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32화
선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사뿐사뿐 걸어서 갑판으로 나오는 여인을 한 번 휘감고 지나갔다. 그러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휘날렸다.
머리카락처럼 백옥 같이 흰 피부는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고, 커다란 봉목과 날카로운 콧날은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을 훔쳤다.
또한 붉은 입술과 그 사이로 보이는 하얀 이는 단순호치(丹脣皓齒)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갑판에서 달빛 아래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봤던 사람은 감히 시선을 돌리지 못했고, 이런 여인의 매력은 마력과 같아서 마치 선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풍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커다랗게 변한 눈과 쩍 벌린 입은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풍백이 놀란 이유는 그가 이 여인에게 매료(魅了)되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풍백은 진짜 놀라고 있는 것이었다.
‘채설지가…… 여기서 나타난다고?’
과거에 풍백이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다시피 이렇게 독특한 외모를 가진 사람은 굳이 직접 만나지 않았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엄청난 외모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녀는 후에 은발마녀(銀髮魔女)라 불리는 채설지였다.
정파에 검후가 있다면 사파에는 은발마녀가 있다며, 강호에서 정파와 사파가 만나면 항상 언쟁을 벌였었다.
이런 비교는 단지 외모를 보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은발마녀는 실제로 사파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기에 검후와 거의 모든 방면에서 경쟁 상대로 이름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와 별개로 채설지의 손속은 사파에서도 매섭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또한 자신만의 정의가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가 정파든지 사파든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그녀를 정사지간으로 분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종종 나왔었지만, 결국 그녀는 단 한 번도 정사지간으로 분류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파십대고수 중 하나이자, 사괴 중 하나인 혈수마괴(血手魔怪)의 제자였으니까.
놀란 눈으로 채설지를 바라보던 풍백은 풍진개가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꼈다. 마치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풍백은 짐짓 한눈에 반했다는 듯이 말했다.
“끄…… 끝내주게 아름다운 여인이…….”
이런 풍백의 대답에 풍진개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이것을 보면 풍진개는 이미 채설지가 누군지 알고 있고, 아마도 그의 목표가 그녀인 것 같았다.
풍백은 의문이 들었다.
분명 풍백의 기억에서 채설지는 앞으로 몇 년 후에나 강호에 출도하게 된다.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검후 조유하와 비슷한 시기여서 계속 비교되었던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채설지가 나타나고, 풍진개는 그런 채설지를 은밀히 감시하고 있다?
‘원래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내가 많은 일들을 바꿔서 일어난 반작용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겠네.’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갑판에 등장한 채설지를 바라보며 넋이 나가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연인으로 보이던 남자는 여자에게 냉혹한 시선을 받았고, 남편으로 보이는 사내는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중이었다.
채설지는 이런 소란에 신경도 쓰지 않고 선수로 걸어와 야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풍진개가 여전히 채설지를 바라보고 있는 풍백에게 전음을 보낸 것은 이때쯤이었다.
[그만 바라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
전음을 들은 풍백이 다시 한번 짐짓 전음성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풍진개를 바라봤다.
[이제 그만 선실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그대의 안전을 생각해서 절대로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을 보여 준 풍백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실로 돌아갔다.
선실로 들어온 풍백은 가볍게 혀를 찼다.
‘풍진개에 채설지라…….’
풍진개를 만났을 때는 그저 안면이라도 틀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연이어 채설지를 만나게 되자 조금 고민되기 시작했다.
미래가 자신 때문에 바뀌고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두 적가상방의 멸문을 막기 위해서 움직인 결과물이었으니, 바뀐 결과를 그대로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저 풍백이 바라는 건, 너무 미래가 많이 바뀌기 전에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얻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겠지.’
다시 침상으로 올라간 풍백이 정좌를 하고 내공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채설지와 풍진개에 대한 생각은 한쪽으로 접어 놨다. 당장은 수련이 먼저였으니까.
* * *
포양호는 거대한 호수였다. 아마 평생 산속에서만 살아왔던 사람은 수평선을 보고 바다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이렇게 거대한 포양호를 벗어나는 것도 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성자현을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포양호를 벗어나 장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었다.
원래 배를 타면 승객들에게 음식을 챙겨 주지 않는다. 각자 챙겨 온 건량이나 육포를 먹으며 허기를 채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승선 요금이 비싸기 때문인지, 풍백이 탄 배는 매일 끼니가 되면 식사를 챙겨 주고 있었다.
물론 호화스러운 정찬은 아니었다. 며칠에 걸쳐서 선원까지 수십 명이 먹을 음식을 모두 챙겨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조리된 음식을 배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풍진개는 거지다.
명문정파라느니 강호의 정의를 수호하는 위치라고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가져다가 붙이지만, 개방의 근본은 거지라는 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거지가 제일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하게도 밥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방도는 밥만 주면 어떠한 불만도 입에 올리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풍진개는 조금 달랐다.
물론 풍진개도 밥을 좋아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그가 밥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술이다.
처음 배를 타자마자 기세 좋게 술을 시켜서 마셨을 때는 아주 좋았다. 비싼 뱃삯에 걸맞게 술도 무려 귀주성(貴州省) 인회현(仁懷縣)에서 나온다는 엄청나게 비싸고 귀한 모태주(茅台酒)였다.
입에 들어간 모태주가 얼마나 입에 짝짝 달라붙고 향기가 코를 통해 흘러나오는지 눈이 번쩍 떠질 정도였다.
얼마나 맛있었냐면, 느닷없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절강성의 적가상방이란 곳에서 온 놈팡이가 다가올 때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대충 그 놈팡이를 입단속시켜 돌려보내고 나머지 술을 마신 풍진개는 다시 술을 시켰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공짜가 아니었다니…… 씨발!’
심지어 이미 마셔 버린 모태주 한 병 값으로 작전비 거의 대부분을 탕진하고 말았다.
다행히 배에서 밥을 주니 걱정은 덜었다만, 배에서 내린 이후 이제 밥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앞이 캄캄한 풍진개였다. 구걸을 하면서 미행을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또한 이제 술 한 방울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아찔하기까지 했다.
철이 든 이후로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술 한 잔이라도 마시고 다녔던 풍진개였다. 오죽하면 사부가 그를 보며 주귀(酒鬼)라고 불렀겠는가.
그런데 이제 당분간 술 한 방울도 먹지 못할 판국이다.
‘제기랄! 한 잔씩 마실 걸…….’
이렇게 돈을 써 버린 것에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싼 모태주는 한입에 털어 버린 것이 아쉬운 풍진개였다. 하루에 한 잔씩 아껴 먹었으면 적어도 열흘은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말이다.
이 정도면 풍진개가 아니라 주취개(酒醉丐)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하루 동안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던 풍진개의 앞에 누군가 술병을 내밀었다.
풍백이었다.
“대협께서 술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만 조용히 드리고 가려고…….”
풍백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귀신같은 금나수법으로 손에 들린 술병을 빼앗은 풍진개는 그대로 술병을 주둥이에 처박고는 양껏 들이켰다.
첫 한 모금에 자신이 이틀 전에 마셨던 값비싼 모태주라는 걸 알아챘지만, 하루를 금주한 터라 참을 수가 없었다.
거의 반병을 단숨에 들이켠 풍진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고개를 들어 풍백을 바라봤다.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풍백의 모습은 풍진개에게는 가히 보살(菩薩)처럼 보였다.
가볍게 헛기침을 한 풍진개가 전음을 보냈다.
[술은 고맙게 마시겠네. 그런데…… 아니, 고맙네.]
풍백은 그런 풍진개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돌아갔다.
혼자 남은 풍진개는 술병을 흔들어보고 반병 남은 것을 확인했다.
‘아, 이걸 이렇게 마셔 버리다니…… 이런 등신 같은…….’
아까웠다.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할 시간은 길었다. 겨우 반병 가지고는 하루에 한 잔을 마신다고 하더라도 배에서 내릴 때까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풍진개는 술병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아껴서 마셔 봐야지…….’
내일부터 한 잔이 아니라 반 잔씩 아껴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다음 날 알게 되었다.
“어제 보니 많이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서 한 병 더 가져와 봤습니다.”
풍백이 다시 한번 건네는 모태주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던 풍진개가 주변을 한번 살펴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술병을 받았다.
“어허험! 주는 거니 받기는 하겠소.”
“큰일을 하시는 분이신데, 맛있게 드셔 주시기만 해도 감사하지요.”
정말 술을 건네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풍백은 조심스레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물러났다.
‘이것 참…… 계속 이렇게 얻어먹으면 안 되는데…….’
평소라면 절대로 이렇게 계속 풍백이 접근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풍백이 자신을 알아본 순간 어딘가로 물러나 역용술이 아니라 아예 면구를 쓰고 나타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배를 타고 있는 상황이니 그럴 수 없었다.
갑판에는 배를 호위하는 무사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그들은 손님들의 얼굴을 대충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풍진개가 사라졌다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그래, 이렇게 비싼 술을 매일 사 올 리가 없잖아. 이것까지만 받는 걸로 하자.’
이것 역시 평소에는 하지 않을 판단이었다.
뒷머리를 벅벅 긁은 풍진개가 어제 마시고 남겨 놨던 모태주 반병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풍백은 매일 해가 지면 선실에서 나와 풍진개에게 모태주 한 병씩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당장 풍백이 주는 술을 거절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아…… 내가 이렇게 의지가 약했다니! 오늘만큼은…… 오늘만큼은 꼭! 반드시 거절하겠어!’
매일 낮에는 이렇게 다짐을 했다.
하지만 정작 밤이 되고 풍백이 나타나 술병을 내밀면 그의 손은 의지와 달리 넙죽넙죽 술병을 받고 있었다.
‘망할…… 이건 다 이놈이 계속 술을 주기 때문이야! 대체 이놈은 뭔데 이렇게 술을 매일 가져다주는 거지?’
풍진개는 술병을 받으면서도 풍백을 예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풍백 역시 이런 풍진개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 무려 개방의 후개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풍진개가 허술한 사람일 리는 없었다.
비록 풍백에게 술을 얻어먹고 있지만, 간혹 예리한 시선을 던지는 걸 보면 풍백을 믿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술은 받아 가고 있으니 나중에 이걸 계기 삼아 친분을 쌓아 갈 수 있겠지?’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은 겨우 며칠에 걸쳐 술을 사 준 것만으로 완전히 무장 해제를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사 주는 비싼 술은 그저 나중에 다시 인사를 할 수 있는 구실 정도의 역할일 뿐이었다.
지금 풍진개가 자신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배에서 내린 풍진개가 풍백에 대해 조사를 하더라도 문제가 될 부분은 하나도 없으니까.
‘중요한 건 차후에 내가 개방과 연결될 선을 만들고 있다는 거지.’
약간은 억지로 맺은 관계지만, 아마 풍백에 대해 조사하고 문제가 될 소지가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는 어떻게든 풍백에게 득이 될 것이다.
달이 뜨자 오늘도 언제나 그랬듯이 모태주를 들고 나타난 풍백이 풍진개에게 작은 미소와 함께 내밀었다. 그러자 풍진개는 풍백이 내민 모태주를 받았다.
이제는 풍백에게 고맙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슬쩍 신호만 보낼 뿐이다.
풍백도 그런 풍진개에게 똑같이 슬쩍 신호만 보내고 다시 선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어둠에 잠겨 있던 장강 위로 세 척의 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세 척의 배는 풍백이 타고 있는 배의 경로와 비슷했다. 이대로 계속 움직이면 서로 부딪칠 것이다.
선원 중 하나가 다가오는 배를 향해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세 척의 배는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슬슬 선원들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배를 지키는 무사 중 하나가 선두 끝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세 척의 배를 확인하다가 돛대 꼭대기에 걸린 깃발을 확인하고 얼굴이 굳었다.
그는 얼른 다른 무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소리는 적어도 풍백과 풍진개의 귀에는 제대로 들렸다.
“무혈채(武穴寨)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