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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26화 (126/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26화

중얼거리던 흑의인이 입에서 굵은 선혈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젠장!”

흑의인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멍해졌던 풍백은 그걸 보고서야 황급히 흑의인의 혈도를 점하고 맥을 짚어 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스스로 심맥을 끊은 것이다.

그때 총관을 수습하고 돌아오던 조유하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봐요! 여기 이 사람들…….”

크게 당황한 그녀의 목소리에 서둘러 풍백이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눈에 다른 네 명의 흑의인도 입에서 피를 뿜어가며 죽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자리에서 일어난 풍백은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경계를 서던 흑의인 두 명이라도 살려야 했으니까.

그러나 풍백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이들은 방금 흑의인들이 죽기 전에 먼저 죽은 것 같았다.

으드득!

풍백이 이를 갈며 흑의인 중 하나의 옷을 찢어발겼다.

조유하는 풍백을 따라 나왔다가 그가 시체의 옷을 찢는 것을 보고 당황해서 물었다.

“대, 대체 뭐하는 거예요? 왜 옷을…….”

그녀의 말을 듣는 채도 안 하고 시체의 옷을 벗긴 풍백의 눈에 그가 찾던 것이 들어왔다.

옆구리에 새겨진 하나의 문자.

겁(劫).

이걸 확인한 풍백은 정신이 아득해지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절정고수에 도달한 이후, 이 정도 충격은 처음이었다.

‘이놈들이 대체 왜…….’

풍백은 이미 이들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과거 풍백은 새외에서 온갖 놈들과 싸웠었다. 유목민 부족장을 비롯하여 거대 마적, 암상, 범죄자, 새외 무림 등 너무 많아서 모두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들과 부딪치는 일은 점점 적어졌다.

당연했다.

풍백을 비롯한 부대원이 협상을 하거나 공작을 벌이고, 심지어 암살을 하며 더 이상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할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무리를 이루던 세력들이 사라질 때마다 한 집단만큼은 도리어 점점 늘어났던 탓이었다.

풍백과 부대원들은 거의 몇 년에 걸쳐 그들과 서로 쫓고 쫓기며 싸워 왔는데, 웃긴 점은 그들의 진짜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부대원들은 처음에 이들을 광신도라 부르다가 이후 문신을 발견하면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겁(魔劫).

이것이 이들의 이름이다.

겁이라는 문신을 몸 어딘가에 새기고 다니고, 하는 행동은 끔찍한 짓을 벌이는 광신도와 같았기에 이보다 그들을 잘 표현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풍백이 목숨을 잃었던 곳.

그곳이 바로 마겁의 숨겨진 거점이었다.

풍백은 이들이 왜 지금 이곳에서 나타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몇 년 후 새외에서 마겁을 발견하고, 이들이 감히 중원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끊임없이 싸우고 공작을 벌였었다.

그런데 왜 행적이 나타나기 몇 년 전인 이곳에서 발견된 것일까?

“하하…… 씨발…….”

풍백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어이가 없다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욕을 뇌까렸다.

‘이놈들은…… 이미 중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이네.’

이전에는 단지 마겁이 신강(新疆) 천산(天山)에 있다는 천마신교(天魔神敎)처럼, 중원에 들어와 강호에서 암약하려는 놈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풍백이 추측하는 것처럼 이미 강호의 음습한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이라면, 과거 풍백과 부대원들은 대체 무얼 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원했기에 그렇게 우리와 드잡이를 하고 있었던 걸까?

확실한 건 하나였다.

과거 풍백과 부대원들은 반쯤은 농락을 당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아직…… 판단을 하지는 말자.’

무언가 판단을 내리기에는 알고 있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과거에도 마겁의 놈들을 잡으면 독단을 먹고 죽거나, 이렇게 심맥을 끊고 자결을 해 버렸다. 그러니 무려 십여 년의 세월을 건너 돌아왔는데도 이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후우…… 아니지. 내가 그런 것까지 고민할 이유가 있나?’

풍백은 강호를 구하는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럴 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강호에는 이미 풍백보다 더 강력한 무인부터 거대한 세력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강호를 걱정하고 구하는 것은 풍백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시 생각은 현 상황에 맞춰졌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과거에 적가상방을 멸문했고, 지금은 백건상방을 멸문시킨 것일까?’

아무래도 그것에 대해 뭐라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백건상방의 총관뿐이었다.

풍백이 벌떡 일어나자 시신에 있는 문신을 보고 있던 조유하가 깜짝 놀라며 같이 일어섰다.

“총관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

동굴로 풍백이 뛰어가자 조유하가 그를 따라오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저 흉수들에 대해서 뭐라도 아는 게 있는 거예요?”

“…….”

“이봐요! 얘기를 좀 해 달라고요!”

조유하가 풍백을 채근했다.

그러나 풍백은 아무런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아직 강호에 등장도 하지 않은 마겁에 대해서 뭐라 말하겠는가? 그리고 풍백 역시 마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서 해 줄 말도 없었다.

새외에서 등장했던 마겁이 중원을 가로질러 끝에 있는 절강성에 나타난 것을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풍백이 대답도 없이 달려가기만 하자 조유하가 입술을 삐죽였다.

직접 흉수를 봤으니 풍백에 대한 의심은 완전히 없어진 상태였다. 그러니 풍백에게 대답을 요구하기도 힘들었다.

총관은 곽자억과 함께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곽자억은 옆에 굴러다니던 거적으로 덮여 있었고, 총관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미약하게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풍백은 총관의 옆으로 다가갔다가 온몸에 하얀 가루가 뿌려진 것을 봤다.

금창약(金瘡藥)이었다. 금창약은 자상(刺傷)과 같은 상처에 뿌리는 약으로, 지혈 작용과 외상을 치료하는 약이다.

아마도 조유하가 총관의 상처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지고 있던 금창약을 상처에 모두 뿌린 것이다.

분명 용도에 맞게 사용한 것이지만, 총관과 같이 온몸에 빼곡히 난 이런 상처에는 그리 큰 의미는 없었다.

금창약은 비상시에 사용하는 약이다. 그러니 어차피 의원을 찾아가면 남아 있는 약은 물로 씻어 내야 했다. 그러니 차라리 붕대로 지혈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의원을 찾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총관의 손목을 잡아 본 풍백은 끊어질 것처럼 가늘게 뛰고 있는 맥박에 미간을 찌푸렸다.

‘늦었어.’

하루 종일 고문을 받으며 중상도 많았고, 너무 피를 많이 흘리기도 했다.

풍백이 알기로 상산현에는 이러한 중태를 치료할 수 있을 만한 의원은 없었다.

“어때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유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풍백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늦었어. 이대로 놔두면 곧 숨을 거둘 것이다.”

“네? 그, 그럼 빨리 의원에게 데리고 가야……!”

“소용없어. 이 정도 부상이라면 강호에 신의(神醫)라 소문난 사람도 감히 확신할 수 없을 거다.”

“아…….”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총관을 바라봤다.

조유하가 백건상방과 왕래했던 사이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백건상방의 총관 정도 되는 사람이기에 그녀와도 일면식 정도는 있었다.

아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일은, 그리 친밀하게 지내던 사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큰 충격을 남겼다.

풍백은 그런 조유하가 스스로를 수습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었다. 당장 총관이 숨을 거두면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할 테니까.

“지금 손을 쓰면 그나마 죽기 전에 몇 마디는 들을 수 있다.”

‘대신 숨을 거두는 시간이 더 빨라지지만.’

뒷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강호초출은 이성적인 선택보다는 감성적인 선택에 흔들리는 경향이 컸다.

잔인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어차피 살아남을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단서를 얻는 것이 좋은 선택지였다.

‘그리고 총관이 죽든지 말든지 내 알바는 아니지.’

백건상방은 과거 적가상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말 집요하게 괴롭혔었다.

이번에는 매번 풍백에게 막혀서 역으로 곤란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총관이 나설 일은 없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가 적가상방을 찾아와 얼마나 닦달을 하고 패악질을 벌였는지 풍백은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는 곽자억과 함께 백건상방의 총관을 직접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 있었다.

지금은 마겁의 흉수에 이미 죽어 가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조유하는 풍백의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물었다.

“괜찮은 거예요? 혹시 총관님이 더 고통스럽거나…….”

“더 고통스럽지는 않겠지만, 이미 온몸이 상처투성이니 정신을 차리게 되면 아프기는 하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조금이라도 흉수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하지 않나?”

“그건 그런데…….”

쉽게 대답을 못하는 조유하의 모습에 풍백이 혀를 찼다.

“쯧쯧…… 강호에 출사표를 던지기 전에 마음가짐부터 제대로 잡도록 해야겠군.”

“…….”

“어차피 네 대답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알고 있으라는 의미였지.”

말을 마친 풍백은 곧장 총관의 혈도 이곳저곳을 빠르게 눌렀다.

그러자 총관의 몸이 마치 활처럼 휘며 신음성을 토해 냈다.

“끄으으응…….”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조유하가 소리쳤다.

“그, 그만해요! 뭔가 잘못된…….”

“잘못된 것 없다.”

풍백이 몇 군데 혈도를 더 건드리자 총관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힘겹게 눈을 떴다.

“눈떴다! 총관님, 저 기억하세요?”

조유하가 얼른 다가와 총관의 시야에 자신의 얼굴을 보였다.

희미한 눈빛의 총관은 조유하를 바라보고는 신음성 같은 목소리를 냈다.

“조…… 소저……?”

“네, 맞아요! 저 금호상방의 조유하예요!”

“여긴…… 어떻게…… 크윽…….”

자신의 몸 상태도 모르고 움직이려던 총관은 끔찍한 고통이 뇌리를 관통하자 입을 쩍 벌리며 신음을 토해 냈다. 비명을 지를 힘도 없었기에 신음을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유하가 그런 총관에게 뭐라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풍백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고 뒤로 슬쩍 당겨서 밀어냈다.

시간이 없었다. 근황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 유언을 하라고 지금 총관의 정신을 차리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백건상방을 공격한 놈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나?”

풍백의 날카로운 얼굴을 본 총관이 움찔했다.

그러나 이내 마겁의 무사들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다가 힘겹게 말했다.

“모…… 릅니…… 다…….”

“놈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총관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예상대로군.’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들을 숨기고 있던 마겁이다. 그런 마겁에 대해 총관이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게 더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그저 확인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놈들이 당신들에게 물어본 것이 뭐지?”

“의뢰…… 인…… 에 대해서 물어봤…….”

“의뢰인?”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무슨 의뢰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과거에도 우리 적가상방에 어떤 의뢰가…….’

기억할 리가 없었다.

당시의 풍백은 개망나니였으니 상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의뢰를 받았었는지 아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제는 그 과거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무슨 의뢰였나?”

“나는…… 몰…… 라……. 모두 방주가…….”

풍백이 이를 뿌득 갈며 곽자억의 시신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중요한 사항에 대해 말해 줄 당사자가 이미 죽어 버린 것이다.

겨우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총관은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이제 몇 마디만 더 나누면 숨을 거둘 것 같았다.

풍백은 서둘러 물었다.

“의뢰인이 누구지? 의뢰인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은 있나?”

그 물음에 총관은 지금까지 자신을 고문했던 놈들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꺼냈다.

“흉터…… 손목 안…… 쪽에 흉터가…….”

“흉터? 어떻게 생겼지? 왼손? 오른손? 흉터 크기는?”

그러나 대답을 해야 할 총관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파…… 어머…… 니……. 아파요…… 아버지…….”

눈동자의 초점이 사라져 가던 총관은 이 말을 끝으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조유하는 총관이 숨을 거두자 자신의 입을 가렸다. 눈 밑이 붉어져 오는 것을 보면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풍백은 그런 조유하와 달리 미간에 아주 굵은 선 하나를 만들고 있었다.

‘제기랄…… 조금만 더 버티고 얘기를 해 줄 것이지.’

분명 단서를 제공해 주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단서가 너무 포괄적이었다. 이 정도 단서를 가지고 누군가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후우…….”

풍백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눌러 앉혔다.

‘그래,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적어도 세 개의 단서는 얻었잖아.’

하나는 적가상방을 멸문시켰던 곳이 마겁이라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마도 멸문 당했던 이유가 모종의 의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의뢰인의 손목에 어떤 흉터가 있었다는 점.

부족하기는 하더라도 이 정도는 시작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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