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24화
대부분의 이들은 경공이 단순히 몸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수법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경공에도 많은 갈래가 있다.
몸을 가볍게 하여 빨리 움직일 수도 있고, 먼 거리를 크게 지치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할 수도 있고, 발을 한 번 구르는 것만으로 하늘 높이 치솟을 수도 있다.
벽호공(壁虎功) 역시 이런 경공의 한 축이다.
도마뱀처럼 벽을 타는 것을 뜻하는 벽호공은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경공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대로 특수한 분야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필수라고 할 수 있다.
벽을 타고 넘어야 하는 도둑이나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자객과 같은 부류였다.
진법에서 나온 풍백은 절벽을 타고 움직였다.
대단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저 두 손과 두 다리를 이용하여 지면을 엉금엉금 기듯이 움직이는 것이 바로 벽호공이었으니까.
신기한 건, 딱히 잡을 곳이 없다고 하더라도 풍백의 손과 발이 붙어 버린 것처럼 딱 고정된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바로 벽호공이었다.
소리도 없이 절벽을 타고 오른 풍백은 경계를 서고 있는 흑의인 중 하나의 위에서 머리를 지면으로 향하는 자세로 슬금슬금 기어오기 시작했다.
흑의인들은 풍백이 이렇게 절벽을 타고 기어온다는 걸 상상도 못했는지 여전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흑의인들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아직인가?”
“이제 곧 끝날 거야.”
“뭐 들은 거라도 있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잖아.”
“……그렇군.”
“이제 슬슬 정리하라고 할 테니 기다려 보자고.”
두 사람의 짧은 대화를 들으면서 풍백은 대충 상황을 유추했다.
‘비명 소리라는 걸 보면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고문까지 해서 무언가를 캐내려고 한다는 것에 풍백의 눈이 찌푸려졌다.
왜 과거에 적가상방이 멸문할 때는 납치된 사람이 없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답답하게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자세한 얘기는 잡아서 물어보면 되겠지.’
소리 없이 절벽을 기어 내려간 풍백이 흑의인 중 하나의 마혈과 아혈을 동시에 짚었다. 흑의인은 경악한 눈동자로 풍백을 바라봤지만, 아혈마저 제압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동료가 제압당한 것도 모르고 여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흑의인도 가볍게 제압에 성공한 풍백은 한쪽에 있던 작은 돌무더기를 툭 건드려 무너뜨렸다.
풍백이 무너뜨린 돌무더기는 환상진의 기점이었다.
기점이 무너지니 환상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만약 이곳에 펼쳐진 것이 고위 진법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보통 고위 진법은 기점이 여러 개이기도 하고, 기점으로 위장한 함정도 있기에 머리가 깨지도록 계산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다행히 이곳에 펼쳐진 환상진은 짧은 시간 동안만 자신들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진법이라 기점 하나를 무너뜨린 것만으로 충분히 파해할 수 있었다.
진법이 무너지면서 가려지고 있던 동굴과 풍백이 드러나자 숲속에서 조유하가 놀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아무래도 진법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 신기하기는 할 것이다.
[할 얘기가 있으면 전음으로 해.]
쓰러져 있는 흑의인들을 보고 조유하가 뭐라 말하려는 걸 눈치챈 풍백이 먼저 전음으로 말했다.
[이 사람들이…… 백건상방을 습격했던 흉수들인가요?]
[아마도.]
[아마도요? 확실하지 않다고요?]
[내가 대화를 나눠 본 것도 아니고, 심문을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확신을 하겠나?]
[그러면 바로 제압을 할 게 아니라…….]
[아까 전에 소저가 직접 말하지 않았나? 일단 제압하고 대화를 나누자고.]
[아, 그건…….]
어색하게 말하며 조유하가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흑의인들을 제압한 것에 대해 추궁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서 얘기를 꺼낸 것뿐이었다.
풍백은 동굴을 보며 물었다.
[같이 들어갈 건가?]
[당연히요.]
[그러면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약속해.]
[약속이요?]
[싸움이 벌어진다면 정말 온 힘을 다해 싸우겠다고.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말이야.]
풍백이 봤을 때, 조유하는 절정고수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실전을 경험한 것 같지 않았다.
명문정파 출신의 강호초출이 자신보다 몇 수 아래의 사파 무인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히 들어 볼 수 있었다.
팔 하나 잘리더라도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는 독종을 만나면 당황해서 어리둥절하다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것이다.
풍백은 조유하가 그런 식으로 목숨을 잃는 걸 바라지 않았다.
딱히 조유하가 마음에 들었다거나,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었다.
멸문을 막기 위해 자신이 여러 가지 간섭을 했지만, 적가상방을 습격했어야 했던 놈들이 백건상방을 멸문시켜 버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가 바뀌고 있다는 의미였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무기였다. 이걸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변화는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유하의 죽음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야 했다.
몇 년 후에 무려 검후라는 이름으로 강호에 등장할 여자였다. 이런 사람이 죽으면 대체 어떤 여파가 일어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조유하는 풍백의 말에 발끈하며 말했다.
[싸움이 일어나면 당연히 최선을 다할 거예요!]
[허리에 있는 검을 보면 검수인 것 같은데, 나하고 겨룰 때는 왜 장법을 사용한 거지?]
[당신이 이 정도 고수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라고요!]
[상대의 무공 수준을 추측하는 것도 실력이다. 그런 변명을 하다가 큰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으면 뭐라 말할 거지?]
[그, 그건…….]
[내가 네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었다면 아까 넌 죽을 수도 있었어. 적어도 팔 하나를 빼앗을 수 있었을 거다.]
조유하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미 풍백이 절정고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것이 절대 위협이나 허풍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사실 진짜로 풍백이 몇 수만에 그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얘기다. 확실한 건 풍백이 진심이었다면 선수를 빼앗기고 시작했을 거고, 실전 경험이 적은 그녀는 꽤 당황했을 거라는 사실이다.
사실 풍백이 하는 말은 그리 대단한 말이 아니었다. 이미 예전부터 사부인 범혜사태가 언제나 해 왔던 얘기들이었다.
그러나 풍백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 말들이 더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창피했다.
그래서 더 크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싸우게 된다면 절대로 손에 사정을 두지 않을 테니까!]
풍백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믿어 보지.]
말을 마친 풍백이 동굴로 들어서며 다시 말했다.
[안에 적들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 그러니까 최대한 기척을 숨기도록 해. 우리 기척이 들통나는 순간 지저분한 싸움을 해야 되니까.]
[알겠어요.]
꽤 결심이 담긴 듯한 대답과 함께 조유하도 동굴로 들어왔다.
동굴에 들어오는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동물의 누린내였다. 아마도 여기는 정말 곰이 살던 동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동굴로 점점 들어갈수록 동물 누린내에 섞인 다른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동굴 벽에 붙어서 소리 없이 걷던 조유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냄새…… 맡았어요?]
[그래.]
[무슨 냄새인지 알겠어요?]
[피 냄새.]
풍백의 대답에 조유하가 멈칫했다.
피 냄새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창피하기보다는 동굴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냄새가 난다는 사실에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안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동굴이 왼쪽으로 꺾인 것이 보이고, 그쪽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뭐라 말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누가…… 생김새…….”
뭐라 말하고 있기는 한데, 잘 들리지 않았다.
풍백은 슬쩍 한쪽 눈만 내밀어서 안을 살펴봤다.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두 사람이었다. 아니, 이걸 사람이라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갈기갈기 찢긴 넝마를 입고 온몸의 피 칠갑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은 마치 도축을 앞둔 짐승처럼 보였다.
찢긴 옷 사이로는 온갖 상처가 있었는데, 얼마나 고문을 받은 건지 이미 한 명은 죽은 것처럼 축 늘어져 움직임이 없었다.
그나마 한 명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데, 그마저도 곧 죽을 것처럼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곽자억은 이미 죽었군.’
총관만이 아직 살아 있었다.
이렇게 그나마 살아 있는 총관마저 곧 죽을 것 같아 보이는데, 흑의인들은 총관이 죽고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인두로 지지고 있는 중이었다.
‘다섯이라…….’
흑의인은 다섯 명이었다.
동굴 입구를 지키던 흑의인들은 이류무인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다섯 명은 정확한 무공 수위를 짐작하기 어려워도 모두 일류고수를 넘어선 것은 확실했다.
안쪽을 살펴보던 풍백은 새로운 향기를 맡았다.
울금향(鬱金香)의 향긋한 향취에 풍백이 고개를 돌리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조유하가 어느새 풍백의 바로 뒤까지 접근해 있었다. 고개를 기웃거리는 걸 보니 자신도 보고 싶다는 것 같았다.
[기다려. 내가 비킬 테니까.]
전음을 보낸 풍백이 벽호공을 사용하여 동굴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는 사이, 조유하는 풍백이 그랬던 것처럼 슬쩍 고개를 내밀어 안쪽을 살펴보았다.
그때였다.
재수 없게도 조유하가 고개를 내미는 것과 동시에 흑의인들이 그녀의 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병장기를 뽑으며 신속하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망할…….’
풍백은 그런 그들을 막기보다 오히려 천장에 몸을 밀착시키며 인기척을 지웠다.
눈앞에 훌륭한 미끼가 있었다. 아마 자신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조유하 역시 검을 뽑으며 분노가 가득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악귀 같은 놈들! 사람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혹한 짓을 벌일 수가 있어!”
이런 조유하의 비명과 같은 외침에도 흑의인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정해진 것처럼 다섯 사람이 반원을 그리며 조유하를 포위했다.
“죽이지 마라. 잡아서 어떻게 알고 왔는지 알아내야 한다.”
다섯 사람 중 하나의 말에 나머지 네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가 이 다섯 중에서는 가장 직위가 높은 것 같았다.
직후, 다섯 흑의인이 조유하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오히려 잘됐네.’
은신할 곳이 마땅치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다섯이면 은밀히 하나씩 처리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조유하가 앞에서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흑의인들은 아직까지 풍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한 명부터.’
벽호공을 거둔 풍백이 흑의인 중 하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풍백이 떨어지는 기척을 느낀 흑의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풍백이 그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헉!”
흑의인이 헛바람을 들이켜더니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풍백이 가볍게 손을 떨치자 그의 소매에서 단창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까강!
푹!
흑의인이 휘두른 검을 한 손에 들린 단창으로 막고, 다른 손에 들린 단창으로 흑의인의 요혈에 찔러 넣었다.
“컥!”
단창에 찔린 흑의인이 비실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장 죽을 수 있는 사혈(死穴)을 찌른 것이 아니지만, 요혈을 찔린 탓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동료를 쓰러뜨린 풍백을 보고 네 명의 흑의인이 움찔했다.
“네놈은 누구냐!”
흑의인의 외침에 풍백은 대답하지 않고 조유하에게 말했다.
“아까 말했지? 침착하게 온 힘을 다하라고.”
조유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흑의인 중 하나를 향해 곧장 달려들며 그녀의 진신절학인 팔만사천반야검형을 펼쳤다.
폭발하는 것처럼 화려하게 펼쳐지는 검영이 흑의인의 전신을 향해 쏟아져 갔다.
흑의인은 그 위세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다급하게 도를 휘두르며 막아 갔다.
단 한 수에 위기에 빠지는 동료를 보고 다른 흑의인이 조유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불과 두 걸음도 채 내딛기 전에 그를 향해 무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왔다.
쾌애액!
콱!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자 동굴 벽에 무언가가 박혀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풍백에게 달려들었던 동료의 검이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풍백이 그들 셋을 보며 히죽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희는 나하고 놀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