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05화
달빛이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며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풍백은 달빛을 맞으며 거처 앞에 있는 마당에서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지면에 발이 닿지 않은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는 풍백의 신형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바람에 밀려 하늘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한 걸음에 둥실 떠오르기도 했고, 잔영(殘影)이 점점이 만들어지며 신비로운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부운연화미리보였다.
풍백의 쌍수가 움직였다. 그의 쌍수가 부드럽게 움직이면 미풍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허공에 수영을 만들었고, 격하게 움직일 때는 태풍을 정면으로 받아 내는 나뭇잎처럼 주변을 휩쓸고 다녔다.
부운연화미리보와 동시에 펼쳐지는 황룡사 삼대절기 중 하나인 보리패엽수는 끝없이 만들어 내는 장영(掌影)을 선보이며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풍백의 수장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꽃과 나뭇잎들이 비산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후우욱!
풍백의 쌍수가 거대한 다라수 잎을 만들어 내며 대미를 장식했다.
수장을 거둬들이며 가볍게 숨을 몰아쉰 풍백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 걸음 남았군.’
절정의 단계가 정말 코앞에 있었다.
무공 수준이 한 단계 올라서는 일은 단순히 어렵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기에 이전 과거에서는 감히 자신이 절정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랬던 절정 단계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려 십여 년을 수련했어도 오르지 못했던 절정고수였는데, 이제 무공을 익힌 지 일 년 만에 그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다니…….
‘후우……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적가상방이 멸문하는 날을 기억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멸문했던 날은 적가상방 창립일 바로 전날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잔치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화려하게 준비하는 중이었다.
서문세가의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청송무관의 우검학 관주를 비롯하여 크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사라도 나눴던 남궁세가의 남궁진까지 초대했다.
‘유금성도 오고 있겠지?’
과거 유금성은 이쯤이면 벌써 적발마도라는 별호까지 얻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금성에 대한 소문은 들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찾아 헤매던 동생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유금성이 적가상방 잔치에 참석하게 된다면, 적가상방에는 절정고수만 두 명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몰라 도지휘사와 포정사까지 초대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각 지역에서 소금 때문에 찾아올 여러 상방까지 생각하면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가 거의 모두 참석하는 것이 되는 것이리라.
‘절대로 이전처럼 적가상방을 멸문시킬 수 없을 거야.’
과거에는 적가상방이 거의 망해 가는 중이었다는 점과 크게 차이나는 무력 때문에 적가상방이 멸문한 이후에도 그 파급은 아주 작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모든 인원을 죽이고 조용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준비가 거의 끝나 간다는 생각을 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준비는 끝나 가고 있었고, 절대로 다시 멸문이 일어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고 악몽으로 찾아왔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혼자 숨어서 살아남기 위해 입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눈에 죽어 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고, 식솔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었다.
‘이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굳게 입술을 다물고 다짐을 하는 풍백의 눈에서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보이는 듯했다.
풍백은 거처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걸어가던 풍백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예리한 눈은 담벼락이 있는 방향을 훑어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풍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뭔가 나를 보고 있는 시선을 느낀 것 같은데…….’
풍백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무공이 점점 상승하면서 이목이 날카롭게 되며 간혹 이러는 경우가 있기는 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것이다.
방으로 들어간 풍백이 문을 닫았다.
이제 내공 수련을 할 시간이었다.
풍백이 방으로 들어가자 불혹은 지난 듯한 사내가 담벼락 위에 유령처럼 스르륵 나타났다.
‘상방의 후계자가 사실은 무공 고수라고?’
상방이 아니라 문사라고 하더라도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신기한 광경은 아니다. 단지 그 수준이 일류고수 수준이라는 것이, 그것도 무려 절정을 바라보는 일류고수라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절정고수는커녕 일류고수라고 하더라도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평생 수련을 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무인이 수두룩하니까 말이다.
일반적으로 상인이나 문사가 무공을 익히는 경우는 대부분 건강을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일류고수에 오르는 상인이나 무인의 수는 극소수라고 할 수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풍백이 불과 일 년 전까지는 무공이라고는 모르는 개망나니였다고 했었다. 정신을 차린 이후로도 상방에 관련된 일을 하느라 바빴다고 들었고.
그런데 지금 자신이 본 것이 환상이 아니라면 분명 풍백은 고수였다.
‘개망나니에 뛰어난 상재를 가진 후계자, 여기에 이번에는 무공 고수라…….’
사내는 풍백의 방을 기이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 * *
“아! 맛있었다!”
수월이가 배를 두드리며 말하자 문약란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수월이와 문약란이 있는 곳은 상산현에 있는 식당 중 하나였다. 일이 끝나면 수월이와 자주 밖으로 나와서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놀았던 문약란이었다.
비록 문영후에게 납치를 당했던 안 좋은 기억이 있던 문약란이지만, 풍백이 구해 줬던 기억 덕분인지 적가상방을 나가서 노는 것에 큰 문제가 없었다.
“음…… 배는 부른데 뭔가 아쉬워.”
“더 먹으려고? 그러다가 살찔 텐데.”
“맛있게 먹으면 살 안 찐다고 하던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수월이의 모습에 문약란은 웃으며 말렸다.
“그러지 말고 참아.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찐 것 같다고 했었잖아. 후회하지 말고 마시던 차만 다 먹으면 나가자.”
“그것도 좋지. 나가서 빙당호로라로 하나 먹으면 되겠다.”
먹는 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수월이의 모습이 문약란은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먹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살이 안 찌는 것을 보면 놀랍기는 했다.
차를 마시던 수월이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 얘기는 들었어?”
“무슨 얘기?”
“도련님 얘기 말이야.”
수월이의 말에도 문약란은 전혀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무슨 얘기냐는 듯 눈까지 반짝거리고 있었다. 풍백에 관한 얘기라면 언제나 눈빛부터 달라지는 문약란이었다.
이런 문약란의 모습에 아무래도 주방 아주머니나 다른 사람들이 입단속을 한 것 같다는 걸 알아차린 수월이였다. 문약란이 풍백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시비들 사이에서는 대단할 것도 없는 얘기였으니까.
시비들은 풍백의 개망나니였던 모습을 워낙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서 그 누구도 풍백을 마음에 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문약란이 풍백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채고 몇 번이고 그런 그녀를 말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점점 제정신을 차리고 변해 가던 풍백이 이제는 적가상방의 구원자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자 은연중에 문약란을 응원하고 있었다.
문약란이 워낙 독보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으니, 혹시 풍백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무슨 얘긴데?”
“모르면 됐어. 대단치도 않은 얘기야.”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니까?”
“몰라도 괜찮아. 너무 별거 없어서 알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알려 줘.”
단호하게 말하는 문약란의 모습에 수월이는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빨리 대답을 하라는 듯이 상체마저 기울이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문약란의 모습에 대답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숨겨질 얘기도 아니기는 했고.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수월이는 빠르게 말했다.
“도련님이 금호상방 아가씨하고 만날지 모른대.”
“지, 진짜야?”
“들리는 말에는 그렇다고 해. 금호상방에서 온 사람이 상방주님하고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더라고.”
문약란은 수월이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런 문약란의 모습에 수월이가 얼른 말을 더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 도련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따로 말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안 하신다고 하셨을 거야.”
묵묵히 듣고 있던 문약란은 조용히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놨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크게 흔들리고 있어서 감정의 동요가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풍백은 상방의 후계자였다. 그리고 나이도 이제 스물세 살이었다. 그러니 언제든지 혼인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런데도 문약란은 풍백이 혼인을 할 거라는 걸 전혀 머릿속에 담고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봤던 풍백이 여인에게 관심을 두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산현에서는 풍백이 개망나니라 하면서 오히려 여자들이 피하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풍백이 오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며 기분이 나빴던 문약란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오히려 이런 소문이 고마웠다. 덕분에 그녀를 제외하고 누구도 풍백의 곁에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그렇게 걱정하던 일이 실제로 터졌다니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수월이는 문약란의 코앞에서 박수를 쳤다.
짝!
깜짝 놀란 문약란이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월이를 바라봤다. 그런 문약란의 시선에 수월이가 강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 이것아! 아무리 충격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을 거야?”
“그, 그러면 어떡해야 되는데…….”
문약란은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원래 청해상방의 여식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일개 시비에 불과했다.
그에 비하여 풍백에게 혼사를 넣고 있는 가문은 그 어디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으리라.
수월이는 이런 현실을 떠올리며 암담함을 느끼는 문약란을 바라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뭘 어떡해? 도련님 마음을 확 훔쳐야지! 어디서 혼사가 들어오더라도, 나는 우리 소란이가 아니면 안 된다! 소란이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 이렇게 소리칠 수 있게 말이야.”
“도…… 련님이?”
“우리 상방주님이 도련님을 정말 끔찍하게 사랑하시거든. 아마 내 아들이 도련님 같았으면 당장 쫓아냈을 텐데도 지금까지 봐주셨던 걸 보면 말이야. 그러니까 도련님이 너 아니면 죽는다고 하시면 어떻게든 잘될 수 있을 거야.”
수월이의 말에 문약란은 평소 풍백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월이가 말한 것처럼 풍백이 소리치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상상인데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도련님이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이 바보야! 남자는 원래 안 그럴 것 같다가도 확 내 남자로 만들면 온갖 창피한 일을 다 하는 법이야. 가만히 놔둬도 그런 짓을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수월이의 말에 문약란도 긴가민가했다. 워낙 바깥세상을 모르고 청해상방 내원에서만 지내왔던 그녀였기에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문약란은 정작 수월이도 아직까지 남자에게 손목을 잡혀 본 일도 없다는 걸 몰랐다. 그녀는 그저 남녀 간의 상열지사(相悅之事)를 다룬 책을 무척이나 많이 읽어 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때 굵직한 목소리 하나가 뒤에 있는 식탁 쪽에서 들려왔다.
“그건 사실이기는 하오. 원래 남자가 눈에 뭔가 쓰이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법이지.”
“꺅!”
수월이는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얼굴이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고우길이 앉아 있었다.
풍백은 아직까지도 고우길에게 문약란을 호위하도록 시켜 놓고 있었다. 청해상방이 언제 문약란을 노릴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따라다니며 호위를 해 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아저씨!”
빽 소리를 지른 수월이가 귀엽게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우리가 하는 얘기를 엿들었던 거예요? 그냥 호위만 하신다고 했잖아요!”
그 말에 고우길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으흐흠! 엿들은 것이 아니라 그냥 들린 거다. 귓구멍이 뚫려 있는 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아무튼 이 자리에서 들었던 얘기는 모두 잊어요. 알겠어요?”
“나도 눈치라는 것이 있는 사람이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남의 상열지사 사이에는 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
“흥! 조심해요. 나중에 말이 돌면 아저씨부터 괴롭힐 거니까요.”
수월이는 상방에서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대단히 인기가 많았다. 워낙 활달하고 밝은 성격 탓에 누구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런 수월이에게 찍히게 되면 아마도 내일부터 밥이 얼마나 부실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우길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번 찌릿하고 눈총을 쏘아 낸 수월이는 문약란과 조용하게 말하며 작당 모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도련님이 집에 있을 때는……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는 말이야……. 한 번씩 도련님이란 같이 나가 보자고…….”
책에서 봤던 온갖 상황에 대한 작전을 쏟아 냈다.
문약란은 그런 수월이의 얘기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집중해서 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전장의 장수가 엄청난 계책을 듣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한참 작당 모의가 끝나자 문약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최후의 방법을 써야지.”
“최후의 방법?”
“주방 아주머니가 그러는데, 단 한 번에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 방법이 있데. 근데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 있는 그런 방법이라고 하더라.”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몰라. 엄청 위험한 건가 봐.”
문약란은 나중에 꼭 주방 아주머니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수월이의 뒤에서 고우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떤 주방 아주머니요?”
궁금함을 못 이긴 고우길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수월이의 쨍쨍한 목소리가 다시 터졌다.
“아저씨! 끼어들지 말라고 했죠!”
문약란은 수월이가 고우길을 타박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곰곰이 그녀가 말했던 온갖 작전들을 다시 되새겼다.
세 사람은 서로 각자의 일들에 빠져 있어서인지 그들을 지켜보는 다수의 시선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