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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99화 (99/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99화

새벽같이 일어난 여만경은 지금 조금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근래에 상방 내분으로 인하여 밤마다 싸움이 벌어지는 통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그나마 이제 내분이 잠시 진정되었고, 어제 늦게까지 협의를 하느라 피곤해서 오랜만에 늦잠을 자려고 했던 여만경이었다.

그런데 이런 여만경의 계획은 새벽에 찾아온 부상방주로 인하여 모두 틀어지고 말았다.

‘제기랄! 어제 대충 협의를 끝냈으니 오늘 오전 중에 마무리하고 오후에 사람을 보내면 끝나는 일인 것을…….’

딱히 급할 것도 없을 텐데 이렇게 일찍 찾아온 부상방주가 짜증나서 일부러 최대한 천천히 준비하고 회의실로 향하는 여만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여만경의 태도는 회의실을 들어가자 심각하게 바뀌었다.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사방으로 눈알을 굴리는 부상방주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침착한 모습으로 협의를 해 나가며, 간혹 헛소리를 늘어놓는 총관을 진정시키던 부상방주였었다.

그런데 불과 하루만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지금은 거의 편집증에 걸린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여만경은 이런 부상방주의 상태를 짐짓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이렇게 새벽에 찾아온 것을 보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부상방주는 여만경의 물음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부상방주? 듣고 있나?”

“…….”

“이보게, 부상방주!”

탕!

“헉!”

여만경이 책상을 두드리기까지 하며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눈을 번쩍이며 여만경을 바라보는 부상방주였다.

“사…… 상방주님!”

“무슨 일인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던 부상방주는 마른침만 삼키다가 내뱉듯이 말했다.

“나, 나는 오늘 이곳을 떠날 거요.”

“떠나? 떠나다니? 어디로 떠난다는 건가?”

“이미 집에서는 수레에 짐을 실고 있소.”

“수레에 짐을 실어? 지금…… 서찰에 적힌 것처럼 수레 하나만 들고 이곳을 떠나겠다는 그런 말인가? 자네 미쳤나?”

부상방주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과거 흑도패였던 때와는 달랐다. 지금은 너무나 가진 것이 많았다. 이것들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어제 회의를 하면서도 수레 하나만 끌고 도망간다는 선택지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거의 폐인이 된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 부상방주가 떠나려고 수레를 챙기는 중이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떠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건가? 자네가 지금까지 모아 놨던 돈, 집, 부하들까지 모두 없던 일이 된다는 말이네!”

아무리 이들이 부자라고 하더라도 모든 재산을 은자나 금자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객잔이나 주점, 기루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장원이나 논밭으로 가지고 있기도 했다.

부상방주는 이런 여만경에게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것보다 목숨이 더 중하니까.”

“누가 목숨보다 중하다고 했나? 자네 아래에 무사들이 얼마나 있는데 이렇게 도망간다고 하나?”

“그놈들은 날 지켜 줄 수 없소!”

“아니, 왜?”

사실 여만경의 입장에서 부상방주가 그냥 떠나 준다면 박수를 치며 좋아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끝까지 붙잡는 이유는 무슨 일로 갑자기 태도가 변한 건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라도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 이걸 말해 주러 왔을 뿐이오. 혹시라도 내가 떠나는 걸 보고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할까 봐서…….”

부상방주는 이제 할 말이 끝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만경이 황급히 그를 불렀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대체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 말이라도 해 주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나?”

그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춘 부상방주가 여전히 초조한 얼굴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자, 잠을 자다가 뭔가 축축한 느낌에 일어났소. 그런데 침상이 전부 젖어 있었소. 그래서 이불을 제쳐 봤더니…….”

“그랬더니?”

“이불 속에 총관의 자, 잘린 머리통이 있었소.”

“……총관의 머리가?”

부상방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여만경에게 말했다.

“이미 자객이 있다는 걸 알고 무사들에게 내 방을 보호하라고 명령을 내렸었소. 그리고 내가 총관의 머리통을 찾았을 때도 무사들은 경계를 서고 있었고.”

“음…….”

“대체 자객은 어떻게 방으로 들어온 것인지, 무사들은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건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오! 그러니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당장 떠나는 수밖에 더 있겠소?”

* * *

“부상방주가 동해상방에서 떠났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편히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풍백은 밖에서 돌아온 고우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레 하나만 채워서 도망치고 있습니까?”

“네, 수레 하나만 끌고 상산현을 떠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자객이 무서워서 도망치면서 자신을 호위할 무사들도 대동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호위로 몇 명이나 데리고 있었습니까?”

“다섯 명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풍백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동해상방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단지 외부에 있던 무사들을 모두 불러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 거처를 감시하던 무사들도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돌아갔을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눈을 속이고 밖에 나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고우길의 말에 풍백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흐음…… 여만경은 끝까지 해보겠다는 말인가? 욕심이 제법 많은데?’

풍백이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본 고우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이제 여만경 상방주만 처리하면 끝나는 겁니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있지 않나요?”

“네? 처리할 사람이요?”

고우길은 문득 뭐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설마…….”

풍백은 무언가 알아챈 고우길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부상방주가 떠나고 난 이후, 여만경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래서 동해상방의 거의 대부분의 무사들을 동해상방으로 끌어모았다.

‘절대로 이것들을 모두 버리고 도망칠 수 없어. 차라리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물론 생각만 이렇게 했다는 것이지, 정말로 목숨을 내놓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말 돈과 목숨 중에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목숨을 선택할 테니까.

그래서 여만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바로 무사들로 인의 장벽을 펼쳐 암습을 막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서도 불안한 마음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의 귀에서는 계속해서 부상방주가 남긴 말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일단 포정사에게 원하는 모든 조건을 감수하겠다고 보고를 하는 것이 먼저야!’

이 모든 암살의 배후에는 포정사가 있다고 생각한 여만경은 바로 포정사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리곤 하루 종일 자신의 거처에 숨어 있으면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적어도 포정사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는 답답해도 이렇게 숨어 있을 참이었다.

끼익! 끼익! 끼익!

귀를 거슬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늦은 밤까지 계속 술을 퍼마시다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취했던 여만경이었다.

근래에 제대로 잠도 못자고 있던 여만경이었기에 절대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술까지 취해서 제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끝나지를 않았다.

끼익! 끼익! 끼익!

규칙적으로 들리는 나무가 비벼지는 듯한 소리.

평소라면 그저 무시하고 잠들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규칙적인 소리는 듣다 보면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자장가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 대단히 예민한 상태였기 때문인지, 규칙적인 이 소리마저 너무나 듣기 싫었다.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소리가 들릴 때마다 등줄기에 소름이 올라올 정도였다.

‘빌어먹을…….’

도저히 참지 못한 여만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두운 방 안에서 흐릿한 눈을 비비며 대체 어디서 이런 소리가 나는 것인지 찾았다.

여만경은 무인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단순한 흑도패였고, 지금은 상인의 탈을 쓴 흑도패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두운 밤에 불 하나 없는 방에서 이제 막 일어나 흐릿한 눈으로 무언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저것은 절대 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저게…… 뭐야?’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허공에 떠서 좌우로 천천히 왔다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귀신인가 싶어 화들짝 놀라 황급히 눈을 비비고 다시 본 여만경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흐…… 흐…… 흐아아아악!”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던 덩어리는 다름 아닌 부상방주였다. 부상방주는 목을 매고 혀를 거의 가슴까지 길게 뽑힌 상태로 눈마저 까뒤집고 죽어 있었다.

꿈에서 볼까 무서울 광경이었다.

우당탕!

집기들과 부딪치며 온갖 소리를 내며 거처에서 구르듯이 달려 나갔다.

그러나 거처에서 나온 그를 반겨 주는 건, 부상방주의 시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처마에 매달려 있는 무사들의 시신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일제히 흔들리는 무사들의 시신은 여만경이 극도의 공포 상태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다.

벌벌 떨며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던 여만경이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누, 누구…… 누구 없…… 누구 없느냐! 누구 없냐고!”

거의 절규에 가까운 여만경의 고함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황량한 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고함에 답해 줄 뿐이었다.

‘설마…… 설마 모두 죽었다는 말이야? 동해상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동해상방은 거대한 규모에 걸맞게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니…….

오줌마저 지리며 일어나지도 못해 기어가고 있는 여만경의 앞에 누군가의 다리가 보였다.

“히이익!”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있는 여만경을 보며 그가 말했다.

“많이 놀랐나?”

“너, 너는…… 적풍…… 백?”

“내 얼굴 잊어 먹지는 않았구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야행의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풍백의 모습은 대단히 이질적으로 보였다. 특히 그의 배경으로 목맨 시체들이 흔들리고 있으니 더욱 기괴했다.

여만경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 이 모든 것이 모두 네, 네가?”

“어때? 제법 즐길 만했었나?”

흉수가 누군지 알아챘지만, 분노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미 그의 뇌리에는 풍백에 대한 공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만경을 보며 풍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물었지?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 말을 듣자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풍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회도 줬었다. 수레 하나 정도 재물을 챙겨서 도망가겠다면 놔주겠다고. 나는 자비로우니까.”

풍백의 말을 듣자 무언가 떠오른 여만경이 신음성처럼 말을 했다.

“그렇다면…… 왜 부상방주를…….”

“기한을 넘겼잖아.”

“그게 무슨 말이냐! 부상방주는 서찰을 받고 바로 다음 날 떠났…….”

“보통 기한이 적혀 있지 않은 서찰을 받으면, 서찰을 받은 즉시 준비해서 떠나라는 말이지.”

그 말에 여만경이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정하는 거지.”

이를 악문 여만경이 크게 소리쳤다.

“그래서 상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인 것이냐? 일꾼들은 이곳에서 일한 것밖에 죄도 없거늘!”

“이야아! 흑도패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까 되게 신선하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 죽이겠다고 칼부림하던 놈이.”

“우리는 일반인에게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랬겠지. 일반 사람마저 죽이고 다녔다면 지현대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 말에 여만경은 대답을 못했다. 풍백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무사들까지는 다 죽였어도, 일꾼들은 죽인 적이 없어.”

“뭐, 뭐라고? 그러면 왜 아무도 나오지 않는…….”

“다 자고 있으니까. 너도 이거 알지?”

풍백은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서 보여 줬다.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뒷골목 흑도패나 사파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면제라는 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여만경 역시 꽤 자주 사용해 봤던 물건이니까.

“그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자고 있으니까, 어쭙잖게 일꾼들 걱정은 할 필요 없어. 그리고 네가 부리던 무사들? 어디 사파에서나 굴러먹던 놈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목숨이 소중하다는 엿 같은 소리만 지껄이고 있어?”

여만경은 입을 다물었다. 무력을 늘리기 위해 인성을 보지 않고 무사들을 끌어모아서 대부분이 사파 출신이라는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길게 말할 필요는 없고, 이만 끝내도록 하자.”

풍백은 진하게 웃으며 단검을 뽑았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단검을 보자 여만경은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이렇게 자신이 죽을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여만경이었다.

“나, 나를 죽이면…….”

“슬슬 해가 뜰 것 같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어련히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조용히 죽어라. 나도 여기 정리하고 집에 돌아가야 되거든.”

“히이익!”

여만경이 벌레처럼 바닥을 네 발로 기어가려고 했지만, 그런 여만경의 멱살을 잡은 풍백이 단검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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