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01화
다시 상행을 시작하게 된 적가상방은 매일이 전쟁과 같았다.
“영강현(永康縣)으로 가는 상행이 어디야?”
“그거 출발했는데?”
“무슨 소리야? 방금 전에 쌀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왔구만!”
“아! 저쪽에 있는 거다!”
“똑바로 안 해?”
“물건 들어왔다! 이쪽으로 사람 좀 보내 줘!”
“여기도 바쁘다고!”
각 행수들의 지시에 따라 일꾼들이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상행을 나갈 준비를 하고, 상행을 마친 수레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풍백이 도지휘사에게 받아온 계약에 따라 적가상방에서 출발한 상행은 절강성 구석구석으로 향했다.
가까운 백호소가 목적지였던 상행은 이미 상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두 번째 상행을 나가기도 했고, 동남쪽 끝까지 가야 하는 상행은 장기 상행을 준비하기도 했다.
지금의 적가상방은 기존 나가던 상행을 하나도 나가고 있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오히려 이전보다 더 바빠진 상태였다.
도지휘사의 계약을 맺고 물품을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절강성에 있는 위지휘사사에서도 계속해서 계약을 맺고 싶다는 요청이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다보니 적가상방에서는 전부터 일하던 인원으로는 부족하여 계속해서 일꾼들을 충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워낙 많은 상행이 오가고 있어서 인원이 꾸준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적가상방이 바쁜 만큼 청송표국 역시 정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적가상방의 일을 도맡아서 해 오던 청송표국이지만, 너무 많은 상행이 지속적으로 계속 움직이면서 이들도 인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청송표국은 적가상방의 의뢰를 홀로 독점할 수 없다는 걸 느끼고, 인근에 있는 다른 표국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의뢰 수수료 약간만 받고, 적가상방의 상행 호위를 주선해 주는 것이다.
다른 표국에서는 이런 청송표국의 제안이 고맙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적가상방의 엄청난 물량을 독점하고 있는 청송표국을 보며 부러움에 손가락만 빨고 있던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언제까지 다른 표국에 의뢰를 돌릴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청송표국 역시 아주 의욕적으로 표국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청송표국이 인근 지역의 표국을 모두 불러들이면서도 정작 상산현에 있는 풍운표국엔 연락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풍운표국은 적가상방을 무너뜨리려 사력을 다하던 백건상방과 사돈지간이고, 심지어 백건상방과 손을 잡고 적가상방을 괴롭히기 위해 의뢰마저 거절했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덕에 적가상방의 의뢰를 받는 수혜를 인근 거의 대부분의 표국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풍운표국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적가상방주인 적호경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활기차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적가상방의 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풍백이 가져온 계약서 하나로 적가상방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이전보다 더 활기찬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적가상방이 많은 계약으로 바쁘게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모습이 기형적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당장 도지휘사사와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면, 다시 적가상방은 이전 절망적이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황궁에서마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어 죽어 나간다. 풍백과 도지휘사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몰라도, 안정적인 상방 운영을 위해서는 이전처럼 상행을 나갈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 백건상방은 적가상방을 노리고 가격 싸움을 계속 이어 나가는 중이었다. 청해상방이 계속해서 자금을 지원해 주는 이상,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물품이 필요한데…….’
누구나 원하고, 없으면 절대 살 수 없으며, 이것을 거래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물품이 상대 상방에 비하여 비싸다고 하더라도 살 수밖에 없는 그런 것 말이다.
적호경은 잠시 굳었던 얼굴을 폈다.
‘답이 없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좋은 방안이 나올 때까지는 지금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지금까지 위지휘사사와 백호소 등에서 받아 온 계약만 하더라도 몇 개월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청해상방의 자금 동원력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마르지 않는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멈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방주이기에 언제까지 낙관적인 생각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그래도 바로 며칠 전까지 몰려드는 계약과 끝없는 상행 때문에 정신이 없다가, 이제야 어느 정도 정돈이 되어 정신을 차린 상황이었다. 그러니 단 며칠만이라도 낙관적인 생각을 하며 쉴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일꾼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던 적호경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상방주님?”
옆에서 진덕양이 다가오며 말한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으나 그 목소리에는 잔뜩 놀리려는 마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입이 귀에 걸리도록 흐뭇하게 웃고 있는 걸 보니 하는 말입니다.”
그 말에 적호경이 자신의 얼굴을 만져 봤다.
사실 지금까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적호경이었다.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나서야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적호경이 짐짓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진덕양은 그런 적호경에게 다가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렇게 좋습니까?”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이겠습니까? 백아가 이렇게 멋들어지게 우리 상방을 구해 낸 걸 말하는 거지요.”
“구해 냈다고 하기는 힘들지. 그저 계약 하나 해 왔을 뿐이야.”
“그 계약이 지금은 적가상방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 그러고 보니 이 계약 전에 호초로 간신히 살아오고 있었는데, 그 계약도 백아가 가져온 거네요? 어이쿠! 그 전에 청송표국도 백아가…….”
“그만하게.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그 말에 진덕양이 장난기가 담긴 웃음을 함지박만 하게 지었다.
“그래서 좋습니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할 건 없지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좋네, 좋아! 그걸 꼭 듣고 싶나? 아주 골치 아픈 동생이었구만.”
투덜거리는 적호경의 말에 진덕양은 여전히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는 상방주님도 그리 좋은 형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이 매우 감사했다.
“이번에 백아가 돌아오면 거하게 칭찬을 해 줘야 하겠습니다.”
“글쎄…… 나는 좀 자제하는 것이 어떤가 싶네.”
“왜 자제를 합니까? 지금 상방을 구했다고 행수들부터 일꾼들까지 모두 백아에 대한 칭송이 자자합니다. 이제야 제대로 적가상방의 후계자 취급을 받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백아가 변했는데도 사람들의 시선이 미적지근해서 걱정 중이었는데 그건 참 다행이군.”
“그러니 더욱 칭찬을 해 주고 높여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하겠지만…… 혹시라도 너무 칭찬만 해 주다가 자만심이 들어차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돼서 말이네.”
진덕양은 그제야 적호경이 냉철한 상방주의 얼굴이 아니라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풍백이 어마어마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벌써 적가상방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 냈는지 모른다.
그러나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풍백은 손도 못 댈 정도로 상산현에서 최고의 개망나니였다. 거의 모든 사람이 풍백을 포기했었고, 진덕양은 물론이고 아버지인 적호경마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정신을 차렸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계속 칭찬과 추앙만 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도 계속 추앙만 받으면 자만심이 드는 판국에, 과거 개망나니라 불렸던 풍백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행여나 다시 이전처럼 술을 퍼마시며 정신줄 놓고 사고만 친다면…….’
이미 자신의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여실히 보여 줬던 풍백이었으니, 다시 개망나니가 된다면 아마 그 실망감은 이전과 달리 엄청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자네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알다마다요. 이럴 때일수록 더욱 냉정하게 공과를 논하며 다시 엇나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 어른들이 잘 지도해야겠지요.”
진덕양의 말에 적호경은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진덕양의 모습에 든든함을 느낀 것이다.
“그렇지. 우리가 잘 지도해 주도록 해야지.”
“그나저나 이 녀석은 우리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 돌아온다는 말은 아직 없는 겁니까?”
“나도 연락 받은 것이 없네. 무슨 일을 하느라 늦는지 몰라도, 이제 슬슬 돌아와 줬으면 좋으련만…….”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열려 있는 상방 대문으로 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거…… 백아 아닙니까?”
“맞…… 구만.”
“하하하! 자기 얘기 하는 줄 어떻게 알고 이렇게 딱 맞춰서 오는 건지.”
적가상방의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이 바빠서 지금 대문으로 누가 들어왔는지 제대로 확인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풍백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
“도련님?”
“도, 도련님이다! 도련님이 돌아오셨다!”
한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소리치자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고개를 돌려 풍백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도련님이 돌아오셨다!”
“도련님 만…….”
“야! 도련님이 아니라 소상방주님이라고 해야지!”
“아, 그렇지! 소상방주님 만세!”
“만세!”
“소상방주님 덕분에 저희가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풍백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풍백을 향해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보내며 풍백의 귀환을 환영했다.
적가상방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가족의 생계를 이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적가상방이 무너지면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한 사람들이란 말이었다.
적가상방이 한참 힘들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휴가를 가면서 얼마나 불안해했던가?
자신들이 다실 돌아올 수 있을지, 돌아왔는데 정작 적가상방은 현판을 내리고 더 이상 상산현에 없을 수 있다는 불안감마저 품었다.
그런 모든 불안감을 일거에 해소한 사람이 바로 풍백이었다.
이제 과거의 개망나니 적풍백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풍백은 적가상방의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해 왔고, 앞으로 적가상방을 이끌어 갈 소상방주였다.
풍백은 자신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며 한편에 있는 아버지 적호경과 진덕양 총관에게 다가갔다. 사람들 역시 풍백의 앞길을 비켜 주며 부자가 만나는 걸 방해하지 않았다.
적호경의 앞에 도착한 풍백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디 아픈 곳은 없지?”
“그럼요. 겨우 한두 달 떠났던 것뿐인데요.”
“그럼 됐다. 잘 돌아와 줬구나.”
어깨를 두드려 주는 적호경의 손길에 풍백은 뿌듯해졌다. 단지 어깨를 두드린 것뿐이라고 하더라도 풍백에게는 이런 사소한 손짓 하나하나가 다른 의미도 다가왔으니까.
“그러면 들어가서 자세한 얘기를 하자꾸나.”
“그것도 좋습니다만…… 일단 저것부터 어떻게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뭐를 말하는 건지…….”
풍백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적호경과 진덕양은 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수레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레가 끝도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수레에는 모두 똑같은 가마니가 실려 있었는데, 가마니가 생긴 모양만 봐도 저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저, 저건…….”
당황한 적호경이 뭐라 말을 하기 전에 진덕양이 냉큼 치고 들어와 더듬거리며 물었다.
“소금 가마니 아니냐? 대체 어디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소금을…….”
그런 두 사람을 보고 풍백이 웃으며 말했다.
“항주에서 일이 잘 풀려서 화오염장에서 나오는 소금 전매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소, 소금 전매권?”
“자, 잠까안! 그, 그 전매권이 내가 아는 그 저, 전매권이 맞는 거냐?”
어리벙벙한 얼굴이 된 두 사람의 물음에 풍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일단 제가 화오염장으로 가서 생산된 소금 중 일부를 이곳으로 가지고…….”
“너 이 녀석!”
누구보다 먼저 적호경이 풍백을 와락 끌어안았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이 기특한 녀석!”
적호경은 풍백의 등을 두드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풍백을 끌어안으려다가 오히려 적호경에게 밀린 진덕양은 이런 적호경을 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너무 칭찬을 하지 말고 자제하자고 하더니만…….’
물론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무려 소금 전매권이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