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14화
적가상방 창립일이 가까워질수록 찾아오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면서 풍백 역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대소사와 계약에 관련된 일은 모두 적호경과 진덕양이 처리하지만, 적가상방의 소방주인 풍백이었기에 손님을 접대하는 일은 거들어야 했다.
“아이쿠!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색을 하며 손을 잡아 오는 사람은 적가상방과 호초 공급 계약을 체결한 심오경이었다.
풍백 역시 그의 손을 잡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점주님. 제가 이후에 항주를 방문할 때마다 점포를 찾아가 봤는데, 그때마다 상행을 나가 계셔서 도통 만나지를 못하겠더군요.”
“하하하하! 미안합니다. 점포를 지킬 사람이 있으니 계속 천축으로 상행을 나가게 되더라고요.”
“미안할 일은 아니지요. 덕분에 저희도 호초를 구입할 수 있는 거니까요.”
적가상방과 계약한 이후 안정적인 거래처가 생기자 심오경은 좀처럼 자신의 점포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매번 천축으로 호초를 비롯한 온갖 향신료를 구입하러 상행을 떠난 것이다.
적가상방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기 시작한 심오경은 이전에 사용하던 작은 점포는 이미 팔아 버렸고, 지금은 시장에서 비싸다는 커다란 점포를 구한 상태였다. 이제는 그 점포에서 일하는 사람만 여러 명이었다.
심오경을 통해 적가상방이 얻는 이익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심오경이 천축으로 나가는 상행에는 적가상방의 행수가 항상 같이 다니고 있었다. 그 말은 이제 거의 일 년에 걸쳐 천축으로 상행을 나가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현재 적가상방은 심오경의 점포에서 오직 호초만 구입하는 중이었다. 다른 향신료는 아직 판매하지 않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적가상방의 취급 상품 중 향신료는 원래 없었다. 그저 뜬금없이 향신료 중 으뜸이라는 호초가 생겨서 판매하던 것뿐이었다.
이렇게 호초를 판매하며 향신료라는 상품에 익숙하게 된 적가상방이 향신료를 새로운 상품으로 취급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었다.
적가상방에서는 심오경을 따라다니며 여러 경험을 쌓은 행수가 얼마 전에 처음으로 적가상방과 청송표국만으로 인원을 구성해서 천축으로 상행을 출발했다.
거창하게 호초처럼 대단한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천축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향신료만 구입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이렇게 구입하게 된 향신료를 가지고 적가상방은 향신료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심오경과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접객당으로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적 공자님.”
“어? 소가주님!”
풍백은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는 서문표를 보고 얼른 인사부터 했다. 그런데 서문표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서문 소저도 오셨군요.”
여전히 남들의 이목을 사정없이 잡아끄는 미모를 자랑하는 서문세령도 함께 왔다. 서문세령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담담한 모습으로 풍백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서문세가에서 서문표가 올 거라고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세령이 함께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서문세령과 몇 번에 걸쳐 만나고 인사도 했지만, 솔직히 풍백과 서문세령 사이에 어떤 유대감이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면에 나서서 서문세가를 대표하는 자리에 나가는 일도 드물었고 말이다.
그런 서문세령이 왜 적가상방까지 왔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서문세령에게 그런 걸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서문세가를 대표하는 사람은 서문세령이 아니라 서문표니까.
“항주에서도 적 공자에 대한 얘기가 사뭇 자주 들려오고는 합니다.”
“제 얘기가요?”
“화오염장의 소금 전매권을 적가상방이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적 공자라는 얘기는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하, 너무 과찬이네요.”
“너무 겸손하시군요. 덕분에 적가상방은 사람들 사이에서 향후 절강성의 대상방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종종 나오는 판국이지요.”
서문표의 말에 풍백은 웃으며 손사레를 치고 있지만, 사실 풍백 역시 적가상방이 대상방이 될 가능성은 차고 넘치는 중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나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상품에 뛰어난 상재를 지닌 적호경과 진덕양이 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상방이 되지 못한다면 그게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서문세가에서는 적가상방에 정식으로 요청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요청…… 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얘기하기는 조금 그렇고, 나중에 자리를 한번 마련하도록 하지요. 아마 적가상방에게도 나쁜 얘기는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부담 없이 들어도 되겠군요.”
서문세령은 웃으며 서문표와 대화를 나누는 풍백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때하고 똑같아.’
여전히 풍백에게는 서문세령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런 풍백의 반응은 서문세령에게 꽤나 신선하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서문세령이 풍백에게 마음이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신기해서 관심이 간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보통 그녀가 만나 봤던 남자들은 대부분 그녀의 미모에 홀려 넋이 나가든지, 아니면 그녀의 호감을 사기 위해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건 지금 접객당로 들어오는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여기 계셨군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때 인사를 나눴었지요?”
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풍백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사람은 바로 남궁세가의 남궁진이었다.
그의 등장에 풍백은 미세하게 눈이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금 풍백은 왕삼과 같이 있을 때와 달리 표정을 관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표정을 드러냈다는 말은 정말 크게 놀랐다는 말이었다.
이번 잔치에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초대장을 보냈었다.
남궁진과는 이전 서문세가에서 인사를 나눴었다. 그렇지만 남궁진과 친분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남궁진은 서문세령에게 마음이 빼앗겨 풍백과 긴 이야기를 나눌 정신이 없었고, 풍백 역시 뜻하지 않은 사건 때문에 그와 얘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초대장을 보내면서도 남궁진이 참석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파의 거목인 남궁세가 정도라면 이런 식으로 초대장을 보내는 곳이 하루에도 수십 통은 날아올 테니까 그저 무시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예상과 달리 남궁진이 진짜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착각은 하지 않았다.
무려 남궁세가의 직계인 남궁진이 겨우 군소 상방 수준인 적가상방을 염두에 뒀거나, 소금 전매권을 얻음으로서 향후 대상방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찾아왔을 리는 없었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남궁진이 서문세령을 쫓아 적가상방을 방문했다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 예로 아직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으면서 남궁진의 눈길은 계속 서문세령을 힐끔거리고 있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먼 곳까지 축하를 해 주기 위해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전에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이렇게 찾아왔을 뿐입니다.”
의중이 뻔히 읽히는데 이런 무의미한 대화를 하는 건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 줬으니 고맙네. 그 대가는 충분히 치러 줘야겠다.’
아마 연회를 할 때마다 서문세령의 옆자리로 배정을 해 주면 될 것이다. 그러면 아마 남궁진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눈인사라도 할지 모르고.
이 정도 배려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남궁세가라는 전력이 추가되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접객당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에는 절강성의 명문정파인 서문세가의 소가주를 비롯하여 서문세가주인 서문자건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金枝玉葉)인 서문세령과 안휘성의 절대강자인 남궁세가의 직계 혈손이 있는 상황이었다.
순수하게 적가상방에 친분이 있어서 방문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에게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절강성의 작은 상방을 운영하는…….”
“소, 소가주님! 저 기억하십니까? 저는 황가장에서 나온…….”
“남궁 공자님! 이런 곳에서 만나 뵐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오오…… 역시 절강제일미의 아름다움이란……. 정말 개안(開眼)을 했다는 말이 이런 말이구나 싶습니다!”
온갖 사람들이 몰리며 오히려 풍백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풍백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 끼지 않고 뒤로 물러서서 지켜봤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관심이 몰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군부에서 받은 훈련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 풍백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사람들하고는……. 아무리 저들이 명문세가의 자제라고 하더라도 엄연히 이곳의 주인은 적 공자이거늘……. 주객전도(主客顚倒)가 바로 이런 것이군.”
뒤를 돌아보자 혀를 차고 있는 청송무관주 우검학이 보였다. 그의 뒤로 젊은 도사 한 명과 중년 사내 하나가 같이 서 있었다.
풍백은 반갑게 웃으며 우검학에게 포권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우 관주님.”
“지금 웃고 있을 때인가? 이럴 때는 한마디 해야지. 주인하고 인사도 하기 전에 저러고 있는데 말이네.”
“하하하!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라고 했어도 서문세가와 남궁세가의 자제가 있으면 먼저 관심이 쏠렸을 겁니다.”
“에잉…… 사람이 좋은 건지, 아니면 속이 없는 건지.”
우검학은 풍백 대신 화를 내 주며 못마땅하단 듯이 혀를 찼다.
청송무관이 청송표국을 설립하고 적가상방과 보조를 맞추면서 우검학은 자주 이곳을 찾아와 적호경이나 진덕양과 담소를 나누고는 했었다.
그리고 풍백 역시 우검학과 간간히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었고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내일 잔치가 열릴 때나 오실 줄 알았습니다.”
“나도 그러려고 했었네. 그런데 소개를 해 줄 사람들이 있어서 먼저 찾아왔지.”
그러고는 뒤에 있는 젊은 도사를 바라봤다. 그 도사를 본 풍백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무당파?’
못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도사의 옷에는 무당파의 문양이 수놓여 있었고, 그의 허리에는 무당파의 송문검이 매달려 있었으니까.
도사가 앞으로 나오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우사형과 동문수학(同門受學)을 했었던 청수라고 합니다.”
그 말에 잠시 멈칫했던 풍백이 얼른 마주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적풍백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사형께서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적 공자의 도움을 받아 일어설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저희도 우 관주님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우연찮게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런가요? 사형은 적 공자님 덕분에 곤란해질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났다고 하던데요.”
실제로는 곤란할 것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향후 이 년 정도는 고생했을 테지만.
“덕분에 사형의 무관도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어 사부님이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아, 사부님께서요…….”
“아마 저희 사부님을 잘 모르실 겁니다. 원체 외부 활동을 잘 하시지 않는 분이시라…….”
아니다.
아마도 현 상황에서 무당파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우검학과 청수도장의 사부인 현호자에 대해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풍백일 것이다.
현 강호에서 절대고수를 논하면 정파와 사파로 나눠서 봐야 한다.
정파에서는 일신이제삼왕사객(一神二帝三王四客), 사파에서는 일신이존삼귀사괴(一神二尊三鬼四怪)로 모두 스무 명의 절대고수를 손꼽고 있었다.
사실 정파의 일신이제와 사파의 일신이존보다 삼왕사객, 삼귀사괴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기도 했다.
실제로 삼왕사객 중 하나가 사파의 일신이존에게 패하거나 삼귀사괴 중 하나가 일신이제를 만나 도주했던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파의 일신이제와 사파의 일신이존을 따로 절대고수라 부르고, 나머지 삼왕사객과 삼귀사괴를 그 아래에 놓자는 말도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어른들의 사정과 정사파 간의 알력 등을 이유로 계속해서 정파십대고수(正派十大高手), 사파십대고수(邪派十大高手)가 계속 유지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후에 등장한 현호자는 이 계보를 크게 흔들게 된다.
강호에는 전혀 알려지지도 않았던 현호자가 무당파를 내려와 처음으로 싸운 것이 바로 사파의 삼귀 중 하나였고, 삼귀 중 하나는 현호자에게 패하게 된다.
강호에는 알려진 고수보다 숨어 지내는 은거기인(隱居奇人)이 더 많다고 말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강호에서 절대고수라 불리는 사람이 은거기인에게 패할 거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이것을 계기로 사람들은 정파십대고수와 사파십대고수를 나누지 않고, 일신이제와 일신이존에 현호자까지 더하여 칠대무신이라 부르게 된다.
그 대신 삼왕사객, 삼귀사괴는 각각 정파칠대고수와 사파칠대고수라 불리게 되고 말이다.
아직은 이런 미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풍백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