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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21화 (121/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21화

뒷골목 하오문을 떠난 풍백이 향한 곳은 백건상방이었다.

백건상방은 적막했다.

단순히 모두 잠들어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 적막하다는 것이라 하기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수십 명의 사람이 죽었기 때문일까?

백건상방의 적막함에는 서늘한 무언가가 함께하고 있었다.

백건상방에 도착한 풍백은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상방 외부를 돌아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그리고 풍백은 이내 자신이 찾던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을 반짝였다.

‘역시…….’

풍백이 찾은 것은 담벼락 아래에 아이들이 흙장난하다가 모아 놓은 것처럼 쌓여진 작은 돌무더기였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지만 수십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가는 동안 주변에 알아차린 사람이 아무도 없다?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려면 수십 명의 사람이 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암살을 해서 죽이거나, 독을 쓰는 등의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과거 적가상방이 멸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풍백은 이런 생각을 못했었다. 당시의 그는 그저 누구에게나 손가락질을 받던 아무런 능력도 없는 개망나니였을 뿐이니까.

그러나 이후 멸문 당시를 떠올리며 많은 고민을 했었다.

수십 명의 사람이 죽어 가며 지르던 비명은 지금까지도 악몽으로 남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누구도 들었다는 사람이 없는 걸까?

풍백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진법(陣法)이다.

본래 진법은 군부대가 진을 치는 것을 말하거나, 적과 싸우기 위해 배치하는 모양새를 말한다.

그러나 강호에서 말하는 진법은 그와 달랐다.

주역(周易)과 팔괘(八卦)를 기반으로 하여, 성복서의 원리를 이용하여 도술(道術)과 같은 조화(造化)를 부리는 방법.

이것이 바로 강호에서 말하는 진법이다.

풍백은 진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진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 직접 펼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진법이라는 것을 무인이 무공을 배우는 것처럼, 그에 마땅한 노력을 들이고서야 펼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진법을 펼치지는 못해도 알고 있기에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환상진(幻像陣)의 일종이야.’

정확하게 어떤 이름을 가진 진법인지는 알 수 없다. 강호에 온갖 무공이 있는 것처럼 진법에도 무수히 많은 종류의 진법이 있다.

풍백이 알아볼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환상진의 일종으로 밖에서는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도록 만들고, 안에서 일어나는 소란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

두 번째는 이 진법이 그리 대단한 진법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진법을 펼친 진법술사가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수없이 많은 고수를 거느리고 왔으니, 굳이 고위 진법을 펼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위 진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준비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문파도 아니고 겨우 상방 하나를 멸문시키려 수십의 고수가 몰려왔다. 진법은 그저 이목을 가리는 수준이면 충분했으리라.

가볍게 혀를 찬 풍백이 돌무더기를 무너뜨렸다.

이미 진법은 없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굳이 돌무더기를 무너뜨린 건 괜히 입맛이 씁쓸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풍백은 가볍게 지면을 박차고 백건상방으로 들어갔다. 백건상방을 조사하던 관부의 사람들은 모두 철수한 이후였다. 그러니 굳이 몸을 숨기며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달빛이 비치는 백건상방의 모습은 처참했다.

사방에 뿌려진 마른 핏자국과 고여 있는 피 웅덩이.

시체만 없을 뿐이지 사방에 뿌려진 핏자국은 당시 백건상방이 인세의 지옥과 같은 풍경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특히 풍백은 피가 뿌려진 모양, 바닥에 남아 있는 발자국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이 그림처럼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후욱…….”

풍백은 주먹으로 복부를 맞은 것처럼 허리를 접으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는 잊고 싶은 과거 적가상방이 멸문하던 모습이 현재 백건상방의 모습과 겹쳐지며 환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사람들.

그런 가족과 친구를 구하기 위해 막아서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을 가축 도살하는 것보다 더 무감각한 눈으로 살육하는 흑의인들.

백가상방의 사람들 대신 적가상방에서 잘 자고 있을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으득!

풍백은 이를 악물었다.

배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풍백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치솟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드디어 과거 적가상방을 멸문시킨 놈들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은 분노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었다. 냉철하게 적을 쫓아야 할 시간이었다.

숙였던 허리를 편 풍백이 싸늘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은 여전히 온통 피로 범벅된 상태였지만, 아까처럼 역겨운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알싸한 분노만 자리할 뿐이었다.

무언가 단서가 없을까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생각했던 것처럼 유의미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기에 풍백은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일단…… 곽자억의 거처 쪽으로 가 볼까?’

곽자억과 총관의 시체가 없다고 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분명 풍백이 경험했던 과거에서는 누군가를 살려서 데리고 간 적이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숨 쉬는 모든 것을 쓸어버렸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없을까?

분명한 건 일부러 시체를 숨기는 짓을 벌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빨리 추적할 수 있다면…… 곽자억이나 총관이 죽기 전에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사실 곽자억이나 총관이 죽든지 살든지 풍백은 아무런 상관없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백가상방은 풍백에게 적이었다. 적가상방을 멸문시킨 곳은 다른 곳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적가상방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무너뜨린 당사자였으니까.

풍백은 왜 그들을 살려서 데려갔는지, 그들이 알고 있는 건 무엇인지가 궁금한 뿐이었다. 그것만 알아낸다면 어떤 식으로 죽든지 관심도 없었다.

곽자억의 거처가 있는 내원도 온통 말라 가는 피투성이였다. 과장을 조금 더하자면, 바닥이 온통 피로 뒤덮여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곽자억의 거처로 들어온 풍백은 의외로 뿌려진 피도 적고 깔끔한 모습을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백건상방의 무사들이 곽자억의 거처로 오기도 전에 모두 도륙당했을 것이다.

아까 봤던 보고서에 따르면 곽자억과 사돈 관계인 풍운표국의 국주도 이곳에서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피는 아마 풍운표국주가 죽으며 뿌린 핏방울일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곽자억을 포획했다면 어떻게 움직였을까? 굳이 백건상방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에 한 손 더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쐐애액!

적들의 동선에 대해서 고민하던 풍백은 무언가 살벌한 파공음을 내며 날아오는 걸 느끼고 슬쩍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그러자 그의 머리가 있던 부분으로 어린아이 주먹만 한 돌멩이가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남아 있는 적…… 일 리는 없겠지.’

적들의 목표는 백건상방이었고, 목표 처리를 완료했다.

그런데 백건상방에 남아서 자신들을 추적할지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들에겐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고개를 돌린 풍백은 표표히 경공을 뽐내며 지면에 내려서더니, 그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대체 이 여자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지면에 내려선 사람은 다름 아닌 미래의 검후가 될 금호상방의 조유하였다.

이전에 봤던 궁장이 아닌, 움직이기 편한 경장을 입고 허리에는 검까지 패용하고 있는 모습이 제법 그럴듯한 여류 무인처럼 보였다.

조유하는 풍백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뭔가 득의양양함이 풍기고 있었다.

‘역시 사부님 얘기가 맞았어. 범인은 항상 범죄 현장에 나타난다고 하셨지?’

아무도 없을 시간에 무언가를 살펴보고 있던 풍백이 당연히 백건상방을 멸문시킨 자들과 한패라고 생각한 것이다.

전형적인 강호초출(江湖初出)의 편협한 시선이었다.

풍백은 짐짓 처음 보는 사람과 만난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냐?”

조유하는 크게 소리칠 것처럼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걸 본 풍백이 먼저 말했다.

“소리칠 생각인가? 관부하고 드잡이를 벌이고 싶은 모양이군.”

“아…….”

당장 이곳을 지키고 있는 관부의 사람들은 없었지만,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면 누군가 관부에 신고를 넣을 가능성이 컸다.

조유하는 그대로 숨을 내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인가요?”

“무슨 소리지?”

“이곳에서 벌어진 혈사를 벌인 사람이 당신이냐고 물었어요.”

어느 정도 의심스럽다는 건 인정할 수 있었다.

바로 어제 끔찍한 혈사가 벌어진 이곳에서 아무도 없는 야밤에 무언가를 찾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꽤나 의심스럽다는 건 인정하니까.

그러나 단지 이것만으로 흉수 중 하나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무슨 착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조금 상식적으로 생각하도록 해.”

차가운 풍백의 말에 고운 아미를 상큼하게 올린 조유하가 짐짓 냉철해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쉽게 인정하지는 않을 줄 알았어요.”

“뭐?”

“자세한 얘기는 일단 잡아 놓고 말하도록 하지요.”

“잠깐, 얘기를 먼저…….”

“문답무용(問答無用).”

싹둑 말을 자른 조유하가 유려한 보법을 펼치며 풍백에게 달려들었다.

‘망할 놈의 강호초출…….’

사람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는 전형적인 강호초출의 모습에 풍백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빠르게 풍백에게 접근한 조유하는 검을 뽑지 않고 장법을 펼쳤다.

보타문이 검후로 인하여 검법이 유명하지만, 사실 장법으로도 강호일절이라 말하기 충분했다.

조유하가 풍백에게 항마수미신장(降魔修彌神掌)을 펼쳤다. 그러자 불가무공 특유의 묵직한 일격이 풍백을 덮쳐 갔다.

“쯧…….”

가볍게 혀를 찬 풍백이 조유하가 펼친 장력을 난화보로 피하며 그녀와 간극을 좁혀 갔다.

조유하는 이런 풍백의 움직임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곧장 항마수미신장의 절초인 복마앙불(伏魔仰佛)을 펼치며 위에서부터 눌러 갔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겠다는 듯 조유하가 펼친 일장에 주먹을 날렸다.

뇌공권(雷公拳)이라는 이 권법은 군부에서 배운 것으로, 이름처럼 강력한 내공과 빠른 속도가 일품인 권법이었다.

퍼퍼펑!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세 번 들리고, 조유하가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렇지만 풍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조유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건 조유하가 밀린 것도 아니었다.

풍백은 조유하의 장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걸 알아봤다. 그렇기에 그녀가 펼친 일장에 제대로 힘이 실리기 전에 부딪치는 걸 선택한 것이다.

‘쳇!’

이것은 조유하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장법이 허점을 제대로 공략당했다는 것부터 대단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서 투지가 번뜩인 조유하가 검을 뽑았다. 이제 제대로 싸워 볼 생각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풍백은 이렇게 계속 싸울 생각이 없었다.

‘굳이 강호에 소문이 자자했던 보타암의 팔만사천반야검형을 체험할 필요도 없고.’

단 한 번의 충돌로 서로가 서로의 무공 수준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조유하 역시 절정고수였다.

두 사람이 제대로 싸우게 된다면 결코 그 싸움은 한두 초식을 나누는 정도로 끝날 수 없었다.

그리고 싸움의 여파로 그나마 남아 있는 흔적들마저 휩쓸려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일이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풍백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지, 금호상방의 조유하 소저?”

“……어?”

“아니, 보타암의 제자라고 불러야 하나?”

풍백의 말에 조유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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