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13화
적가상방의 창립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슬슬 적가상방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발 빠르게 찾아온 사람들은 이번 백건상방의 수작으로 인하여 적가상방을 등졌던 사람들이었다.
적가상방과 오랜 시간 동안 거래를 해 왔음에도 비정하게 등을 돌렸던 이들이지만,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들과 경쟁하는 다른 점포에서는 백건상방의 물건을 싸게 구입하여 자신들이 파는 것보다 싸게 판매하고 있는데, 무작정 적가상방을 바라보고 비싸게 물건을 구입하여 판매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적가상방이 군부의 물품을 납품하는 계약을 하고 화오염장의 소금 전매권을 얻으면서 멋지게 위기를 극복하기는 했다.
그러나 만약 적가상방이 이런 거래를 끌어내지 못했다면 누구나 예상하듯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적가상방이 무너지게 된다면 적가상방만 바라보고 있던 점포들 역시 모두 망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합리적인 생각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사소한 문제 하나만 가지고도 서로 비난하고 등에 칼을 꽂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에 혹시나 앞으로 적가상방에서 소금을 사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아와 거의 석고대죄(席藁待罪)하는 심정으로 적호경과 진덕양에게 매달리게 된 것이다.
이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적호경과 진덕양은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랬기에 이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하는 건 이해하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사람이 힘들 때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 적가상방은 거래한 기간에 따라 가격을 점차 낮춰 주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적호경과 진덕양은 이들에게 앞으로 물품을 계속 공급할 것을 약속했지만, 이전처럼 싼 가격에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상방이 판매하면서 받는 금액과 똑같이 받겠다는 말이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이들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하며 두 사람의 인물됨을 칭송했다. 어쩌면 면박만 당하고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적가상방을 찾아온 건 작은 군소 상방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번 적가상방의 창립 기념을 위한 잔치는 온갖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건 대단한 통찰력이 있어야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려 소금을 손에 쥐고 있고, 다른 손에는 호초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큰 상방에서 대규모 계약을 체결해 물량이 사라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찾아와 인사를 하고 앞으로 물건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계약 체결을 하려는 것이다.
판로의 다각화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번만 하더라도 판로가 막히면서 적가상방 자체가 무너질 뻔 했었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모든 상방과 계약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거래할 상방이 믿을 만한 상방인지, 재정적인 문제는 없는지 조사를 해야 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상방에 있는 행수들과 진덕양은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적가상방과 달리 풍백의 거처는 조용했다. 단지 한 사람이 무공을 수련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풍백이 아니었다.
고우길이었다.
진지한 얼굴의 고우길이 혼신의 힘을 다해 검법을 펼쳤다.
그의 검이 허공에 수를 놓을 때마다 위협적인 소리가 울려 퍼지고, 햇빛을 받아 섬뜩한 검광이 지켜보는 사람의 눈을 아프게 만들었다.
지금 고우길이 펼치고 있는 검법은 난파칠식.
얼마 전까지 풍백에게 단 세 개의 초식을 배워서 알고 있던 바로 그 검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고우길이 펼치는 검법은 이전처럼 단 두 초식으로 끊기는 것이 아닌, 물 흐르듯이 초식이 연결되고 있었다.
풍백에게 마지막 두 초식을 제외하고 다섯 개의 초식을 모두 배운 것이다.
지금까지 고우길은 아주 잘해 주고 있었다. 이제는 단순히 풍백의 호위무사가 아니라 심복이 된 것 같은 상황이었다.
풍백은 고우길이 조금 더 강해지기를 바랐다. 아직 이류무인에 불과한 고우길이기에 그를 써먹기 애매하기는 했다. 그렇기에 조금 더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개의 초식을 더 전수한 것이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준다면 마지막 두 초식도 전수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풍백이 군부에서 배웠던 난파칠식과 궁합이 맞는 내공심법까지도.
물론 이것은 앞으로도 고우길이 얼마나 풍백에게 충성심을 보이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퀘퀘퀘퀙!
현란하게 움직이는 검이 허공에 수를 놓을 때마다 그걸 지켜보는 왕삼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흘러나왔다.
“우와아…… 멋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인은 공포의 대상이자, 선망의 대상이다.
무공을 사용하는 무인들의 힘은 일반 사람들에게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인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면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게 된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이들이 펼치는 무공은 환상과 같았으니까.
왕삼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우길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현란하게 허공을 수놓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저런 힘을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멍하니 고우길이 난파칠식을 수련하는 걸 지켜보던 왕삼이 풍백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련님,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막 허공에서 번개가 번쩍거리는 것 같다니까요!”
“그래. 대단하네, 대단해.”
“……적어도 그렇게 대답을 하시려면 책에서는 눈을 떼고 말씀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풍백은 세상 편한 자세로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앞에서 고우길이 열심히 수련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눈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성의없게 대답하시려면 그냥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
“도련님? 왜 대답이 없습니까? 설마 삐…….”
“성의 없게 대답하려면 하지 말라며, 새끼야. 그리고 독서 중인 거 안 보이냐? 뭔 말이 그렇게 많냐?”
“언제부터 독서를 하셨다고……. 예전에는 춘화(春畫)만 찾았으면서…….”
“다 들린다.”
풍백의 말에 구시렁거리던 왕삼이 얼른 입을 닫고 다시 고우길에게 시선을 돌렸다.
왕삼은 모르고 있었지만 풍백은 독서를 하는 중이 아니었다. 책을 보는 중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서도 눈은 무공을 펼치는 고우길에게 향하고 있었다.
고우길이 난파칠식을 펼치는 것을 은밀히 지켜보던 풍백이 입술을 달싹였다.
[검에 너무 힘이 실려 있습니다. 난파칠식은 중검이 아니라 쾌검을 묘를 담고 있다고 얘기를 했었을 텐데요.]
귀로 직접 전해지는 풍백의 전음을 듣고 고우길의 검에 담긴 힘이 빠지며 더욱 경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써 거의 두 시진째 쉬지도 않고 수련을 하는 중이었기에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떨어지고, 팔과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우길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고, 그의 표정은 생기가 살아 있었다.
고우길은 무공을 처음 배울 때부터 정말 기연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강호를 질주하고 온갖 영웅담에 나오는 협객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나 강호에서 몇 년을 구르는 동안 이런 기연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기로 결정한 이후 적가상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드디어 그렇게 얻고 싶었던 기연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절대로 이 기회를 그냥 놓치기 않겠어!’
풍백에게 배운 난파칠식도 대단한 무공이지만, 풍백정도 되는 고수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기연이라고 봐야 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죽어라 수련하는 것이다.
왕삼은 이런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모르고 동경이 가득한 눈으로 고우길을 바라보며 넋두리처럼 말했다.
“하아…… 나도 저런 무공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에 뒤에 앉아 있던 풍백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왕삼이 도끼눈이 되어 풍백을 바라봤다.
풍백은 그런 왕삼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비웃음을 지어 주고 있었다.
“왜요? 저라고 못할 것 같습니까?”
“응, 못해. 쓸데없는 꿈은 그만 버리도록 하라고.”
“아니, 제가 뭐가 어디가 어때서요? 저도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 이 말입니다!”
“체력만 좋다고 무인이 될 수 있겠냐? 넌 체력 빼고 좋은 게 하나도 없잖아.”
“무슨 그런 말씀을! 이래 봬도 제가 엄청 순발력이 좋다 이겁니다. 한번 보실래요?”
자리에서 일어난 왕삼이 좌우로 파닥거리며 게걸음을 걸어 보였다.
“쉭! 쉭! 이거 보십시오! 대단하죠? 빠르죠?”
“…….”
“어딜 보시는 거죠? 쉭! 쉭!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작작해라.”
입에서 소리를 내며 파닥거리는 왕삼의 모습은 꼴불견이었다.
왕삼이 무공에 관심이 있다는 건 풍백 역시 알고 있는 얘기였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무공을 가르쳐 줄까 고민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무공을 배우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미 근골이 다 굳어서 무공을 익혀 봐야 소용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왕삼의 성격은 무공을 익히기 어려운 성격이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쉽게 실증을 내는 왕삼이기도 했고, 무인을 하기에는 너무 심약한 성격이기도 했다.
‘내가 틀린 걸 수 있으니까, 나중에 시중에서 삼재심법이라도 구해다가 줘 보지. 그걸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인다면 가르쳐 주지 못할 것도 없으니까.’
삼재심법이라면 무공을 배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건강을 챙기는 용도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던 풍백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짝이 나쁘지 않군. 그동안 큰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야.”
뭔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에 풍백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한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치 여인처럼 길고, 불꽃처럼 붉게 물들어 있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
바로 적발마도 유금성이었다.
‘아니지, 이제는 적발마도라는 별호는 없어졌지?’
풍백은 이런 생각과 함께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금성 대협.”
“히익!”
풍백이 인사를 올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왕삼이 기겁을 하고 우당탕거리며 네발로 기어 물러섰다.
유금성을 만난 그날, 왕삼은 처음으로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게 되었다.
아홉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피를 쏟으며 죽어 가던 모습.
그 모습이 각인이라도 된 것인지, 아직도 간혹 그날의 일을 악몽으로 마주하는 왕삼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고우길 역시 수련하던 걸 멈추고 얼른 다가와 풍백의 뒤에 호위하듯이 섰다.
유금성은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는 시선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풍백의 얼굴만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유금성을 보며 풍백이 물었다.
“어떻게, 동생분은 만나셨습니까?”
그 물음에 유금성은 대답 대신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의 뒤에 숨어 있던 예쁘장한 소녀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제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는 풍백을 보더니 유금성에게 물었다.
“이분이 그분이신가요, 오라버니?”
유금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가 깡충 뛰듯이 나와 풍백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오라버니와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유설화라고 해요.”
“적가상방의 적풍백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잘 만나셨군요. 축하합니다.”
“그런데 제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오라버니에게 알려 주신 건가요?”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물어보는 유설화의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그렇기에 풍백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을 해 줬다.
“유금성 대협께 듣지 못하셨나요?”
“네?”
“저희가 끝내주게 정보를 잘 모은다고요.”
이전 유금성에게도 했던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유금성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유설화는 이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빤히 풍백을 올려다보았다.
유금성이 풍백에게 물었다.
“거처는 준비되어 있겠지?”
“그럼요. 제일 좋은 방으로 준비를 해 뒀습니다.”
“약속했던 것처럼 정확히 열흘 동안 머물고 떠날 거다.”
“잘 기억하고 계시군요. 저희도 굳이 잡지 않을 겁니다.”
대화를 마친 풍백이 왕삼을 손짓해서 불렀다. 왕삼은 울상이 되었으나 결국 풍백에게 미적거리며 걸어올 수밖에 없었다.
“네가 숙소를 안내해 드리도록 해라. 숙소는 당연히 제일 좋은 곳 중 하나로 배정하도록 하고.”
“눼에…… 알겠습니다.”
여전히 두려워하는 기색이 완연한 왕삼이 유금성 남매를 데리고 숙소를 안내하기 위해 떠났다.
풍백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점차 두근거림이 강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