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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36화 (136/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36화

‘시끄러워.’

채설지는 고운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선두에서 온갖 소란이 일어나는 중이었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마 그녀의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고 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약한 자는 죽는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죽는다는 건 채설지에게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화살이 날아올 때는 조금 고민했었다.

그저 조용히 달빛이 장강을 비추는 걸 즐기다가 선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방해를 하다니…….

‘다 죽여 버릴까?’

잠깐 이런 생각을 해 봤다.

하지만 막상 수적들을 모두 죽이자니 숫자가 너무 많아서 귀찮았다.

그냥 참기로 했다.

그나마 선미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은 적었다. 간혹 날아오는 건 가볍게 튕겨 내고 계속해서 풍광이나 즐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제법 소란스러운 소리가 몇 번 더 들리더니 수적들이 배에 올라타고 무사들과 싸움이 시작됐다.

너무 시끄러워서 더 이상 풍광을 즐길 생각이 슬슬 사라져 갔다.

‘그만 들어가야겠어.’

그런데 그때, 강에서 다섯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이내 물속에서 소리 없이 다섯 명의 수적이 배를 올랐다. 소란을 이용하여 배로 몰래 올라타려는 것 같았다.

배로 올라온 다섯 사내는 가만히 서서 자신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채설지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채설지의 미모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씨…… 씨발, 선녀?’

‘엄청난 미녀다…….’

‘뭐하는 여자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였을 뿐, 그들의 눈에 음심(淫心)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어떻게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냥 제압해서 데리고 가면 그들이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무혈채주가 가로채거나 아니면 막충이 독점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장강수로십팔채의 총표파자(總瓢把子)에게 뇌물로 건넬지도 몰랐다. 그만큼 엄청난 미인이었으니까.

‘그럴 수는 없지!’

‘너희도 같은 생각이냐?’

‘나를 빼놓으면 다 불어 버릴 테다!’

수적들이 서로 눈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본능에 충실한 사파였고, 그중에서 특히나 막장에 가까운 수적이었다. 그런 이들이 눈앞에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미인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숨길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이렇게 되는 건 당연했다.

일단 채설지를 제압하여 선미 어딘가에 숨겨 놓을 생각이었다. 나중에 꺼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면 되니까.

수적 다섯이 달빛에 병장기를 비춰 보이며 음흉한 얼굴로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들은 몰랐다.

지금 이들은 보잘것없는 하물을 사용할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도망을 쳤어야 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그들이 접근하고 있는 여인이, 어쩌면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무서운 사람일지 모른다는 것을.

수적 하나가 채설지에게 다가가 잡으면 부드럽게 뭉그러질 것 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손을 잡아갔다.

그러자 그녀의 손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수적의 손을 피했다.

수적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작게 뭐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채설지의 손이 그의 얼굴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서걱!

수적은 마치 검에 베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고 느꼈다.

‘어…… 라? 뭐지? 이게 무슨…….’

첨벙!

네 명의 수적이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채설지의 손을 잡으려다가 목이 잘린 동료가 비틀거리다가 강에 빠지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뭐, 뭐야!’

‘분명히 손으로 살짝 만진 것 아니었나?’

‘씨, 씨발! 엄청난 고수다!’

싸늘한 눈으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수적을 바라보는 채설지가 다시 한번 손을 움직였다.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미 수도 없이 이런 시선을 받아 왔던 그녀였다. 어지간하면 여행 중이니 그냥 넘어갔겠지만, 이들은 선을 넘었다. 자신에게 더러운 정욕(情慾)을 보였으니까.

채설지의 손이 아름답게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것을 본 수적들이 황급히 자신들의 병장기를 앞세웠다. 감히 덤비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녀가 펼친 공격을 막아 내고 바로 강으로 뛰어들 속셈이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어디 한구석이 잘리거나 뭉개지더라도 바로 강으로 뛰어들었어야 했다.

서거거거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가장 먼저 병장기가 깔끔하게 잘리며 떨어지고, 그 뒤를 이어 네 명의 수적이 동시에 머리통이 잘려서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수적을 죽인 채설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만 들어가야겠다.’

기분이 상했다.

어차피 곧 들어가려고 했었지만, 방금 나타났던 수적들의 시선 때문에 풍광을 즐길 기분이 완전히 사라졌다.

결정을 내린 채설지가 몸을 돌려 선실로 향하려고 했다.

그런 채설지의 눈에 풍백이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어둠 속에서 손바닥에 놓인 조그만 나뭇조각을 탄지(彈指)로 쏘아 내, 수적들의 요혈을 노리는 풍백의 모습.

배를 탄 이후 갑판에 나오면서 몇 번 본 적이 있던 풍백이었다. 그때 채설지는 그가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여 주는 것은 암기에 대한 공부가 없었다면, 뛰어난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펼칠 수 없는 수법이었다.

‘방금 전에 저 사람…… 자신을 수적들에게 넘기라고 했던 사람 아닌가?’

선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하여 관심이 없었던 채설지였다. 그러나 귀는 뚫려 있었으니 대충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무공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던 사람이 고명한 수법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직접 확인을 한 건 아니지만, 지금 펼치고 있는 탄지 수법보다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왜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어둠 속에 자신을 숨겨 가며 은밀하게 나뭇조각을 던지는 것으로 간접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감정하게 정적이던 채설지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재밌는데?’

채설지가 자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걸 마주한 풍백이 우뚝 멈췄다.

‘……어떻게 하지?’

자신이 무공을 가지고 있는 걸 되도록 숨기고 있던 풍백이었다.

물론 당장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마겁이라는 놈들이 중원에 암약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아직 적가상방이 안전해졌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니 전략적인 이점을 생각하면 숨기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이점을 계속해서 유지해야겠지만, 문제는 채설지의 입을 막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채설지는 확실히 절정고수였다. 그리고 미래의 검후인 조유하와 달리 행동 하나하나가 강호초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채설지를 조용히 제압하거나 위협하여 입을 닫게 만들 수는 없었다. 힘으로 입을 닫게 만들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수밖에 없으니까.

작게 한숨을 내쉰 풍백이 떠올린 말은 간단했다.

‘후우…… 망했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채설지가 자신의 무공을 밝히기 전에 직접 나서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면 적어도 사람이 다치는 와중에도 자신의 무공을 숨겼다는 비난을 받지는 않을 테니까.

마음을 정한 풍백이 수적들을 향해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유령처럼 허공을 날아 수적들을 덮쳐 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서거거걱!

허공을 날아간 그림자가 수적들 사이로 파고드는 순간, 연이어 섬뜩한 절삭음이 울려 퍼졌다.

연이어 비명들이 뒤따랐다.

“아아악!”

“내 팔!”

“끄르르륵…….”

대여섯 명의 수적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그나마 팔 하나 잘린 수적은 운이 좋은 것이었다. 대부분은 목이 잘려서 날아갔고, 몇몇은 목이 절반쯤 잘려 피가래를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누, 누구냐!”

“여… 자?”

수적들이 더 이상 무사들을 공격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며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간에는 채설지 혼자 서 있었다.

사람에게 둘러싸여 달빛을 받으며 피를 밟고 서 있는 채설지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대단히 고혹적으로 보였다. 마치 인세에 내려온 신비롭고 차가운 선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수적들 중 다수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아름다운 채설지의 모습에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수적들의 모습에 경험이 많은 수적과 고수들이 거칠게 소리쳤다.

“겉모습에 속지 마라!”

“고수야! 조심해!”

“넌 대체 누구냐!”

수적들의 물음에도 채설지는 그들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우연인 것처럼 풍백을 스쳐 지나가며 가느다란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붉은 입술 앞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풍백은 어이가 없었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뭐야? 입 다물고 있겠다는 건가? 그리고 내가 나서지 않게 자신이 처리해 주겠다는 거야?’

채설지 역시 장강수로십팔채와 같은 사파였다.

물론 사파는 정파와 달리 같은 사파라고 하더라도 수틀리면 칼로 쑤시고 보는 놈들이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정파를 위해 나서는 사파는 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얻는 것도 없는데 말이다.

풍백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했다.

‘……제정신이 아닌가?’

간혹 사파에는 내공 수련을 잘못하여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러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채설지는 갑판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며 수적들 사이로 파고들어 쌍수를 흔들었다.

서걱! 서거걱!

도저히 수장으로 만드는 결과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수적들이 베어져 나갔다.

강호에는 수장으로 도검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무공들이 몇몇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그녀가 혈수마괴의 제자라는 걸 알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혈수마괴라는 별호만 보더라도 그가 수공을 펼치면 손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채설지의 쌍수는 여전히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으니, 누구도 그녀를 혈수마괴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채설지가 아름다운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수적들이 픽픽 죽어 나가고 있었다.

수적과 채설지의 수준은 너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다.

채설지를 향해 달려드는 수적들은 채설지가 수장을 놀릴 때마다 죽거나 어디 한구석이 잘려서 나동그라졌다.

그 섬뜩한 모습에 수적들이 점점 겁을 집어먹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러자 수적들을 이끌고 있는 조장들이 소리쳤다.

“물러서지 마, 병신들아!”

“고수면 뭐 어쩌라고! 고수라고 칼이 안 박히냐?”

“물러서면 나한테 죽는다!”

조장들의 욕설과 협박에 수적들이 죽기 살기로 채설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런 오기로 뭉친 공격은 눈을 감은 채로도 피할 수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으로 가볍게 수적들의 검과 분수자를 피한 채설지가 수장을 움직였다.

서걱! 서거걱!

너무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채설지의 모습에 수적들은 겁에 질려 갔다.

최 대주를 비롯한 무사들은 멍하니 압도적으로 수적들을 몰아붙이고 있는 채설지를 보며 말했다.

“대체…… 저 여협(女俠)은 누구랍니까?”

“……여협이 맞기는 하나?”

“손이 너무 매섭기는 한데, 상대가 수적이니까…….”

“너 며칠 전에 저 여자 보고 너무 아름답다고 무한에 도착하면 말이나 붙여 보겠다고 하지 않았냐?”

“말을 붙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은데요.”

채설지가 수적들을 향해 펼치는 수법은 너무 살벌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켜보고 있으면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살벌한 손속에 눈이 잘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채설지의 미모에만 시선이 집중되었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채설지를 따라 그녀의 옷자락이 아름답게 흩날렸다. 그리고 소매에서 뻗어 나온 눈부시게 흰 수장이 팔랑거리며 수적들을 향했다.

끔찍한 상황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채설지의 행동 하나하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채설지는 사방을 피 칠갑으로 만들면서도 정작 본인의 옷에는 핏방울 하나 튀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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