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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18화 (118/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18화

백건상방은 조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산현에서 가장 오가는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곳으로 정평이 났던 백건상방이다. 싼 가격에 물건을 받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싸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백건상방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문이 부서질 듯이 밀어닥치던 사람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날아다니던 새조차 피하게 만들던 시끄러운 사람 소리는 적막한 침묵으로 바뀌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으스스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 백건상방의 모습은 적가상방이 망해 가던 때와 놀랍도록 똑같았다.

“사, 상방주님.”

총관이 조심스레 부르자 곽자억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히익…….’

핏발이 곤두선 눈동자에는 오직 시린 독기만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흔히 사람들이 귀기(鬼氣)라고 부르는 기운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총관은 이런 신음성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노력했다. 지금 곽자억에게 괜한 자극을 주면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서 찌를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총관에게 곽자억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냐.”

“상현다루에서 연락이 왔는데…….”

“왔는데?”

“……기존에 맺었던 계약은 미안하지만 파기해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하면서…….”

“개잡놈의 새끼들.”

곽자억은 싸늘하게 욕을 내뱉었다. 그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은 지옥의 겁화처럼 보였다.

“내 앞에서 찻잎 하나만이라도 팔아 주면 감사하다고 말하던 놈들이 이제는 등을 돌려? 더러운 개자식들. 대가리부터 아작아작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원래 곽자억은 화나면 고함을 지르고 주변의 기물을 박살 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욕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총관은 오히려 지금의 곽자억이 더 무서웠다.

이전에는 그저 개가 시끄럽게 짖는 것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기 직전처럼 보였으니까.

‘대체 우리 백건상방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백건상방이 이번 일로 인하여 흔들리기는 하더라도, 용정차가 있는 이상 상방 전체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용정차는 대단히 비싼 물건이었다. 그러니 다른 물품을 하나도 팔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용정차만 판매가 원활하다면 백건상방에 문제가 생길 일이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잠시 멀어졌던 거래처도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적가상방이 서문세가에서 용정차를 받아 오기로 계약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심지어 백건상방이 고급 용정차까지 취급했던 것을 뛰어넘어, 소량밖에 생산되지 않는다는 최고급 용정차까지 취급하고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고급 용정차는 가격도 가격이지만, 워낙 희소성이 강해 고관대작(高官大爵)이나 그에 비견하는 사람들도 숨겨 놓고 먹는다는 물건이었다.

크게 신뢰하는 거래처에만 판다는 최고급 용정차를 어쩌다가 적가상방이 받을 수 있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어떻게 받아 왔는지 알게 무엇인가?

그렇게 귀하다는 최고급 용정차를 마셔 볼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백건상방과 아직까지 거래를 하고 있던 다루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체결되어 있던 계약을 파기하자고 몰려왔다. 계약을 파기하면 수배에 해당하는 위약금을 물어내야 하는데도 누구 하나 물러서는 곳이 없었다.

당연했다. 지금 최고급 용정차를 얻어 내지 못한다면 다루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니까.

비록 적가상방이 백건상장과 계약을 취소하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은 없었지만, 이미 두 상방 사이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알아서 계약을 파기하려고 몰려온 것이다.

상현다루는 백건상방과 가장 오랫동안 거래를 해 왔던 다루였다. 그렇기에 단순한 거래 관계를 넘어 거의 동업자와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현다루 역시 계약 파기를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점차 단골손님이 다른 다루로 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이제 백건상방과 계약이 유지되고 있는 다루는 단 한 군데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계약 파기가 이어지며 백건상방에 제법 현금이 쌓였다는 건데…… 큰 의미는 없었다. 말이 상방이지, 지금 백건상방의 점포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팔리지 않고 있으니까.

상방이 상방이라 불리려면 물건을 판매하든지, 아니면 상행을 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건상방은 이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처음에 얘기했듯이 이 모습은 적가상방이 청해상방과 백건상방에 의해 망해 가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핏발이 가득한 눈으로 어딘가를 노려보며 중얼거리고 있는 곽자억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곽자억에게 아직 한 가지 더 보고할 것이 남은 총관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포탄을 손에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꿀꺽!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킨 총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 한 가지 더 보고할 것이 남았습니다.”

“왜? 또 누가 계약을 파기하자고 해? 아직도 계약 파기를 안 한 곳이 남기나 했나?”

독기가 가득한 목소리의 곽자억이 비꼬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총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몸이 굳어 버렸다.

“청해상방에서 드디어 연락이 왔습니다만…….”

“……이제야 연락이 왔다고?”

일방적으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모든 지원을 끊었던 청해상방이다.

지금까지 곽자억이 시행했던 가격 싸움은 모두 청해상방을 믿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청해상방이 뒤로 빠지면서 더 이상 가격 싸움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 결과, 소금 전매권과 용정차를 가져온 적가상방의 공세에 지금 백건상방은 현판을 내리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었다.

심지어 금호상방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백건상방과 계약된 거래처를 압박했던 일도 있었다.

이건 억울하지도 않았다. 당연한 조치였다.

가격 싸움을 하면서 금호상방을 대놓고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적가상방 다음은 금호상방이라는 마음에 간접적인 피해를 볼 수 있는 걸 알면서도 가격을 내렸으니까.

오히려 이 정도 수준으로만 압박하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하다못해 관부를 움직여 압박했으면 지금 이미 현판을 내렸든지, 아니면 곽자억이 잡혀 갔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백건상방이 박살이 나는 걸 알면서도 청해상방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말 더 이상 지원은 없는지 아무리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렸던 청해상방의 대답이 이제야 왔다니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혹시나 백건상방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을 해 주지 않을까 기대감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뭐라고 연락이 왔지? 지원금을 다시 보내 줄 수 있다고 하나?”

“그게 아니라…… 이제 더 이상 지원은 해 줄 수 없다고…….”

혹시나 했을 뿐이지 정말로 지원금을 보내 줄 테니 다시 시작하자고 말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기대를 했기 때문인지 이제 지원은 없다는 말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게 전부야? 다른 말은 없어? 하다못해 지원을 중단하는 이유도 없어?”

“그, 그런 건 없습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뿌드득!

곽자억이 요란하게 이를 갈았다.

만약 청해상방이 아니었다면 가격 싸움 같은 건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쩌면 지금 이렇게 백건상방 자체가 무너져 가는 상황이 닥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총관은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제, 제가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청해상방 상황을 조금 알아봤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얘기로는 현재 청해상방 역시 엄청 곤란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어떤 미친놈들이 청해상방의 상행을 습격하고, 청해상방의 점포는 물론이고 본점에도 불을 지르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도 죽이고 다닌다고…….”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놈들 역시 사정이 있으니까 욕도 하지 말라는 말이야!”

“그, 그게 아니라…….”

지금 곽자억은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당장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만든 백건상방이 손쓸 대책도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해상방의 입장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청해상방이 천재지변으로 몰살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곽자억은 청해상방주 문태성의 조상님까지 욕을 할 수 있었다.

“네가 이렇게 멍청하니까 상방이 이 모양이지! 대체 너는 총관씩이나 되어 가지고 하는 게 뭐야? 상방이 무너지면 너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상방이 무너지는 순간 네놈도 죽는 거야! 알겠어?”

“히익……!”

기겁을 하는 총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곽자억이 다시 중얼거렸다.

“이대로 무너질 줄 알아? 웃기지 마. 난 다시 살아난다. 다시 살아나서 상산현을 불사르고 말겠어!”

이렇게 악에 받친 것처럼 고함을 치는 곽자억이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정상적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상산현에서 더 이상 버틸 수는 없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지금 움직여야 해. 절강성 어딘가에서 다시 시작하든지, 아니면 다른 성이라도…….’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며 향후 살아남을 방법을 생각하던 곽자억의 눈에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총관이 눈에 들어왔다.

오히려 먼저 살아남을 계책을 말해야 할 총관이 저러고 있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하고 있어! 어서 방법을 생각해 오란 말이야! 그러고 있을 거야?”

“예, 예! 아, 알겠습니다!”

총관이 엉겁결에 대답하고 후다닥 방을 빠져나왔다. 총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제기랄…… 대체 무슨 방법을 생각해 오라는 거야? 이미 손발이 다 잘려서 방법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는데!’

이런 말을 면전에서 할 수는 없었다. 아마 대답 대신 벼루가 날아올 테니까.

정말 곽자억에게 벼루를 맞고 죽기 전에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나 고민하며 돌아선 총관은 무언가 희끗한 것이 눈앞에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천천히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누군가의 손목이었다.

‘흉…… 터…… 인가…….’

퍽!

“여기서 자빠져서 뭐하는 거야!”

“억!”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때리는 충격에 총관이 눈을 떴다. 그런 그의 앞에는 곽자억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사, 상방주님?”

“어서 일어나지 못해?”

“네, 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총관은 일단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는 자신이 곽자억의 집무실 바로 앞에 쓰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으나 곽자억의 불호령이 먼저 터졌다.

“당장 제일 입이 무거운 행수 하나를 데려와!”

“네? 행수를요?”

“내가 행수라고 했잖아! 정신 못 차려?”

“예, 옙! 알겠습니다!”

“그리고 풍운표국에 요청해서 제일 강한 놈들로 엄선해서 데리고…… 아니, 표국주가 직접 오라고 해!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최선을 다할 생각을 하라고 하고.”

총관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곽자억이 어째서 그러한 지시를 내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장 상행이 없는데 무슨 일을 준비하라는 것인지도.

“무슨 일인지 말씀을 좀…….”

“이 멍청한 놈! 우리 상방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거니까, 닥치고 가서 시킨 일이나 하라고!”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의문을 제기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려던 기억을 얼른 털어 버리고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관이 떠난 이후 곽자억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반짝이는 눈으로 무언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적가상방이 다시 살아난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미소였다.

그리고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시각에 검은 피풍의를 입은 사람들이 소리도 없이 상산현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마치 검은 파도처럼 백건상방의 벽을 넘어갔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짙은 혈향을 풍기며 다시 벽을 넘어 나왔다.

상산현에서 누구도 이들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누구도 어떤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도 없었다.

백건상방의 변고를 아침이 될 때까지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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