녀가 들어가는 여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별호에 마녀가 붙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독한 손속과 사갈(蛇蝎) 같은 마음씨로 유명했다.

채설지는 딱히 성정이 악독하다는 말을 듣지는 않았었다. 그녀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굳이 사람을 해치진 않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간혹 채설지는 사파가 아니라 정사지간이라 불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은발마녀라 불린 이유는 간단했다. 한 번 손을 쓰면 너무 독하게 쓴다는 것과 수장을 쓰는 것치고 너무 잔혹하게 죽인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혈수마괴의 혈육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다만 풍백은 채설지의 손속이 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적과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서로를 죽이기 위함이 아닌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의 사정을 봐주면서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는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이겨야 했다.

어딘가가 잘려 나간다고 손속이 과하다는 말은 웃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풍백은 손속이 잔혹할 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적들을 가장 간단히 두려움에 빠지도록 만들 수 있었으니까.

상대가 처음부터 주눅이 들도록 만든다는 건 대단한 이점이 될 수 있었다.

‘잔인한 손속이 문제라면 나는 마왕(魔王)이라고 불렸어야지.’

그러니 채설지가 보여 주고 있는 정도의 손속은 딱히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살벌하게 수적들을 죽이고 다니는 채설지를 보면서 풍백은 생각했다.

‘일단…… 장단을 맞추는 것이 좋겠지?’

채설지가 어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보여 주는 모습을 보면 분명 풍백이 무공을 계속 숨길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 당장은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고, 이유는 차후에 천천히 물어보기로 정했다.

“으아아악!”

“이, 이쪽으로 오지 마!”

“크헉!”

전의(戰意)를 완전히 상실하고 마치 늑대를 본 양 떼처럼 채설지를 피해 이리저리 몰려다니던 수적들이 마침내 등을 돌려 자신들의 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런 병신 같은 놈들!”

“비켜!”

“베어 버리기 전에 비켜라, 멍청한 놈들아!”

자신들의 배로 뛰어오는 수적들을 헤집고 수 명의 수적들이 검과 분수도를 앞세워 채설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까지 뒤에서 지시를 내리고 있던 조장들이었다.

풍백은 채설지를 막아선 수적들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일류고수들이네.’

겨우 다섯 명의 일류고수가 절정고수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아마 저들은 채설지가 절정고수라는 걸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호기롭게 나섰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미려하게 미끄러지듯 갑판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뛰어난 보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병장기마저 잘라버리는 수공(手功)은 특이한 무공을 익힌 거라 판단한 것이다.

풍백에게는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일류고수 다섯이라면 저 여자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가늠할 수 있겠지?’

채설지가 가만히 서 있자 다섯 명의 수적들은 그녀를 가운데 두고 포위하듯이 자리를 잡았다. 그것을 보면서도 채설지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자리를 잡은 수적들 중 하나가 외쳤다.

“이 악독한 년!”

“감히 무혈채 호걸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죽이다니…….”

“몸 성히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수적 주제에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다. 심지어 먼저 공격한 것은 저희들이면서 말이다.

“네 몸뚱이로 그 죗값을 받겠다!”

이렇게 끔찍한 무공을 보여 줬음에도 여전히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참 대단하다 싶었다.

채설지는 수적들의 위협적인 고함을 들으면서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손 하나를 들어올렸다.

그 모습에 수적들이 움찔했다. 행여나 바로 공세를 펼치려는 것인가 싶어 긴장한 것이다.

그러나 채설지는 그저 천천히 손을 올리곤 검지를 펴서 수적들을 향해 까딱일 뿐이었다.

닥치고 덤비라는 표시였다.

오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채설지의 행동에 수적들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쳐라!”

수적들 중 하나가 외치자 다섯 수적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들은 합공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지, 서로 초식이 부딪치지 않게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채설지는 한 걸음 내딛었다. 그 모습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다섯 수적의 검과 분수자 사이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기에 최 대주와 무사들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최 대주와 무사들의 생각과 달리, 채설지는 거의 간극이 없다고 생각되는 검과 분수자 사이를 마치 강물을 헤치고 다니는 물고기처럼 누비고 다녔다.

검과 분수자를 헤치고 나온 채설지의 앞에는 경악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수적 하나가 서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 수적은 채설지가 자신의 가슴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수적은 가슴이 쩍 갈라지며 포탄처럼 쏘아져 나가더니 그대로 강물에 떨어졌다. 물거품만 올라올 뿐, 수적이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절명한 것 같았다.

남아 있는 수적 네 명은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을 보여 준 채설지에게 경악하여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채설지는 그들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다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채설지의 모습에 두 명의 수적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반대로 나머지 두 명은 등을 돌려 배에서 뛰어내리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두 수적이 강물로 뛰어들어 도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먼저 초식을 펼치던 두 수적이 그것을 보며 크게 분노했지만, 이미 초식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강물로 도주하는 두 수적을 본 채설지가 눈썹을 살짝 움직이더니 방금 전처럼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런데 이후는 방금 전과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채설지가 한 걸음 내딛자 마치 환상처럼 그녀의 모습이 세 개로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두 명의 채설지가 초식을 펼치는 두 수적에게 다가가고, 나머지 하나의 채설지는 강물로 도주하는 두 수적에게 비쾌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으헉!”

“이, 이게 뭐야!”

초식을 펼치던 두 수적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채설지에게 펼치던 초식을 쏟아냈다. 그러자 초식에 맞은 채설지가 스르륵 사라졌다.

잔상이었다.

진짜 채설지는 강물로 도주하는 수적들을 쫓아가고 있던 것이다.

강물로 뛰어들기 전 고개를 돌려본 수적 하나가 바로 뒤에서 쌍수를 움직이고 있는 채설지를 보고 크게 비명을 질렀다.

“으악!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그것이 끝이었다.

서걱!

도주하던 수적들이 강물로 뛰어들기 전에 그들의 머리가 먼저 몸에서 잘려 허공으로 떠올랐다.

초식을 펼쳤던 수적 두 명은 도주하던 동료가 죽는 걸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더 이상 싸울 의지도 없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채설지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채설지가 서늘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곧 남은 두 명의 수적들도 금방 죽여 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어진 채설지의 행동은 정말 예상외였다.

도망치지 않고 자신에게 맞선 용기에 대한 보상이기라도 한 것일까?

턱짓으로 그들의 배를 가리킨 것이다.

떠나라는 말이었다.

두 수적은 그걸 보고서야 후다닥 각자의 배로 달려갔다.

“으아아……!”

“배 돌려! 도망쳐!”

다른 수적들도 그들이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지체하지 않고 바로 배를 움직여 도망쳤다. 굳이 지시를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떠나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무사들은 무혈채의 배가 멀어지기 시작하자 잠시 눈치를 보다가 누군가가 먼저 소리쳤다.

“마, 만세! 여협께서 우리를 구해 주셨다!”

이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무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으아아…… 이번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모두 다 저분이 우리를 구해 준 거야!”

“감사합니다, 여협!”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무사들이 채설지를 향해 포권을 하며 중구난방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나 채설지는 이런 인사를 받으면서도 그저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람은 최 대주였다.

지금 이곳에서 채설지의 움직임을 파악이라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풍백을 제외하고 오직 최 대주뿐이었다. 그렇기에 최 대주는 경악한 얼굴로 채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혀, 혈수마괴의 제자?’

채설지가 최 대주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가 세웠다.

자신에 대해 입을 다물라는 의도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린 최 대주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이러는 사이 풍백은 채설지를 보며 방금 전 그녀가 보여 줬던 보법과 수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산화영(散化影)이라는 보법과 단천혈옥수(斷天血玉手)라는 수공인가?’

두 무공 모두 혈수마괴의 성명절학 중 하나였다.

산화영은 마치 사술처럼 몇 개의 잔상을 움직이게 만드는 환보(幻步) 계열의 정점을 찍은 무공이었고, 단천혈옥수는 어지간한 보검보다 날카로운 수기(手氣)를 뿜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섯 명의 일류고수가 합공을 잘 펼쳤다면 좋았을 텐데, 두 명이 도망가는 바람에 채설지의 무공을 얼마 살피지 못했다.

‘그래도 방금 보였던 걸 기준으로 한다면…… 아마도 완숙한 절정고수 수준인가?’

높게 치면 그 정도 수준일 것 같았다.

풍백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절대로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괜히 손을 썼다가 잡지도 못한다면 적만 늘리는 격이고.’

채설지가 천천히 풍백에게 다가왔다. 그걸 보는 풍백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해 보시지.’

기왕이면 돈으로 끝나는 이야기이기를 바랐다. 차라리 그러면 일이 편해질 테니까.

그런데 풍백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설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가볍게 손을 들어 비키라는 듯이 저었다.

‘……어?’

풍백이 얼떨결에 옆으로 비켜서자 채설지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더니 그를 지나쳐 선실로 향했다. 그녀가 걸어가는 길에 서 있던 무사와 승객들이 알아서 길을 터 줬다.

선실로 들어가는 채설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풍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건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멀리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풍진개도 이제 끝낸 건가?’

풍진개가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막충이 어떤 놈인지 전혀 모른다. 그에 비하여 풍진개에 대한 소문은 과거에도 꾸준히 들려왔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풍진개가 강물 쪽에서 솟구치더니 경공을 뽐내는 것처럼 표표히 갑판에 내려섰다.

꽤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듯 그의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약간의 혈흔이 흐르고 있었다.

“뭐야? 수적들을 물리친 것이오?”

“아, 그게…….”

풍진개의 말에 최 대주가 황급히 다가와 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대답했다.

물론 채설지에 대해서는 말을 최대한 돌려서 했다. 행여나 무시무시한 손속을 가진 채설지에게 추궁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은 풍진개는 채설지가 나섰다는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조그만 마녀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채설지를 따라다니며 그녀가 얼마나 주변에 관심이 없는지, 그리고 손속이 얼마나 매서운지 모두 똑똑히 봤었다.

그런데 그랬던 채설지가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나서서 수적들을 물리쳐 줬다?

‘희한한 일이네.’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니 다행이기는 했다. 덕분에 조금씩 다친 사람은 있어도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았으니까.

사실 이것이 풍백이 나뭇조각을 이용하여 도와줬기 때문이라는 건 채설지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풍백이 풍진개에게 다가가 깊게 허리를 숙여 포권하며 말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물론 속마음은 달랐다.

‘덕분에 일이 더 복잡해지기도 했고…….’

이런 풍백의 속마음을 모르는 풍진개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되었소. 정말 고마우면 모태주나 좀 더 사 줘도 좋고.”

“그럼요! 당연히 사 드려야죠!”

풍백은 아쉬운 마음을 접기로 했다.

그래도 덕분에 개방과 확실한 인연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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