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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28화 (128/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28화

백건상방이 멸문을 당한 이야기는 상산현에서는 아주 큰 사건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빈도는 점차 줄어 갔다.

관부에서는 이번 사건에 관련하여 절강성에서 활동하는 마적단을 몇 군데를 범인으로 정조준했다.

사실상 증거를 확보하는 것에 실패하여 백건상방을 멸문시킬 정도로 큰 규모의 마적단이 범인일 것이라는 간편한 결론을 내 버린 것이다.

덕분에 범인으로 지목당한 마적단은 관부에서 나온 토벌대에 철저하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억울하다 말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마적단의 변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고, 설령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적단의 해악은 만만치 않았으니까.

소수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한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백건상방이 멸문시킨 곳이 마적단이 아니래.”

“그러면?”

“적가상방이 금호상방이랑 손을 잡고 하룻밤 사이에 싹 죽여 버렸다고 하더라고.”

“에이…… 그건 너무 갔다.”

“진짜라니까. 마적단이 범인이면 왜 사람들이 아무도 듣지 못했겠어?”

“그럼 적가상방이랑 금호상방이 백건상방을 멸문시키는 걸 왜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건데?”

“다 돈을 먹이고…….”

“내가 백건상방 근처에 살았는데, 그러면 왜 나는 아무런 돈을 못 받았는데?”

“응? 그랬어?”

“이 새끼, 주둥이에서 나오는 말이 몽땅 거짓부렁이구나!”

이렇게 몇몇 사람이 들고 나온 음모론은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추측뿐이어서 결국 아무도 선동하지 못했다.

과거, 적가상방을 멸문시킨 놈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풍백은 곧장 마겁을 추적할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단지 상방의 후계자일 뿐이었다. 과거 군부에 소속되어 있었을 때와 달리 그들을 쫓을 여건이 되지 못했다.

물론 암향거와 하오문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어설프게 다른 이들의 손을 빌렸다가 그들에게 발각이라도 되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상황을 두고 봐야겠지.’

풍백은 당분간 마겁에 대해서는 자신만 알고 있기로 정했다.

강호를 수호하는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는 풍백이었다. 그런 것은 강호에 역사가 유구한 명문정파나 혁혁한 명성을 떨치는 협객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과거의 복수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바로 현재였다.

적가상방이 안정적으로 성장해 나가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풍백에겐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츰 방법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가장 유력한 것은 힘을 가진 이들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짧은 시간에 적가상방을 보호할 이들을 만드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었다.

여차하면 황룡사 황금불상을 이용할 의향도 있었다. 황금불상을 이용하면 짧은 시간에 대량의 고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가볍게 생각하는 가정일 뿐이다.

황금불상과 같은 기물이 풍백에게 있다는 걸 누군가가 알게 되고, 그 사실이 강호에 알려지게 된다면…… 일 년 후에 벌어졌던 마검 쟁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혈겁이 전 강호를 뒤덮을 테니까.

생각을 해 보라.

불과 늦어도 이 년 정도면 일류고수 이상의 무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엄청난 힘은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유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어쩌면 황금불상은 영원히 숨겨야 할지도 몰랐다. 과거 적웅이 이 황금불상을 바다에 버린 이유가 이것 때문일 테고.

* * *

백건상방이 멸문하면서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용정차 시장은 고스란히 적가상방의 품으로 들어왔다.

사실 여기서 적호경과 진덕양은 많은 고민을 했었다.

백건상방의 멸문에 적가상방이 관여한 것은 아니냐는 시선이 있었기에, 백건상방이 멸문하고 텅 비어 버린 시장을 집어삼키는 것이 부담되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몰라서 심지어 두 사람은 상산현에서 용정차를 공급하지 않는 방향까지도 고민했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다루와 거래처 사람이 몰려와서 절대 문제가 없을 테니 제발 용정차를 공급해 달라며 읍소했다.

이제 백건상방도 없으니 적가상방마저 상산현에 용정차를 공급하지 않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적호경과 진덕양은 상산현에 용정차를 공급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고민처럼 약간의 음모론이 기어 나오기는 했지만,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적가상방에서 알아차리기 전에 다루와 거래처에서 적극적으로 부인하면서 쓸데없는 헛소문을 차단했다.

상산현의 상황이 이렇게 정리되어 가면서 슬금슬금 다른 곳의 상황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그 소식이 적가상방에도 전달되게 되었다.

백련문주 주천구는 최고급 용정차를 먹었다.

‘향이 좋군.’

이것은 진덕양이 보내 준 것으로 원래 차를 즐겨 마시지 않던 주천구지만, 이것만큼은 입에 맞아 자주 마시는 중이었다.

적가상방에서 머문 것도 벌써 몇 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 계획은 이렇게 적가상방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주약란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곧장이라도 그녀를 데리고 백련문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럽긴 하겠지만, 이내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시비의 삶에서 강서성을 주름잡는 백련문의 여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니 마다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주약란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고, 그 탓에 어영부영 이렇게 몇 달이나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적가상방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주천구의 위치가 대단하다 보니 적가상방에서 그를 아주 많이 신경 써 주고 있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용정차도 그렇고, 매 식사 때마다 나오는 음식도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딸이 이곳에 있었다.

백련문이 안정되면서 무언가 마음 한구석이 허했던 주천구였다.

그런 주천구의 앞에 나타난 주약란은 너무나 소중했다. 아직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어도, 만약 그녀가 필요하다면 자신의 심장이라도 꺼내 줄 수 있을 정도로.

대신 백련문에 있는 몇몇 사람은 꽤 힘든 것 같았다.

문주가 결재를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다. 대부분의 일들은 부문주가 전담해서 처리하도록 해 놨지만, 부문주의 권한으로도 처리하기 어려운 일도 분명 존재했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는 없지. 약란이를 문파에 있는 주요 인사들에게도 인사를 시켜야 하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주천구의 귀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주약란의 발소리였다.

지금은 얼마 전 전수해 준 내공심법을 수련하고 있어야 하는 시간인데, 왜 자신을 찾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뭐가 그리 다급한지 주약란이 문을 열기도 전부터 그를 불렀다.

“아버지!”

차를 마시던 주천구는 주약란이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자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헤벌쭉한 표정을 지었다.

주천구가 강호에서 얻은 별호는 무정검군이었다.

그러나 누가 그의 이런 표정을 보고 그가 무정검군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찰나의 순간이었고,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주약란은 그걸 보지 못했다.

얼른 표정을 가다듬은 주천구가 주약란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 수련해야 할 시간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지금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확인하려고 왔어요.”

“이상한 소리?”

“청해상방!”

주약란의 입에서 청해상방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번에 판단한 주천구는 천장 어딘가를 노려봤다.

그가 노려본 곳에 숨어 있던 두 호법이 서로 앞다퉈 전음을 보냈다.

[저희가 발설한 것 아닙니다!]

[아가씨의 친구분이신 수월 소저가 얘기를 해 준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청해상방에 관련된 얘기가 점점 흘러나오던 중이었습니다!]

[이미 소식에 빠른 사람은 알고 있던 얘기입니다!]

크게 당황한 것처럼 전음을 보내는 두 호법의 태도에 주천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주천구에게 주약란이 물었다.

“청해상방을 습격하고 있다는 사람들……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인가요?”

“맞다.”

주천구는 굳이 말을 돌리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영원히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주약란에게 거짓말을 해서 신뢰를 잃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러셨어요!”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청해상방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해치지는 않았으니까. 물품만 적당히 처리하고 사람들을 그냥 보내 줬어.”

사실이었다.

어차피 주천구의 목적은 청해상방의 몰락이었다. 청해상방의 일꾼들의 목숨을 주천구의 목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내원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주약란이 받았던 고통과 아픔을 알면서도 외면했으니까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만하세요. 이 정도로 하셨으면 됐어요.”

“그럴 수는 없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네? 대, 대체 어떻게 하시려고요!”

“청해상방이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문태성이 모든 것을 잃을 때까지.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문태성을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주, 죽여요?”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죽여 주겠다. 하지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담담하게 말하는 주천구의 말에 주약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까지 어려서는 문태성의 의도적인 무시와 은밀한 괴롭힘에 고통을 받고, 나이가 들면서 하나의 거래 대상으로 여겨졌던 주약란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문태성을 죽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를 아버지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가진 적도 없었다.

그냥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주약란에게 문태성은 두려움의 대명사이자 도망쳐야 할 대상이었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잠시 멍하니 있는 주약란의 모습에 주천구가 물었다.

“한마디만 하면 된다. 노골적으로 말하기 싫으면 돌려서 말해도 된다. 더 이상 보기 싫다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다.”

아직 주약란이 대답하지 않았으나 주천구는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알았다.

“……그냥 놔두세요.”

역시 생각대로였다.

아직 주약란은 모질지 못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모질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면 한심한 놈이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딸이기 때문일까?

주약란의 이런 모습은 주천구에게는 너무 선하게만 보였다.

어차피 세상을 알아 가면서 점점 바뀌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전까지는 이렇게 착하고 순수한 모습을 오랫동안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알겠다.”

“청해상방을 괴롭히는 것도 그만두시고요.”

“그건 거절하지.”

“왜요! 제가 싫다고 하잖아요.”

주천구는 고개를 저었다.

“청해상방을 무너뜨리려는 이유는 너 때문이 아니다.”

“……그러면…….”

“네 어미 때문이지.”

“…….”

“문태성은 청해상방을 키우기 위해 너를 임신한 네 어미를 나에게서 빼앗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를 잊고 행복하기를 빌었지. 하지만 내가 알아보니 네 어미는 그리 행복하지 못한 것 같더구나.”

주약란은 주천구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불행한 삶을 살아왔던 것처럼 어머니 역시 힘든 삶을 살았다. 그리고 결국 청해상방 내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뒀고 말이다.

“이건 내가 청해상방, 아니 문태성에게 내리는 벌이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를 빼앗았으니, 나는 그가 인생을 바친 청해상방을 거둬들일 것이다.”

단호한 주천구의 말에 주약란은 고개를 숙였다. 담담하게 말한 주천구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픔과 회한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적어도 어머니와 자신이 그렇게 힘들었을 일은 없었을 거라고.

“네 말대로 문태성은 살려 둘 것이다. 정작 본인이 그걸 바랄지는 모르겠지만.”

주약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삶을 바쳤던 청해상방이 무너지면 문태성은 가만히 놔둬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몰랐다.

‘기왕이면 끝까지 살아남아서 죽도록 고생을 했으면 하지만.’

주천구는 무정검군이라는 별호에 걸맞도록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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