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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08화 (108/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08화

적엽비표, 또는 적엽상인(的葉傷人)이라 부르는 이 수법이 무공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무공조차 아닌 수법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병장기에 기를 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이류무인 중에 검에 제대로 기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이렇게 단단한 병장기 에도 어려운데, 하물며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나뭇잎에 기를 담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심지어 나뭇잎은 시전자의 손을 떠나서도 기가 온전히 담겨 있어야 했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암기에 대한 조예마저도 필요했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를 담아 냈다고 하더라도 던질 수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이것을 제대로 펼치려면 적어도 절정고수 중에도 초절정을 바라보는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강호의 중론이었다.

천목사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여, 여기에 절정고수가?’

‘초절정고수일지도 모른다!’

‘제기랄…… 도망쳐야 해!’

이러는 중 첫째가 사방으로 포권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서 온 고인이신지 모르지만, 천목사웅이 인사드립니다!”

첫째의 목소리는 진중했지만, 그의 목소리 역시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크게 당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당연했다.

받는 돈에 비해 간단한 의뢰였고, 때려죽이고 싶은 서문세가주에게 별호를 직접 받았다는 고우길을 잡아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였던 천목사견이었다.

그리고 의뢰는 예상대로 그리 어렵지 않게 마무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부수입으로 여자 두 명을 챙기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초절정고수일지 모르는 누군가가 등장했다.

이들은 나름 악명이 자자했지만, 상대가 초절정고수라면 그런 악명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초절정고수에게 그들은 그저 벌레와 같은 존재일 테니까.

한참 동안 누가 나타나지도, 어떤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병장기에 꽂혀 있는 솔잎이 없었다면 무슨 착각을 한 것은 아닐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천목사견의 첫째는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포권을 하는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대신 다른 세 명의 천목사견은 언제든 도망갈 것처럼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차하면 도망치기 위해 퇴로를 살펴보는 것 같았다.

포권을 취하고 있는 첫째의 손이 땀으로 흠뻑 젖어 갈 무렵, 어두운 하늘에서 한 인영이 표홀히 나타나 사뿐히 장내에 내려섰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운지, 사람이 땅바닥에 내려섰는데도 먼지 하나 일지 않았을 정도였다.

천목사견은 나타난 사람을 바라봤다.

이제 불혹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평범한 옷에 허리에 아무런 특색이 없는 검을 차고 있었다.

단지 그의 외모가 조금 특이했는데, 불혹이 넘었는데도 지나가는 여인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남자들도 그를 보면 잘생겼다고 말할 정도로 준수한 미남자였다.

그런데 그를 보면 어디에서도 무공을 익힌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만약 방금 전 끔찍할 정도로 깔끔한 경공과 적엽비표의 수법을 보지 못했다면 그가 무공을 배웠다는 것도 의심했을지 몰랐다.

그리고 그 말은 사내가 특이한 기공을 익힌 것이 아닌 이상, 어쩌면 무공 경지를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고수라는 말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사내는 바로 어제 풍백의 연무 장면을 몰래 보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꿀꺽!

천목사견은 꼼짝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른침만 삼켰다.

정적만이 가득한 이 공간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 무사님! 다, 다치신 거예요?”

문약란이었다. 그녀는 고우길에게 다가가 피가 번지고 있는 상처를 보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허둥댔다.

그러나 정작 고우길은 걱정해 주는 문약란이 고맙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싶기도 했다.

지금 나타난 사내가 자신들을 도와주기는 했어도 아직 누구 편인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강호에는 온갖 미친놈들이 많았다. 어쩌면 갑작스런 변덕이 일어 이곳에 끼어들었던 것이고, 또다시 갑작스런 변덕이 일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지도 몰랐다.

슬그머니 눈을 돌려 나타난 사내를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문약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놈마저 문 소저를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다고 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풍백이 나타나도 막아 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사내가 보여 준 적엽비표의 한 수는 충격이었다.

이런 상황에 문약란은 또다시 돌발적인 행동에 나섰다.

허둥거리고 있던 문약란이 고우길이 막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수월이에게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문약란이 수월이에게 달려가자 그 주위에 있던 천목사견이 움찔했다.

‘저걸 잡아?’

‘끼어든 걸 보면 아마도 적가상방과 관계가 있는 놈을 텐데…….’

‘인질로 잡으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그러나 결국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그런 이들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암중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엄청난 기세에 숨쉬기도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이라도 까딱하면 사내가 검을 뽑아 자신들을 일검에 죽여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수월아!”

문약란은 수월이를 품에 안고 흔들었지만, 수월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당황한 문약란이 뭐라 외치려고 하는데 그런 그녀의 귀에 사내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혈(睡血)을 눌린 거다.”

“수, 수혈이요? 그게 뭔가요?”

“그저 잠을 자고 있다는 말이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그제야 수월이의 코에 손을 대 본 문약란은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수월이를 내려놓은 문약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사내에게 다가가더니 공손해 인사를 올렸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어요.”

문약란은 순수하게 도움을 준 것을 감사하고 있었다. 고우길처럼 어떤 의도가 있어서 도와줬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약란의 인사에 사내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시선은 이전까지 문약란이 주로 받아 왔던 시선들과 달랐다. 어떠한 사심도 없었고,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듯한 그의 시선에서는 따뜻한 무언가도 느껴졌다.

문약란의 초록빛 눈동자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내는 조금씩 문약란이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바뀌어 가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단한 건 아니었다.”

“아니에요, 저희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었어요. 저희와 같이 적가상방으로 가시겠어요? 분명 도련님이 답례를 해 주실 거예요.”

그러자 사내가 그늘진 곳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담담히 물었다.

“그대도 나를 적가상방으로 초대할 마음이 있는 건가?”

뜬금없는 사내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늘 속에 존재감 없이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도련님!”

“소가주님!”

풍백이었다.

사례금에 눈이 먼 흑도패 두목이 생각보다 더 빨리 적가상방에 도착했고, 마침 풍백이 대문 근처를 지나고 있기에 빨리 만날 수도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풍백은 당연히 최대한 빨리 경공을 펼치며 달려왔고 말이다.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풍백은 청해상방의 수작이나, 막다른 곳에 밀려 버린 백건상방이 무력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한 풍백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초절정고수?’

이미 서문자건이라는 초절정고수를 만났던 풍백이었다. 그렇기에 사내에게서 서문자건과 같은 아득할 만큼 대단한 기세를 느끼고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장 튀어 나가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어둠속에 녹아들어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풍백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너무나 손쉽게 알아챘다. 작정하고 몸을 숨긴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쉽게 행적이 노출된 적은 처음이었다.

풍백은 천천히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자 문약란이 바람같이 달려오더니 그대로 풍백의 가슴에 와락 안겼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보면 지금까지 두려운 것도 꾹꾹 참고 있었던 것 같았다.

풍백은 느닷없는 사태에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그러자 문약란이 그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있었다.

문약란이 풍백에게 안기는 순간, 지금까지 거의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던 사내가 미간에 굵은 선 하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굵은 선은 풍백이 문약란의 어깨를 토닥이고, 문약란이 더욱 풍백을 강하게 끌어안는 것을 보며 점점 더 굵어졌다.

풍백은 문약란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좀 놔주지? 너희를 구해 준 사람에게 인사도 해야 하지 않겠어?”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문약란이 얼른 풍백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창피했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도착했다.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서 와 봤는데…… 내가 생각했던 상황과는 많이 다르군.”

“엄청 위험했었는데, 저분께서 나타나서 도와주셨어요.”

그 말에 풍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우길에게 말했다.

“고 무사님은 수월이를 챙겨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고우길이 후다닥 달려가 수월이를 챙겨서 뒤로 피했다.

그러는 동안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간 풍백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적가상방의 적풍백이라고 합니다. 저희 식솔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만히 풍백을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강서성의 주천구라고 하지.”

그 말에 풍백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주…… 천구? 강서성 백련문의 문주인 무정검군 주천구라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백련문은 강서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문파이고, 특히 무정검군 주천구는 강서성의 제일 고수를 논하면 반드시 들어가는 인물이니까.

풍백은 놀란 기색을 순식간에 지워 버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백련문주께서 이런 곳에 계실 거라고 전혀 예상도 못했었습니다.”

그 말이 주는 파급력은 대단했다.

당장 고우길은 입을 쩍 벌리며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고, 여전히 눈알을 굴리며 도망갈 방법을 찾는 것처럼 보이던 천목사견은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백련문은 정파도 사파도 아닌, 강서성의 대표적인 정사지간의 문파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정의가 있었으며, 그 정의를 벗어나거나 자신들의 적이라 판단된 상대에게는 사파보다도 더 잔혹한 손속을 보여 주는 걸로 유명했다.

‘우린 죽었다…….’

‘저 사람이 무정검군이라고?’

‘아니, 씨발! 무정검군이 이런 곳에 왜 나타나는 건데!’

마음속으로 온갖 절규와 욕설을 내뱉고 있었어도 감히 도망칠 생각도 못하는 천목사견이었다.

이곳에서 주천구의 이름을 듣고 전혀 표정 변화가 없는 건, 강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문약란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저 크게 동요하는 사람들을 보고 단순히 주천구가 엄청 유명한 사람인가보다 하고 있을 뿐이었다.

풍백은 주천구에게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희도 은공이신 문주님을 그냥 보내 드리기 힘드니, 적가상방으로 함께 가셨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주천구가 말했다.

“그 전에 저놈들을 처리해야 하겠군.”

“그건 곧 적가상방 무사들이 올 테니…….”

“호법(護法).”

작은 한 마디에 지붕이 있는 곳에서 두 명의 사내가 사뿐히 뛰어내렸다. 그들 역시 주천구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엄청난 경공 실력을 뽐내고 있어서 무공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네 마리 강아지들을 데리고 가서 누가 무슨 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 확인을 해 주게.”

“존명.”

두 호법이 대답과 함께 천목사견에게 쏘아지듯 달려들었다.

“누가 쉽게 잡혀 준다고 했냐!”

“도망쳐!”

“도망치지 말고 싸워, 병신들아!”

“너나 싸워!”

천목사견은 사파답게 순식간에 서로를 욕하며 두 명은 맞서 싸우려고 하고, 나머지 두 명은 냉큼 도망치려고 했다. 어차피 잡히면 죽을 목숨이라는 걸 깨닫고 발악이라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도망치려는 사람은 담벼락을 넘기도 전에 제압당했고, 싸우려고 했던 첫째와 막내는 호법의 초식 하나도 제대로 막지 못해 대번에 제압을 당하고 말았다.

‘최소 절정고수다!’

풍백은 그런 호법들을 무공을 유추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초절정고수 하나만이 아니라 여기에 절정고수 두 명이 더 있었다. 만약 이들이 적가상방에 해를 끼치려고 한다면 감히 막을 수 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청송표국이 나서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주천구는 이런 풍백에게 담담히 말했다.

“저들의 배후를 확인하는 건 호법들이 알아서 잘해 줄 것이네.”

“……네, 이쪽으로 가시지요.”

풍백은 주천구를 적가상방으로 모시고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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