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11화
“상황이 심각합니다.”
서문세가 총관인 서문이석의 말에 서문자건의 얼굴이 굳어 갔다.
서문이석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목소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미 상황이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서문자건 역시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 지경이 된 건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징후도 없이 벌어진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대충 배후에 영파상방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또 영파상방인가?”
서문자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영파상방에서 온갖 수작을 부리는 걸 계속 당하고 있는 서문세가였다.
상방 쪽 일만 가지고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소가주인 서문표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 않던가.
그런데도 지금 서문세가에서 영파상방을 적극적으로 응징하지 못하는 이유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파이기에 상방 쪽 일을 무력으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번에 일어난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서문세가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은 상당히 다양했다. 소유하고 있는 객잔과 반점을 운영하며 수입을 내기도 했고, 약초나 도자기를 판매하기도 하는 등 종류만 따지면 십여 종의 사업을 운영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업들 중에서 가장 큰 수입을 내고 있는 서문세가의 대표적인 상품을 말하라면 누구나 용정차를 언급하게 된다.
서문세가에서 생산하는 용정차는 세가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막대했다. 그나마 적가상방에서 호초를 받아 와 판매를 하며 그 비율이 낮아진 것이 이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서문세가의 중요 수입원인 용정차에 문제가 발생했다.
다행히 제품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까지 용정차 납품을 받던 큰손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영파상방으로 넘어간 것이 문제였다.
용정차가 돈이 되는 만큼 영파상방 역시 용정차를 취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서문세가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용정차를 판매해 왔던 것이 아니기에 그 규모는 서문세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세가와 거래를 하던 큰손들이 모두 영파상방으로 넘어감에 따라 영파상방의 용정차 시장은 급속하게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서문세가는 이제 용정차를 처리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고 말이다.
대부분의 차는 봄에 채취하는 잎이 가장 고급이고 비싸기 마련이다. 이것은 용정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문세가 역시 봄에 채취한 용정차를 가장 비싸게 판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노린 건지 몰라도 이제 막 봄에 맞춰 용정차를 준비하던 서문세가였다.
보통 생산된 용정차는 일 년 안에 먹으면 된다.
그러나 창고에 묵히면 묵힐수록 차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생산한 용정차를 창고에 넣어 놓고 판매 경로를 찾다가는 손해가 극심해질 거라는 말이다.
“용정차 물량이 얼마나 되는가?”
“정확한 물량은 확인을 해 봐야 합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생산한 용정차의 이 할에서 삼 할 정도 되는 물량은 소화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아마도 창고에서 묵히게 될 것 같습니다.”
“쓰읍…….”
서문자건이 짜증이 섞인 소리를 내며 이마를 쓸어 올렸다.
과거 서문자건이 한창 어렸을 때는 가주가 되어 이런 회의를 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저 가주가 되면 무공을 수련하고 무사들의 무공을 봐주며 강호를 질주할 줄 알았다.
그렇지만 실제로 가주가 된 다음에는 이런 머리 아픈 일들이 너무 많았다.
피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총관이 대부분의 대소사를 처리하기는 하지만, 가주의 결재가 반드시 필요한 일도 수두룩하니까 말이다.
이번 용정차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그래서 총관의 판단은 어떻게 했으면 싶은가?”
“일단 절강성에 있는 군소 상방에 연락하여 소량이라도 주문을 최대한 받아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물량을 소화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지요.”
“가능할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든 해내야 합니다. 이번에 생산한 용정차를 제대로 판매하지 않으면 올해 세가에서 집행할 자금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서문자건은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서문이석의 말은 곧 힘들다는 말일 테니까.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오 할은 창고로 들어가야 하겠군.’
문제는 이것이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신뢰할 수 있는 거래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막대한 금액에 해당하는 물품을 파는 것은 그 신뢰의 기반이 얼마나 탄탄한지, 거래처가 이 정도 거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포괄적으로 검토해야 했다.
그러니 신뢰할 수 있는 거래처를 찾을 때까지는 생산하는 용정차가 계속해서 창고에 쌓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 서문세가가 이런 상황에 처한 건지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문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적가상방은 어떻습니까?”
“적가…… 상방?”
서문이석은 금방 어딘지 떠올리지 못하고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서문자건은 서문표의 말에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내려칠 뻔했다.
‘그렇지! 그 녀석이 있었구나!’
서문이석 역시 적가상방이 어딘지 기억해 내고 서둘러 물었다.
“설마 화오염장의 소금 전매권을 얻어 냈다는 적가상방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저희에게 호초를 공급하고 있기도 하지요.”
서문표의 말에 서문이석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적가상방은 서문세가에 호초를 판매하고 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군소상방에 들어갔던 곳이기에 금세 떠올릴 수 없었다.
아마 화오염장의 소금 전매권을 적가상방이 가져갔던 일이 아니었다면 아직까지도 서문이석은 적가상방이 운 좋게 호초를 취급하는 군소 상방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서문이석에게 서문표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얼마 전까지 인근에 있는 상방과 싸움이 있어서 고생이 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금 전매권을 손에 넣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어쩌면 아직 자금이 부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 자금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일단 구매 가능한 정도까지만 거래를 하고, 남은 물량은 꾸준히 자금이 생길 때마다 주기적으로 거래를 유지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말이다.”
“아…….”
“그보다 더 문제라고 할 것은…… 과연 적가상방이 용정차를 구입할 생각이 있느냐겠지?”
용정차가 비싸게 팔리는 물건이지만, 이것을 구입한다고 하더라도 판매 경로가 없으면 굳이 구입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서문자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용정차 구입에 관련하여 말을 꺼내면 그 녀석이 거절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 녀석이라니요?”
“이전에 왔었던 적가상방의 엉큼한 녀석을 말하는 거다.”
“아…… 적풍백 공자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런데 적 공자가 다 구입해 줄 거라고요?”
풍백은 서문자건에게 두 개의 부탁을 빚졌다. 그러니 첫 번째 부탁으로 용정차를 모두 구입해 달라고 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포정사에게서 화오염장 소금 전매권을 받아 올 수 있었던 계기가 결국 내가 소개를 시켜 줬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리고 용정차를 제대로 판매할 수 있기만 하다면 이건 부탁이 아니라 서로 이득이 되는 거래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당장 판로가 없다고 하더라도 상행을 나가는 적가상방의 특성을 생각하면 판로를 새로 만드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항주에서 생산한 용정차는 어디에서든지 환영을 받는 물품이지 않은가.
“네가 이번에 적가상방에서 연다는 잔치에 가기로 되어 있었지?”
“네, 그러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용정차 거래에 대해 그 녀석과 얘기를 하면 되겠군.”
뜬금없는 사건이 터져 답답하던 서문자건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 *
금호상방 내원 깊숙한 곳에는 한 사람의 거처가 있었다.
상방주인 조태명의 손녀인 조유하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상산현을 주름잡는 금호상방주 조태명의 손녀이기에 누구나 조유하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심작하고는 한다.
그러나 사실 조유하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산고(産苦)로 인하여 어머니를 잃은 조유하는 그녀의 나이가 겨우 일곱 살 때 아버지마저 급작스러운 지병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조태명은 그런 조유하를 금호상방으로 데리고 와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며 키웠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조유하에게 보이지 않는 손가락질을 하고는 했었다. 흔히 부모 잡아먹고 태어난 아이라는 손가락질이었다.
사람들의 이런 시선은 어린 나이의 조유하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 그 덕분에 날이 갈수록 점점 말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조유하는 조태명을 따라 방문한 사찰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여승, 범혜사태와의 만남이었다.
이후 조유하는 매일 사찰을 나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범혜사태를 자신의 거처로 데리고 와도 되냐는 부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조태명은 범혜사태와 만난 이후로 점차 밝아지는 조유하를 보며 차마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범혜사태는 금호상방에서 조유하의 스승이자 유모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조태명은 그저 범혜사태가 조유하에게 학문과 불경을 가르치는 줄 알았다.
이건 사실이기는 했다.
단지 한 가지 더, 무공을 가르치고 있다는 건 비밀로 했을 뿐이었다.
어두운 밤.
조유하의 거처 앞에 있는 넓은 공터에서는 옷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들리고 있었다.
파라락!
소음이 없는 밤이기 때문인지 옷이 펄럭이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공터에서는 한 여인의 신형이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고는 했다.
그에 맞춰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움직인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검은 두 개, 세 개, 네 개로 분열을 하며 보이지 않는 적을 찢고 다녔다. 그 누구도 그녀의 검 앞에서는 환각에 빠진 것처럼 현란한 검을 막아 내지 못할 듯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한 보법과 검법을 선보이던 그녀가 땅을 박차더니 하늘을 향해 무려 사 장가량 솟구쳤다.
그리고 그녀의 검이 움직임과 동시에 검에서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수십 개가 넘는 검기가 쏟아져 나와 하늘로 쏘아졌다.
검기는 절정고수의 상징이었다.
검기를 쏟아냈던 그녀가 지면에 사뿐히 내려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엄청난 무공을 선보인 사람은 조유하였다.
조유하는 자신이 펼쳤던 검식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후우…… 아직 멀었어.’
지금 그녀가 펼친 검법은 보타암의 비전절학이자, 검후의 상징과 같은 검법인 팔만사천반야검형(八萬四千般若劍形)이었다.
조유하가 팔만사천반야검형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절초를 사용해 검기를 폭사시키는 것을 보면 그녀의 무재(武才)가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조유하는 자신이 펼쳤던 것에 만족을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현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정진하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재능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아마 조유하가 수련하던 것을 자주 봐 왔던 사람이라면, 지금 조유하가 연공하는 모습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에 잡념(雜念)이 담겨 있더구나.”
오십대 정도로 보이는 비구니가 자애로운 얼굴로 한 손에 염주를 굴리며 말했다.
조유하의 스승이라 알려진 범혜사태였다.
범혜사태의 말을 들은 조유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그랬어요.”
그 말에 범혜사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얘기 때문이더냐?”
“……무슨 얘기를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누가 봐도 한눈에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 정도로 어설프게 표정 관리를 하며 말하는 조유하였다.
그러자 범혜사태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그래? 나는 네가 얼마 전에 적가상방 소방주와 혼담에서 거절당한 것 때문에 잡념이 생긴 줄 알았는데…….”
“거, 거절당한 것 아니거든요! 처음부터 저도 그 사람을 만날 생각은 없었다고요!”
발끈하며 소리치는 조유하의 모습에 범혜사태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러니? 그러면 처음부터 혼담이 나왔을 때 거절하지 그랬어. 어차피 혼인할 생각이 없었다면서.”
“하, 할아버지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바로 거절하면 할아버지한테 미안하니까, 그래서 얼굴만 한 번 볼 생각이었어요! 적어도 거절하면서 예의를 갖추는 의미에서요!”
“그랬구나. 그러면 요즘 들려오는 소문에 많이 신경이 쓰이겠구나.”
범혜사태의 말에 조유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지간히 화가 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