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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17화 (117/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17화

적가상방이 준비했던 잔치는 끝났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적가상방은 전쟁과 같은 회의가 매일같이 이어졌다.

일단 가장 먼저 서문세가와 용정차에 관련된 회의를 시작했다.

서문표가 풍백과 먼저 이야기를 나눴는데, 서문표는 용정차에 관한 얘기를 하며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서문세가주 서문자건의 서신이었다.

서신에는 자신이 들어주기로 했던 부탁을 언급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풍백에게 의외였다.

물량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굳이 풍백이 약속했던 부탁 두 가지 중 하나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적가상방이 취급하는 상품 중 찻잎이 차지하는 비율은 낮고, 취급하는 찻잎의 수준도 그리 좋은 품질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상급 용정차를 취급하는 것은, 아직 제대로 된 판로가 없다고 하더라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풍백은 아마도 이것이 서문세가주의 자존심이지 않을까 싶었다. 미래가 창창한 적가상방이지만 굳이 분류를 한다면 아직은 군소 상방에 들어가는 적가상방이니까.

서신을 모두 읽은 풍백은 곧장 서문표를 데리고 적호경과 진덕양을 찾아갔다.

그리고 회의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백건상방은 현재 쥐 죽은 듯이 지내고 있었다.

이전처럼 가격으로 장난질을 치지도 못하면서 급격히 불어났던 거래처가 아침 햇살에 녹아내리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제 소금까지 손아귀에 쥐게 된 적가상방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기존에 백건상방에게 공급을 받고 있던 물품조차 모두 적가상방으로 돌리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사실 적가상방에서는 딱히 백건상방을 견제하거나 찍어 내기 위해 움직인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미 승자와 패자가 결정된 것처럼, 알아서 백건상방과 거래를 끊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백건상방이 계속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독점하다시피 가지고 있던 용정차 덕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 적가상방이 용정차를 가져올 수 있다면?

‘드디어 엿 같은 백건상방을 박살 낼 수 있다는 말이 되겠네.’

적가상방은 백건상방에게 많은 고통을 받아 왔다. 그렇기에 적호경과 진덕양 역시 백건상방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적호경과 진덕양은 백건상방을 적당히 징치(懲治)하는 수준으로 상황을 넘어가려 했다. 이미 백건상방이 손댈 필요도 없이 몰락할 만큼 몰락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백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은 달라질 수 있지.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단 말이야.’

풍백은 변수 요소가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적이라 판단을 내리면 빠른 시일 안에 제거하는 것이 진리라고 훈련을 받아 왔었다.

무엇보다 곽자억의 본성이 얼마나 치사스럽고 더러운 놈인지 충분히 알고 있기도 했다.

만약 지금 백건상방을 완전히 찍어 내지 않고 놔뒀다고 해서 적가상방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질 놈이 아니다. 아마 다시 백건상방이 살아나게 된다면 다시 한번 적가상방을 박살 내려고 눈이 돌아갈 놈이었다.

이런 놈이 변하길 바라며 자비를 베푼다?

풍백은 그런 자비를 베풀 정도로 물렁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곽자억은 사람이 변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데 왜 그런 자비를 베풀겠나?

서문세가의 용정차를 계약하면 가장 먼저 백건상방을 찍어 낼 생각이었다. 적호경과 진덕양이 반대를 한다면 설득을 해서라도 말이다.

이렇게 적가상방과 만족할 만한 계약을 체결한 서문표는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서문세가를 향해 출발했다. 서문세령은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풍백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떠났다.

서문세령은 적가상방에 머물면서 이번에도 풍백과 그리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녀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고 있는 남궁진 때문이었다.

얼마나 두 사람이 붙어 다녔는지,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문세령과 남궁진이 정분난 것 아니냐는 말이 들려올 정도였다.

풍백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서문세가와 남궁세가의 혼인이라면 아마 강호를 제법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다. 정파의 명문세가 자제가 혼인을 하는 것이니 당연했다.

아직도 왜 서문세가가 무너졌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문세가와 남궁세가의 혼인이 이뤄진다면, 적어도 서문세가가 이전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아마도 싱글벙글 웃으며 서문세령의 뒤를 따라가는 남궁진의 모습을 보면,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세가의 혼인 얘기가 들려오지 않을까 생각하는 풍백이었다.

이것만이 아니라 각종 상방이나 몇몇 강호 문파에서 소금 및 몇몇 품목에 대한 구입에 관련하여 회의가 계속 되어 갔다.

상방 일에 관련된 것은 전적으로 적호경과 진덕양이 꾸려 가는 일이다. 굳이 풍백이 이 회의에 참석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은 충분히 풍백보다 전문가였으니 말이다.

대신 풍백은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만 떠나겠다는 얘기를 하려고 만나자고 했다.”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의 유금성이 유설화를 대동하고 나타나 풍백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두 사람의 차를 따르고 있던 풍백은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당연히 두 사람이 떠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곳에 찾아와서 딱 열흘 후에 떠난다고 못을 박듯이 말했었으니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기대를 했던 건, 열흘 만에 떠난다던 유금성이 오늘까지 무려 보름이나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적가상방에 보름이나 머문 것은 의외로 주약란 때문이었다.

유설화와 주약란은 불과 며칠 만에 친자매처럼 친해져 버렸다. 그 모습에 원래라면 진작 떠났어야 할 유금성이 며칠 더 머문 것이다.

풍백은 그냥 이렇게 유금성이 적가상방에 머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유금성은 떠나기로 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 앞에 찻잔을 내밀며 물었다.

“꼭 떠나셔야 합니까? 유 소저도 이곳이 꽤 편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냥 적가상방에 의탁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요.”

풍백의 말에 유설화가 반짝이는 눈으로 유금성을 바라봤다. 유설화는 적가상방이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제는 너무 친해진 주약란도 있었고.

“우리 약속은 딱 열흘 동안만 적가상방에 머무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도 기억합니다. 그래도 굳이 떠날 이유가 없다면 이곳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겁니다.”

“여기서?”

“괜찮지 않습니까? 저희 적가상방에 의탁하시면서 무사들을 통솔하는 대주(隊主)를 맡아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지금 풍백은 은근히 유금성을 떠보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제안은 진심이었다.

이전처럼 유설화를 찾기 위해 좌충우돌(左衝右突)하지 않아 지금은 아직 제대로 된 별호도 없는 상태지만, 원래라면 적발마도라 불리며 호남성 일대에서 커다란 명성을 드높였어야 할 절정고수다.

가뜩이나 일어났어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아 꽤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유금성과 같은 절정고수가 상방에서 일을 해 준다면 아주 큰 힘이 될 것이다.

어지간한 대상방도 데리고 있지 못하는 것이 절정고수다. 청해상방 역시 고작 일류고수를 무사로 고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 유금성이 적가상방에서 일하는 것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보인다면 얼마든지 월봉을 맞춰 줄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대답은 냉정했다.

“그럴 순 없다.”

유금성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소용없는 일인가?’

아쉬운 마음에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충 유금성이 거절할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기는 했다.

과거에도 유금성의 무공을 높이 사서 그를 영입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상방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 어지간한 사파나 정사지간 문파들 중에서도 거금을 챙겨 가 유금성에게 영입을 타진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금성은 그 어떤 제안에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일단 유설화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대충 유금성의 행동 방식을 분석해 보면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런 유금성이 어딘가에 묶여 있으려면, 대단히 큰 은혜를 베풀 거나 어마어마한 빚을 안겨야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유금성의 거절에 풍백보다 크게 실망한 사람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유금성을 바라보던 유설화가 그 대답을 듣고 크게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이는 중이었다.

“음…… 그러면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호남성에 있는 집으로 간다고 했어요.”

유설화가 풍백의 말에 대답했다.

그 모습에 유금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유설화를 바라봤다. 왜 쓸데없는 말을 했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유설화를 귀엽게 혀를 날름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고향으로 가는 건가?’

이전에도 유금성은 호남성에서 활동을 했었다. 이것에 대해 특별히 의문을 가졌던 적은 없었다. 아마 유설화가 호남성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찾으러 다녔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유설화를 찾았는데도 다시 호남성으로 돌아간다는 걸 보니, 아마도 호남성 어딘가에 고향이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풍백이 물었다.

“혹시 강호를 떠날 생각입니까?”

“…….”

유금성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 풍백이 틀렸다면 틀렸다고 말했을 사람이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사지가 멀쩡하니 무슨 일이든 못할까.”

“농사라도 짓겠다는 말입니까?”

“해 보지는 않았지만 못할 것도 없겠지.”

강호에는 은거기인이 많기는 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안면이 있는 유금성이 강호를 등지고 평범하게 살아갈 생각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꽤나 묘했다.

그리고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 사람……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휘어지느니 차라리 부러질 성격의 유금성이다.

그런 사람이 평범하게 농사를 하거나 장사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대단히 힘들었다. 장사하다가 가격이라도 깎으려고 하면, 가격 대신 손놈의 목을 꺾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강호로 나오겠는데?’

풍백이 틀렸을 수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의외의 모습을 보여 주며 숨겨져 있던 재능을 표출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대단히 많으니까.

그러나 만약 이것이 도박이라면 유금성이 은거에 실패하고 다시 강호로 나오는 것에 판돈을 걸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가볍게 인연이나 이어 두는 것이 좋겠네.’

빙긋 웃은 풍백은 품에서 작은 반지를 꺼내 유설화에게 내밀었다.

“이건 유 소저에게 드리는 겁니다.”

얼떨결에 풍백이 내민 반지를 받아든 유설화는 반지를 살펴보고 감탄했다.

“와! 예쁘다!”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옥반지는 슬쩍 보기에도 값싼 물건은 절대로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풍백은 유설화에게 말했다.

“원래는 유 대협께 드리려고 했습니다. 아! 반지로 드릴 생각은 아니었고요. 하지만 유 대협이 받으실 것 같지 않아서 유 소저에게 어울릴 물건으로 미리 준비를 해 놨던 겁니다.”

“오라버니께요?”

“미리 얘기를 해 놨으니 이 반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적가상방 사람은 없을 겁니다. 호남성이 멀기는 하지만, 만약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저희 적가상방으로 오셔서 그 반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최대한 빨리 저와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이 도와줄 겁니다.”

“아…….”

“그러니 그 반지를 잘 보관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유 소저.”

유금성의 미간에 그어진 금이 조금 더 깊어졌다.

‘이 사람은 왜 내게 이런 호의를 계속해서 보이는 건지…….’

풍백은 너무 비밀이 많았다.

적가상방에 대해 알아보니 고작 작은 군소 상방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군소 상방에 불과한 적가상방이 어떻게 유설화의 위치를 알고 있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원한 대가가 단지 열흘만 머물러 달라는 것이라니…….

정작 이곳에서 보낸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열흘동안 머물러 달라고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이제는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하라고 증표도 건네주고 있었다.

유금성은 이 많은 질문에 대해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풍백이 보였던 모습을 생각하면 제대로 대답을 해 줄 리가 만무했으니까.

“이만 가 보겠다.”

말을 마친 유금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러자 유설화도 얼른 일어나 공손히 풍백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얼른 유금성을 따라 달려갔다.

혼자 남은 풍백은 슬쩍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자신이 건네준 증표에 대해 딱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유금성은 적가상방을 크게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혹시 모르지. 나중에 적가상방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진해서 도와주러 올지도.’

힘든 상황에서 절정고수의 도움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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