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22화
“당신…… 대체 누구시죠?”
조유하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풍백을 노려봤다.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자신을 알아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백건상방을 조사하러 나온 것은 단지 호기심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만약 범인을 찾을 수 있는 어떤 단서라도 찾는다면 정식으로 강호에 출도하기 전에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충동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서 너무나 의심스러운 사람을 만났다. 심지어 절대로 쉽게 볼 수 없는 고수였고.
그런 고수가 자신을 알아보고 있었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자신이 금호상방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는 것까지는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조유하는 이곳 상산현에서 제법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 보타암의 제자라 부른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할아버지인 금호상방주 조태명도 모르는 사실을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알고 있다니.
그런 조유하를 보며 풍백은 한마디 더 던졌다.
“범혜사태가 아직 정식으로 강호 출도를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몰래 혼자 빠져나온 건가? 이 사실을 범혜사태가 알게 되면 볼만하겠군.”
심지어 사부인 범혜사태의 이름까지 언급되자 조유하가 버럭 소리치려고 했다.
“당신 누구냐고 물……!”
“쉬잇!”
그렇지만 풍백이 검지를 입에 대는 것을 보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풍백의 말처럼 몰래 나온 자리였다. 허락도 없이 나온 것을 범혜사태에게 들키면 간단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고운 아미를 찡그린 조유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 대체 누구냐고 묻잖아요!]
전음으로 전해진 고함에 풍백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내 정체가 문제인가? 내가 알기로는 보타암의 제자가 정식으로 하산을 하거나 사부의 허락도 없이 외부에서 무공을 펼치고 다니면 징계 수위가 상당하다고 알고 있는데.]
[지,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건가요?]
[우리 말을 바로 하자고. 애초에 나를 범인 취급하며 잡아 놓고 얘기하겠다고 협박했던 것은 그쪽이 아니었나?]
[그, 그건…….]
[나는 사실만 말했을 뿐이지. 그쪽이 금호상방 사람이라는 것도, 보타암의 사람이라는 것도, 몰래 밤마실을 나왔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잖아.]
[좋아요! 그러면 내가 누군지는 이미 밝히셨으니, 당신이 누군지 밝히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건 곤란해.]
[흥! 그럴 줄 알았어!]
풍백의 말에 조유하가 손에 들린 검을 겨눴다. 무력으로 풍백을 제압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런 조유하를 보며 풍백이 조소하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뭐야? 나를 잡으려고?]
[못할 것 같나요?]
[당연히 못하지. 누가 상대를 해 주겠다고 했나? 내가 작정하고 도망치면 막을 수 있겠어? 이대로 금호상방으로 달려가 소리를 지르고 다닐 생각인데. 그러면 아마 그쪽이 밤마실 나온 일은 너무 쉽게 들키게 될걸?]
[다, 당신!]
무려 절정고수라는 사람이 제대로 싸우지 않고 뒤로 내빼겠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강호초출도 못한 그녀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조유하를 보며 풍백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 전음을 보냈다.
[그러니까 내가 얘기부터 하자고 했잖아.]
[이익…….]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겠는데, 나는 흉수가 아니야. 반대로 그 흉수를 쫓으려는 사람이지.]
[흥! 그런 입바른 말에 넘어갈 것 같아요? 원래 범인은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고…….]
[그러면 너도 범인인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내가 현장에 나타났기 때문에 범인이라는 말이잖아. 그러면 똑같이 현장에 나타난 너도 범인이라고 해야지.]
[내가 당신하고 같아요? 나는 당신과 달리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라고요!]
[내 신분이 확실하지 않다고 누가 그러는데?]
[다, 당신은 이름도 밝히지 않고……!]
[강호에는 오만가지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문파를 숨기고, 출신을 숨기고, 가족을 숨기지. 그러면 그들이 모두 의심스러운 사람이 되는 건가?]
[어…….]
[험한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 꽤 많은 사람은 자기 출신을 숨긴다. 그것은 모두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가족이 해를 입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야.]
풍백의 말에 조유하는 뭐라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간혹 범혜사태가 해 주는 강호 이야기에서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 말해 주기 힘들고, 그냥 내가 북경(北京)에서 왔다는 것만 알아 두면 되겠군.]
그 말에 조유하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북경에서 왔다는 말은 은어라고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너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심지어 강호초출도 아닌 조유하마저 풍백의 말을 알아들었을 정도니까.
북경을 거점으로 하는 곳은 오직 단 하나뿐이다.
바로 황궁이다.
조유하는 여전히 눈을 커다랗게 뜨고 더듬거리며 전음을 보냈다.
[어…… 어사(御史)?]
[기왕이면 어사님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호, 호패를 보여 주세요!]
[그럴 수는 없지. 호패를 보면 내 신분을 알아챌 수밖에 없잖아. 사정이 있어서 정확한 신분을 말해 주기는 곤란해. 그러니 이제 그만하는 것이 어떨까?]
호패가 없다는 말에 조유하의 눈이 다시 의심으로 물들었다.
[왜 호패를 보여 주지 못하는 건데요?]
그런 조유하를 풍백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호패를 보면 내 신분이 순찰어사(巡察御史)인지, 균전어사(均田御史), 감진어사(監賑御史)인지 들통난다는 걸 모르나? 내가 정확한 신분을 알려 주기 힘들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그런 머리로 그 수준까지 무공을 익히다니 대단하군.]
잔뜩 비꼬는 풍백의 말에 조유하가 발끈했지만 뭐라 말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호패를 보고 어사의 신분을 알아낼 수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말 몇 마디에 수긍하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좋아요. 당신이 흉수가 아니라고는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의심을 거둔 건 아니에요. 정말 당신의 말대로 흉수를 쫓는 것이 확실한지 확인을 하겠어요.]
[나를 따라오겠다는 건가?]
[당연히 그래야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한다면…….]
조유하는 진심이라는 것처럼 달빛에 예리한 검날을 비췄다.
피식 웃은 풍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상관하지 않도록 하지.]
[옆에 가만히 있기만 할 거예요.]
그러고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조유하가 풍백과 일정 거리 떨어져서 섰다.
풍백은 그런 조유하를 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들었던 조유하는 완성된 무인이었다. 강력한 무공과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결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의지까지.
그런데 지금 풍백의 눈앞에 있는 조유하는 완전히 무공만 강한 애송이였다. 그래서인지 이런 조유하의 모습은 꽤나 신선했다.
‘귀찮긴 하지만, 여차할 땐 도움이 되겠지.’
금호상방주의 손녀이자, 절정고수인 조유하다. 당장은 다소 귀찮긴 하나, 흉수를 쫓는 과정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풍백은 다시금 눈빛을 빛내며 주변 수색에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렸다.
‘쓸 만한 건 없어.’
아쉬웠다.
백건상방의 흉사에 대해 관부가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확인했다면, 확신할 수는 없어도 지금보다는 충분히 많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막다른 곳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백건상방의 부지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나마 하루가 지나고 관부의 사람들이 헤집고 다녀서 덮어진 것이 지금 상태인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당장 어제 흉사가 벌어졌을 때는 이곳이 피바다나 다름없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피바다와 같은 곳에서 움직이고 다녔을 테니, 물을 밟고 서 있을 수 있다는 무력답수(無力踏水)나 물을 밟으며 걸어 다닌다는 등평도수(登萍渡水)를 펼치지 않은 이상 그 피바다를 발로 밟고 다녔을 것이다.
참고로 무력답수나 등평도수는 정말 어마어마한 고수나 경공을 극에 달하도록 수련한 사람이나 펼칠 수 있는 수법이었다.
아무리 혈겁을 펼쳤던 놈들이 고수라고 하지만, 이런 수준의 무공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예상했던 상태니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겠네.’
가볍게 혀를 찬 풍백이 품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사발과 작은 유리병 몇 개를 꺼냈다.
풍백이 사발에 유리병에 담겨 있던 물약과 가루약을 조금씩 배합하는 걸 본 조유하가 슬쩍 다가와 지켜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죠?”
“방해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겠다고 하지 않았나?”
무뚝뚝한 풍백의 대답에 조유하가 울컥한 표정을 지으며 뭐라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풍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추적용 시약이다.”
“……그게 뭔데요?”
“흉수들은 아마 피투성이인 바닥을 밟고 다녔겠지. 그러니 놈들의 발자국에 혈흔이 남아 있을 거야.”
“밟았다고 하더라도 어제 있었던 일인데 남아 있겠어요?”
“그래서 눈으로 찾아보기 힘드니 시약을 만드는 거잖아.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시약이 뿌려지면 반응할 거다.”
“그러면 오늘 관부 사람들이 나와서 밟고 다닌 건 어떻게 하고요?”
“말했듯이 그래서 시약을 만들잖아. 아무 흔적이나 마구잡이로 반응하도록 만들지 않으려고.”
핏자국에 반응하도록 만드는 시약은 생각보다 흔하다. 당장 암시장에 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배합에 따라 하루가 지나거나 반나절만 지난 흔적만 반응하도록 만드는 시약은 없었다.
이런 시약은 아직은 나오지 않았고, 몇 년 후에나 나오게 된다. 그나마도 풍백처럼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배합법을 알고 있어서 공공연하게 쓸 수 없었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점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조유하의 모습에 풍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얼굴 좀 치우지?”
“구경 좀 할게요. 들어 보니 엄청 대단한 것 같은데, 이렇게 어깨너머로 배우면…….”
“후우…… 강호초출이라 대충 이해를 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뭐가요?”
“네 말대로 대단한 기술인 것 같다면, 이 배합법이 비전(祕傳)일 거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거지?”
“앗! 아…… 미, 미안해요.”
풍백의 말에 깜짝 놀란 조유하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설마 이런 시약을 만드는 것도 비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강호의, 특히 명문정파에서는 조유하와 같은 사람들이 은근히 많았다.
무공은 비전이라거나 비인부전(非人不傳)을 언급하며 철저히 숨긴다. 심지어 연공하는 장면만 목격해도 죽인다고 달려든다.
그런데 무공이 아닌 이런 시약을 만들거나 환약, 기관 등을 만드는 기술에 대해선 비전이라곤 생각지 못하곤 했다.
풍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강호초출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은 스승이나 선배들이 문제지.
적당히 배합을 끝낸 풍백이 사발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조유하가 멈칫 했다가 풍백에게 물었다.
“이제 가까이 가서 구경해도 되나요?”
“……그러든지.”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조유하가 다시 다가왔다. 물어보고 다가오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인성이 글러 먹지는 않은 것 같았다.
조유하는 반짝이는 눈으로 풍백의 손에 들린 사발을 보며 물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요? 붓에 묻혀서 의심스러운 곳에 바르고 다니는 건가요?”
“그렇게 해서 언제 다 바르고 다니나?”
“그러면요?”
“이렇게 하는 거지.”
풍백이 사발을 입 앞으로 가져가더니 바람을 훅 불었다.
원래 이렇게 바람을 불면 물방울이 덩어리져서 주위에 조금 떨어지고 말아야 했다. 그러나 풍백이 바람을 불자 전혀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화아악!
사발에 담겨 있던 시약이 세밀한 물안개처럼 변하더니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와아…….”
조유하는 이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대충 내공을 사용해서 이렇게 만든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 어떻게 한 것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것도…… 비전인가요?”
“알면서 왜 묻나?”
면박과 같은 대답을 들으면서도 조유하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왜냐하면 안개처럼 퍼져 나간 시약이 장내를 가득 뒤덮으며 사방에 발자국이 은은한 빛을 내며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풍백은 빠르게 발자국을 살펴보다가 한쪽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백건상방에서 혈겁을 일으킨 자들이 철수하는 경로였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