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33화
육지에서는 자신들의 구역을 정해 놓고 지나가는 사람을 상대로 노략질을 하는 산적이 있듯이, 장강에서는 노략질을 하는 수적(水賊)들이 있다.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는 이런 수적들을 지배하는 가장 큰 수적 집단이었다. 흔히 육지에 녹림십팔채가 있다면 장강에서는 장강수로십팔채가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들이 단지 산적과 수적일 뿐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녹림십팔채와 장강수로십팔채는 사파를 구성하는 거대 방파 중 하나였다. 그들의 규모도 크지만, 가지고 있는 무력도 어지간한 명문정파는 홀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녹림십팔채과 장강수로십팔채는 비슷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열여덟 개의 산채를 상오채(上五寨), 중오채(中五寨), 하팔채(下八寨)로 나누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녹림십팔채와 장강수로십팔채는 같은 사파이고 노략질이 주수입이라는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도 서로를 대단히 싫어해서 저희들끼리 싸우기도 한다는 것이다.
무혈채는 이런 장강수로십팔채 중 하나였고, 그중에서 하팔채에 속하는 수적이었다.
하팔채에 속한 무혈채라고 무시할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하팔채라고 하더라도 무려 장강수로십팔채에 속해 있었다. 작은 문파는 감히 비비지도 못할 수준이라는 말이다.
“쯧…….”
풍진개가 얼굴을 찡그러뜨리며 가볍게 혀를 찼다.
정파 입장에서 장강수로십팔채와 같은 수적을 보는 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원래라면 수적을 대충 사로잡아서 훈계를 하거나 다시 수적질을 못하도록 쓴맛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실제로 강호초출인 무인들이 산적이나 수적을 붙잡아 멋들어지게 훈계를 했다는 식의 말은 흔하고 흔했으니까.
그러나 상대가 장강수로십팔채면 얘기가 달라진다.
상대가 고수일 수 있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잘못 건드리면 자신의 사문과 장강수로십팔채 사이의 싸움이 벌어질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파 무인들은 장강수로십팔채와 같은 거대 사파를 만나면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한다.
‘빌어먹을 수적 놈들…….’
풍진개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마도 무혈채가 통행세를 받기 위해 이렇게 위세를 부리며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산적이나 수적이 자신들의 구역을 통과하는 모든 상인이나 행인의 물품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랬다면 표국이나 정파와 누구 하나는 무너졌을 정도로 싸웠을 것이다.
보통은 통행세라는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받고 길을 열어 줬다.
이 통행세라는 것이 웃긴데, 산적과 수적들은 이 통행세를 보호비로 받는 것이라 말한다. 즉, 이 돈을 받고 자신들의 구역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보호를 해 준다는 말이다.
통행세를 과도하게 걷으면 표국이나 정파, 또는 관부가 출동하여 토벌하는 경우도 나온다. 그래서 적절한 금액을 통행세로 받는 협상과 요령도 중요했다.
아무튼 풍진개는 수적들이 이렇게 대놓고 나와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돈을 받아 가는 일련의 과정이 대단히 꼴보기 싫었다.
개방은 장강수로십팔채보다 더 거대한 세력이다. 적으로 삼으면 더 곤란한 쪽은 개방이 아니라 장강수로십팔채였다. 굳이 풍진개가 장강수로십팔채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풍진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당장 장강수로십팔채와 개방의 싸움이 벌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자신이 지금은 신분을 숨기고 작전 중이라는 것이 더 컸다.
무혈채의 배가 다가오는 것을 본 무사들이 갑판으로 몰려와 보기 좋게 도열했다.
아무래도 협상을 하기 전에 자신들의 기세를 보여 주려는 것 같았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협상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었다.
무혈채의 배가 십여 장 거리까지 다가와 멈추자, 무사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선두로 나서 외쳤다.
“장강상운(長江商運)의 최 모가 무혈채의 영웅에게 인사를 드리오!”
내공을 담은 중년 사내의 음성이 달빛이 반사되는 장강 위로 널리 퍼져 나갔다. 음성에 내공을 담는 수를 보니 족히 일류고수는 될 것 같았다.
어지간한 수적은 아마 중년 사내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만 듣고도 자신이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꼬리를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장강수로십팔채의 무혈채였다.
물론 전혀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협상을 할 때는 적당히 대우를 해 줄 것이다.
이제 슬슬 무혈채에서 대답이 올 것이었다. 아마도 상대의 얼굴에 금칠하는 말과 함께 쪽배를 타고 중간에서 만나 따로 대화를 하자고 할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화가 아니라 협상이지만.
수적을 만나면 항상 치르는 의식과 같은 것이기에 다른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죽하면 도열하고 있는 무사들 중 경험이 일천해 보이는 젊은 무사 몇몇은 긴장한 눈이 아니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세 척의 무혈채 선박 중에서 가운데 있는 선박에 작은 불길 하나가 생기더니 허공을 가르며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삐이이이이익!
신호용으로 사용하는 효시(嚆矢)에 불을 붙여 쏜 것이다.
배를 타고 있는 무사들은 물론이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갑판에 나와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는 효시를 향했다.
그리고 그 효시는 정확하게 펼쳐져 있는 돛에 박히더니 불이 엉겨 붙기 시작했다.
그걸 본 중년 사내가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 불을 꺼!”
“예, 예!”
무사들은 의외의 사태에 어수선하게 움직이며 황급히 물통으로 돛에 붙은 불을 끄려고 했다.
중년 사내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무혈채를 향해 소리쳤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지금 피를 보자는 뜻이오?”
그의 목소리가 전해졌는지 무혈채가 타고 있는 세 척의 배에서는 대답 대신 왁자하니 대소(大笑)를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 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닥쳐라! 어디서 감히 장강의 호걸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당장 뒤지고 싶다면 호걸님들이 단칼에 자를 수 있게 길게 목을 빼고 있도록 해라!”
“우와아아아!”
“멋지다!”
“맞다! 상운 무사 따위가 겁도 없이 말이야!”
수적들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갑판에 있던 승객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고 서둘러 선실 쪽으로 이동했다.
행여나 싸움을 시작하면 최대한 다치지 않으려고 숨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탔는데 수적도 처리를 못하는 거야?”
“내가 그러니까 차라리 마차를 타자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는 절대로 죽지 않도록 만들 테니까.”
사람들이 불안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이렇게 사람들이 선실로 들어가자 갑판 위에는 배를 호위하는 무사들 십여 명과 선실 가까이로 물러난 풍진개, 그리고 풍백과 소란이 일어나자 얼른 갑판으로 튀어나온 고우길뿐이었다.
‘아니, 한 사람이 더 있네.’
풍백의 눈에 선미(船尾) 쪽에 서서 지금 일어나는 일에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채설지가 보였다.
여전히 혼자서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였다.
아까 전에는 채설지가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 소란이 일어나면서 선실에서 나온 듯했다.
풍백은 그런 채설지에게서 눈을 돌려 풍진개를 바라봤다. 풍진개는 잔뜩 굳은 얼굴로 상황이 돌아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흐음…… 과연 어떻게 할까?’
보아하니 무혈채는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표행을 나서는 표사와 산적 간의 협상이 결렬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 그런 경우는 통행세의 협상 실패 때문이지만, 간혹 그게 아닌 다른 이유일 때도 있다.
이렇게 협상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기에 표국이 있고, 상방이 표국에 운송을 맡기는 것이다.
협상 실패한다는 말은 결국 서로 싸운다는 말이니까.
현재 보이는 전력은 당연하게도 무혈채가 더 강했다. 일단 세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있는 수적들의 숫자만 하더라도 배에 있는 십여 명의 무사들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혈채의 누군가가 소리쳤을 때 들려온 음성을 떠올려 보면, 적어도 무사들을 이끌고 있는 중년 사내보다는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음성에 담긴 내공이 더 웅혼했기 때문이 아니다. 음성에 내공을 담아내는 것이 훨씬 능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싸움의 결과를 굳이 끝까지 볼 필요가 없지.’
여기서 변수는 풍진개였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배를 호위하는 무사들은 다치고 죽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무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승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반항하다가 죽는 사람이 나오거나 몹쓸 짓을 당하는 여인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여기서 풍진개가 싸움에 끼어든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다치거나 죽는 무사들이 나올 수도 있지만, 적어도 승객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수적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것이고 말이다.
풍진개는 그만큼 고수였다.
하지만 풍진개는 지금 채설지와 관련하여 신분을 숨기고 추적 중에 있었다. 그런데 과연 나설 수 있을까?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무사를 이끌고 있는 중년 사내가 외쳤다.
“우리가 노야(老爺) 밑에 있다는 걸 잊었소? 무혈채는 이걸 감당할 수 있단 말이오? 노야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노야는 무슨 얼어 죽을 노야야? 그냥 반가 늙은이라고 해. 그리고 반가 늙은이가 뭐라고 감히 무혈채의 행사에 그냥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를 논해?”
퉁명스러운 무혈채의 목소리에 중년 사내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감히!”
“시끄러! 우리가 반가 늙은이를 무서워하는 줄 알고 있네. 네놈 때문에 조만간 장강상운을 한번 조져 줘야겠구나! 어디 그다음에도 노야라는 말을 주둥이에 담을지 봐야겠다!”
으드득!
중년 사내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전력상으로 부족한 지금 상황에서 먼저 공격을 명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만히 있는다고 상대까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애들아! 뭘 가만히 있어? 어서 저 건방진 놈에게 인사부터 해 봐!”
무혈채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 척의 배에서 화살이 쏟아져 나왔다.
“피, 피해라!”
“이 멍청이들아, 피하지 마! 방패로 몸을 가리란 말이야!”
중년 사내가 우왕좌왕하는 경험이 일천한 무사들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산적이나 수적이나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화살부터 날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산적을 상대할 때는 주변에 나무나 마차, 수레를 방패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배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배를 호위하는 무사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방패를 하나씩 패용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경험이 적은 일부 무사들이 쏟아지는 화살에 크게 당황하며 선실로 피하려고 했다. 아마 중년 사내가 방패를 쓰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으면 화살에 맞았을 것이다.
“꺄아아악!”
“사람 살려!”
“나, 나도 방패 좀…….”
승객들은 배에 화살이 꽂히는 소리에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화살이 꽂히는 소리를 들으니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쏟아지는 화살에 무사들이 방패 뒤에 숨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잠시 후 화살이 멈추자 무사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병장기를 꺼냈다.
수적들은 화살을 날려 대응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사이에 배를 접근시켜 곧장 먹잇감인 배로 건너와 싸우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니 곧장 싸움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일어섰는데, 정작 무혈채의 배는 여전히 대략 십 장의 거리를 두고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중년 사내는 수적을 상대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대번에 수적이 단순히 약탈하기 위해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잠시 후 대답이 들려왔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넘길 테냐?”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말해 줘야 대답을 할 것 아니오!”
간혹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으로 무사들의 목숨을 건네라는 정신 나간 놈들도 있으니 무조건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승객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목숨을 건네줄 정도로 직업 정신이 투철하지는 않았다.
무혈채의 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배에 적가상방에서 온 적풍백이라는 놈이 있다. 우리 목표는 바로 그놈이다. 그놈을 넘긴다면 그만 조용히 물러나도록 하지.”
“적…… 풍백?”
중년 사내가 풍백의 이름을 되뇌는 사이, 풍백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무혈채가 있는 방향을 노려봤다.
‘뭐냐? 이 웃기지도 않은 전개는…….’
풍진개가 어떻게 나올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던 풍백에게는 상황이 별로 재미없게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