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16화
아주 나쁜 일이 있다. 그리고 그 나쁜 일이 언제 일어날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 나쁜 일이 일어나야 할 시기에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고 지나간다면 어떨까?
기쁠까?
안심할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풍백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면 원인을 찾아야 했다.
어떠한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풍백은 많은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계획을 잘 짰다고 해도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에 일이 틀어지는 경우를 수도 없이 경험해 봤었다.
문제는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과거 적가상방은 곧 망해서 현판을 내려야 할 상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산현에 제대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고, 앞으로 절강성의 대상방이 될 기반을 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인맥이라고는 관부의 중간 관리자 정도나 가지고 있던 적가상방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절강성의 군부를 통솔하는 도지휘사의 신임을 받고 있고, 포정사와는 밀약을 체결하여 소금 전매권을 손에 넣었다.
겨우 이류무인이 상방 최고 무사라고 하던 적가상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당파의 제자가 만든 무관과 연계가 되어 있고, 서문세가와 깊은 친분을 가지고 있으며 강서성의 초절정고수인 무정검군 주천구를 아버지로 둔 시비가 상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덤으로 남궁세가의 직계혈손과 미래 칠대무신이라 불릴 무당파 현호자의 수제자가 이곳에 있었고 말이다.
계획이 틀어지게 된 이유는 너무 많았다.
사소한 이유 하나만으로 일이 틀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무려 일 년에 걸쳐 멸문을 막기 위해 온갖 대비를 한 상황에서 변수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렇게 저희 적가상방을 찾아 주신 귀빈들에게는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오늘 여러 귀빈들을 위해 준비된 만찬을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적가상방주 적호경이 짧은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풍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다른 사람들처럼 박수를 쳤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진덕양이 슬쩍 말을 붙여 왔다.
“고민이라도 있는 게냐?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누?”
풍백은 짐짓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혹시 참석하지 않은 다른 사람이 있는지 생각을 해 봤을 뿐입니다.”
“이미 연회가 시작되었다. 아직까지도 참석하지 않았다면 무슨 문제가 있어서 못 온 것이겠지. 소상방주인 네가 이렇게 딴생각에 빠져 있으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수 있다.”
“알고 있습니다.”
대답을 이렇게 했어도 하던 생각을 멈추기는 힘들었다.
그냥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넘어가야 할까?
바로 이 부분 때문에 풍백이 계속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는 멸문을 당했어야 했던 적가상방이 무사하다. 그러면 이제 멸문의 위험은 없어진 것이 되는 걸까?
누구도 이 부분에 대해 약속을 하지 못할 것이다.
멸문을 완전히 벗어난 것일지, 단순히 변수가 많이 생겨서 일정이 조금 미뤄지게 된 것인지 누가 안다는 말인가?
이것에 대해 확정적인 답변을 하려면 적어도 적가상방을 습격했던 자들에 대해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풍백은 적가상방을 멸문시킨 자들에 대해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떠한 진전도 볼 수 없었다. 놈들의 정체도, 목적도 무엇 하나 알아내지 못했다.
놈들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일말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정보라곤 그 겁화 속에서 살아남은 풍백의 기억뿐이었는데, 문제는 당시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탓에 그 기억마저 온전치 못하다는 점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흑의인들이 갑자기 벽을 넘어와 사람들을 도살했다는 것만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건만,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더 미칠 노릇이군.’
이제 풍백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적가상방이 언제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막아 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가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건가?’
막막한 얘기였다.
답답한 마음에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련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왼쪽에 앉아 있던 진덕양은 연회가 시작되자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오른쪽에 앉아 있던 문약란, 아니 주약란이 풍백의 한숨 소리를 듣고 물었다.
본래 시비는 시중을 들어야 하기에 자리에 앉지 못하지만, 주약란은 풍백의 배려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적호경과 진덕양을 비롯한 소수의 사람은 주약란이 주천구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굳이 이걸 막으려 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풍백은 주약란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계속 머릿속에 뱅뱅 돌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슨 생각인데요? 제가 도와 드릴 것은 없나요?”
“아직은 없지만……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얘기하도록 하지요.”
이건 진심이었다.
정말로 적가상방을 적가세가로 만들어야 한다면, 백련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지금부터 슬슬 밑밥을 까는 것이다. 물론 아직 정말로 세가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주약란은 풍백이 이렇게 말을 해 주는 것이 기뻤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풍백에게 도움을 받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건 그녀가 풍백을 마음에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받았던 도움을 갚아 줄 수 있다는 기쁨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사이, 두 사람이 그들이 앉아 있는 식탁으로 다가왔다.
금호상방의 조태명과 그의 손녀인 조유하였다.
주약란은 조유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조태명은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그녀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사람이…….’
풍백과 혼인 얘기가 나왔던 조유하를 본 주약란은 슬슬 얼굴이 굳어 갔다. 특히 조유하의 용모가 대단히 아름다웠기에 불안한 마음마저도 들었다.
순간적으로 조유하를 본 풍백은 눈에서 살짝 이채를 발했다. 그러나 그가 눈을 빛낸 건 주약란처럼 조유하의 외모가 대단히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 사람이 검후가 된다?’
듣자 하니 과거에 자신이 조유하에게 껄떡댔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풍백에게는 그런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조유하의 얼굴을 보고서야 어디선가 한 번쯤 봤던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지금 풍백은 조유하의 외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과거에 그녀와 자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여자가 나중에 검후라 불린다는 것이지.’
조태명은 풍백의 이런 생각을 몰랐다. 그저 풍백이 자신의 손녀를 보며 슬쩍 눈빛이 달라진 것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사내놈이 내 손녀를 보고 호감을 갖지 않을 리가 없지.’
어쩌면 적가상방과 혼약 얘기는 내일부터 급진전이 이뤄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만. 그동안 잘 지냈는가?”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소문은 익히 들었네. 아주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다녔다더군.”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그렇지. 상방이라는 것이 다 그렇더군. 현상 유지만 하려고 하면 대부분 점점 망해 가더라고.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적어도 현상 유지를 할 수 있다는 말이야.”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얼굴에 웃음을 보이고 있는 조태명의 모습에 풍백은 슬쩍 기분이 상했다.
지금까지 금호상방이 적가상방을 노리고 문제를 일으킨 것은 백건상방이 산적을 동원했을 때 관부가 끼어들지 못하게 만든 것뿐이었다.
치열한 상방끼리 경쟁에서 이 정도는 사실 가벼운 인사 정도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백건상방처럼 직접적으로 칼을 빼 든 것은 아니니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가벼운 인사 수준의 수작이라고 하더라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금호상방을 무너뜨리려고 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향후 검후라 불릴 여자의 가문을 무너뜨려서 큰 우환의 여지를 만들 필요도 없고.
그러나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슬쩍 배알이 뒤틀리기는 했다.
풍백은 슬쩍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저희 상방을 찾아오셔도 괜찮습니까?”
“왜? 내가 못 올 곳을 온 것은 아니지 않나?”
“그게 아니라, 여기에 청송무관주께서도 오셨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싶어서요.”
청송무관은 금호상방의 수작에 큰 고초를 겪었었다. 그래서 이후로도 금호상방 얘기만 들으면 우검학 관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조태명이 눈앞에서 우검학과 마주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었다.
우검학은 생각보다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니 당장 칼부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이제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청송무관과 청송표국인지라 조태명에게 큰 부담일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조태명은 풍백의 말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껏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수염을 매만졌다.
“우리 금호상방을 걱정해 주는 건가?”
“걱정이라기보다 잔치를 벌이는 중에 문제라도 생길까봐 여쭙는 겁니다.”
“허허허! 문제가 생길 일은 없으니 안심해도 괜찮네. 이미 예전에 우검학 관주와 속 깊은 얘기를 나눴고, 서로 쌓여 있던 오해는 털어 버렸으니까 말이네.”
“……네?”
조태명의 이야기는 제법 길었지만, 정리하자면 간단했다.
우검학과 조태명이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조태명은 자신들이 벌였던 일에 대해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만약 우검학이 사파라거나, 적어도 주천구의 백련문처럼 정사지간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우검학은 무당파라는 명문정파의 사람이었고, 조태명이 직접 나서서 사과를 하면서 용서를 받았다는 말이다.
단순히 용서를 빌었다는 걸로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 대가로 금호상방은 제법 비싼 가격에 청송표국과 계약을 체결했고 하니까.
이미 알다시피 우검학은 이제 개파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한 지역의 유지와 나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그러니 적당한 대가를 받고 잊어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우 관주가 속 깊고 열린 사람이라 다행이지. 우리가 잘못한 걸 흔쾌히 용서해 줬으니까.”
“그렇군요…….”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털어 내기로 했다.
어차피 이해 당사자인 우검학이 넘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풍백이 뭐라 하기는 힘들었다.
당장 적가상방도 청해상방이 관부를 움직이려는 걸 금호상방 덕분에 피할 수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더 이상 금호상방을 적대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나는 또 다른 자리에 인사를 하러 가야겠군. 여기는 내 손녀인데, 자네도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조유하 소저지요?”
“허허! 그럼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리도록 하고,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조태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그런 조태명은 바라보는 풍백의 귀에 조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 공자님은 이전과 많이 달라지셨군요.”
고개를 돌리자 조유하가 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과거 풍백의 개망나니 시절의 모습만 알고 있는 조유하였다.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술에 취해 얼굴이 시뻘겋게 된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지분거리려던 모습이.
그랬던 풍백이 자신의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너무 의외였다.
사람들에게서 풍백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었던 조유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었다. 오죽하면 과거 자신이 봤던 풍백과는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잔뜩 취해 흐리멍덩했던 눈동자에는 총기가 흐르고 있었고, 술기운에 붉었던 얼굴은 반대로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외모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사람의 말투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걸까?’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혀를 꼬여서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던 풍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의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바로 옆에 있는 자신에게는 처음 봤을 때를 제외하고 전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분명 이전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조태명과 함께 적가상방으로 오면서 풍백이 자신을 앞에 두고 본모습을 어떻게든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오판이었다.
풍백은 그녀의 말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달라져야 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상방이 많이 어려웠거든요.”
“그래도 너무 달라져서 다른 사람 같군요.”
“그러면 성공이네요. 저도 이제 이전과 같이 개망나니라 불리기는 싫거든요.”
“…….”
“저희 두 사람의 혼약 얘기는 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풍백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자 조유하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주약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렇지만 이어서 나온 풍백의 말을 듣고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갔다.
“혼약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제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혼약에 대해서 말이 나오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조유하는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그에 울컥하는 마음에 하지 말았어야 할 질문이 튀어나왔다.
“……저와 혼약을 할 생각이 없다는 말인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 저는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혼인을 하고 싶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군요.”
다시 한번 미소를 보인 풍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이렇게 담소를 나누고 싶지만, 저희 상방을 찾아 주신 분들이 많아서 실례를 하겠습니다.”
풍백이 미련 없이 다른 사람을 향해 걸어갔고, 그런 풍백의 뒤를 주약란이 따라갔다.
주약란의 얼굴은 언제 창백해졌냐는 듯 혈색 좋은 얼굴이 되어,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었다.
혼자 남은 조유하는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속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