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98화
“이런 미친놈이…….”
총관이 가장 먼저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곤 협박에 대한 분노를 토해 냈다.
“적가상방 애송이를 데려와서 죽여 버립시다! 우릴 뭘로 보고 이런 개소리를 늘어놔! 당장 그 자식의 목을 따서 문 앞에 매달아 놓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
길길이 날뛰는 총관을 보고 부상방주가 심각하게 말했다.
“그럴 수 없어.”
“무슨 소립니까! 설마 겁이라도 집어먹은 거요? 겁나면 빠지십시오! 내가 직접 목을 따 버릴 테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얘기를 뭘로 들었던 건가? 이 서신을 보냈다는 놈이 어떤 놈인지 어떻게 아냐는 말이네. 지현대인이라면 어떻게 비벼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상대가 포정사라면 어떻게 할 텐가?”
“그러면 어쩌자는 거요? 정말 이놈이 얘기한 데로 수레 하나만 끌고 도망치기라도 하자는 말이요?”
총관은 더 이상 부상방주에게 존대를 하지 않고 반존대로 낮췄다. 이것은 마치 이제 부상방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런 총관의 태도에도 부상방주는 강하게 압박하지 못했다. 아직은 여만경을 상대하려면 절대로 총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만경이 이런 총관에게 말했다.
“적가상방의 애송이 목을 딴 다음에는 어떻게 하려고?”
“그놈의 목을 따 버리면 이따위 서찰을 보낸 놈도 우리 의지를 알고 제대로 된 협상을 하자고 나올 것이다!”
“협상을 하지 않고 계속 암살을 한다면? 지금까지 이 서찰을 보낸 놈에게 죽은 행수들만 일곱이다. 이런 놈의 손에서 살아남을 자신이라도 있나?”
“더 이상 우리끼리 싸움을 벌이지 않고, 남아 있는 무사들을 총동원하여 보호를 하라고 하면 돼!”
“언제까지 그렇게 보호하고 있을 건데?”
“밤에만 보호하면 된다! 낮에는 암살을 벌일 수 없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에 무사들에게 암살자를 잡으라고 시키면 된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오게 된다.
지금 여만경이 그랬다.
총관이 이전부터 대책이 없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목표를 정하면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 정도이기에 돌격대장으로 써먹기 딱 좋았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정말 죽이고 싶은 놈이었다. 차라리 이놈이 먼저 죽었으면 부상방주와 편히 얘기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무사들이 찾으러 나서면 당장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잡혀 주고? 그리고 낮에는 왜 암살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데? 낮에 암살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닥쳐! 어차피 우리에게는 대안이 없다! 죽더라도 이렇게 초라하게 떠날 수는 없어! 이렇게 떠나느니 차라리 죽고 말 테다!”
여만경은 두 손을 들며 부상방주에게 말했다.
“난 포기했다. 네가 대답을 해 봐. 당신도 적가상방 애송이 목을 따고 끝까지 한판 벌이려는 생각인가?”
부상방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총관이 당장이라도 욕을 내뱉을 기색이었지만, 그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 부상방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기다리지.”
“부상방주!”
“잠깐 기다리자는 거야. 자네 의견이 무조건 틀리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 적풍백을 죽이겠다면 적어도 대책은 수립을 하고 일을 벌이자는 것이네.”
“으음…….”
“이 서찰을 보낸 놈도 당장 우리가 내일이라도 떠나기를 바라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부상방주가 이렇게 말을 하자, 총관은 성난 황소처럼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뭐라 말하지 못하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러면 대책을 생각해 보자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적풍백을 죽여야 한다면 그 이후 대처를 어떻게 할지 말이야.”
* * *
“망할 새끼들…….”
총관은 거칠고 빠른 걸음으로 밤거리를 걸으며 욕을 했다.
너무 늦은 밤이었기에 밤거리에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재수 없는 사람 하나가 어디에다가 화를 풀고 싶은 총관에게 곤욕을 치렀을 테니까 말이다.
당연하게도 회의는 총관이 바라던 식으로 풀려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손은 잡았던 부상방주가 여만경과 죽이 맞아서 이리저리 말을 맞추는 것을 보며 배알이 꼴려 미치는 줄 알았다.
오늘 회의에서 모든 결정을 끝낸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어느 정도 끝난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의 뒤에는 포정사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 두 사람은 내일이라도 당장 포정사에게 새로운 협상 안을 보낼 생각이었다.
이전에 포정사는 자신의 몫을 이 할로 올리려고 했었는데, 새로 보내는 협상안에는 포정사의 몫으로 무려 삼 할을 배당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일로 행수들이 모두 죽었다. 그렇기에 포정사에게 삼 할의 수입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칠 할의 수입을 셋이 나누게 된다면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다.
부상방주는 차라리 사 할을 넘기자고 하는 중이라 내일 다시 협의를 해야 했지만, 대략 이런 식으로 결론이 지어질 것이다.
총관은 이런 결론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멍청한 새끼들! 그 돼지 같은 포정사에게 삼 할이나 가져다 바친다고? 그 정도 돈이라면 차라리 우리가 당하는 것처럼 실력 좋은 자객을 구해 죽여 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연히 여만경과 부상방주는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렸고 말이다.
‘그렇게 포정사의 뒷구멍을 핥고 싶다고? 어디 한번 해 보라지. 네놈들이 그렇게 원하는 포정사가 과연 받아 줄지 말이야.’
이를 뿌득뿌득 갈아 대며 밤거리를 걷던 총관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풍백이 머물고 있는 객잔 별채를 감싸고 있는 담벼락 앞이었다.
마침 담벼락 인근에서 감시를 하고 있던 무사 하나가 총관을 보고 다가왔다.
“총관님?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신경 쓸 필요 없어.”
“네?”
“지금부터 내가 안으로 들어갈 건데, 그 이후부터 이곳에서 나는 소리는 모두 못 들었던 걸로 한다. 알겠나?”
“그렇지만…….”
무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하자 총관 뒤에 서 있던 무사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풍백을 별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는 무사들은 대부분 삼류무사에서 이류무인 초입에 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에 비하여 총관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모두 곧 일류고수에 진입할지도 모르는 고수들이었다.
감히 무력을 비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저쪽은 두 명이지 않은가.
“자, 잠시만…….”
무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으나, 다가온 총관의 호위무사들이 그를 제압하여 바닥에 처박았다.
총관은 땅에 처박힌 무사에게 다가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알아먹질 못하는 것 같군.”
“그, 그게…….”
“자네는 여만경에게 고용된 무인이었지?”
“그렇긴 합니다.”
“고용한 주인이 말을 들어 먹질 않으니, 그 밑에 있는 개 역시 귓구멍이 막혀 있는 모양이야. 자네들이 좀 뚫어 주겠나?”
총관의 말에 호위무사들 중 하나가 허리에서 도를 뽑았다.
땅에 처박혀 있던 무사는 찢어질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입은 다른 무사에게 막혀 있었기에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서걱!
깔끔하게 목을 잘라 무사를 죽이자 총관은 그 시체에 침을 뱉었다.
“퉤!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러니까 줄을 잘 섰어야지. 아니면 말이라도 잘 듣던가.”
총관은 별채를 감싸고 있는 담벼락을 여전히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날랜 몸놀림으로 넘었다. 흑도패였기에 삼류무공이나 간신히 배운 총관이었지만, 그래도 흑도패로 놀던 가락이 있는지 몸놀림이 꽤나 날랬다.
자신을 따라 담벼락을 넘어오는 호위무사를 보고 총관이 천천히 별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적가상방 애송이가 시체로 발견되어도 포정사와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지 두고 보자고.’
마음 같아서는 잘린 풍백의 머리를 내일 회의를 하며 두 사람에게 집어던지고 싶었으나 참기로 했다.
어차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기는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발견할 때까지는 그냥 놔둘 생각이었다.
나중에 풍백의 시체를 발견하고 여만경과 부상방주가 난리를 치더라도 끝까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해 줄 참이었다.
‘그러면 흐뭇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야지.’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풍백이 시체로 발견되면 더 이상 자신의 내놓은 의견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예쁜이가 있었지? 산 채로 한입에 털어 넣어도 비리지 않을 것 같았었는데, 오늘 이 몸이 직접 맛을 봐 주지. 흐흐흐!’
살기등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총관은 기이한 열망이 가득한 눈으로 별채를 바라보며 걸었다.
그런데 몇 걸음 걸어가던 총관이 걸음을 멈췄다. 담을 넘어온 호위무사들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뭐하는 거야?’
그는 혹시라도 소리를 내면 풍백의 호위무사인 고우길이 나올까 싶어, 소리를 내지 않고 호위무사들을 향해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나 호위무사들은 총관의 손짓에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놈들이 갑자기 미쳤나?’
대답도 하지 않는 호위무사들의 행태에 어이가 없어진 총관이 다시 호위무사들을 향해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총관이 두 걸음도 내딛기 전에, 허리춤이 뜨끔한 느낌이 들더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 이, 이게 뭐야?”
꼼짝도 하지 않는 하체에 더럭 겁이 난 총관이 부지불식간에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긴 뭐야, 점혈(點穴)이지.”
“누, 누구냐!”
“누구겠냐? 누구 때문에 여기 살고 있는 사람이겠지.”
고개를 돌려 보니 건들거리는 모습으로 서 있는 풍백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 풍백을 봤을 때는 겁을 먹고 벌벌 떨던 모습만 기억에 남아있던 총관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건들거리는 모습으로 서 있는 풍백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저…… 적가상방 애송이?”
“아하! 날 지금까지 그렇게 불렀었어? 적어도 내 연기가 아직은 잘 먹힌다는 말이겠네. 망할 왕삼이가 이 정도만 연기를 해 줬어도 좋을 텐데.”
풍백은 마치 산보라도 하는 듯한 걸음으로 점혈을 당해 꼼짝도 못하고 있는 총관의 호위무사들에게 다가섰다. 그리곤 두 사람 허리에 매달려 있는 각자의 검과 도를 뽑아 들었다.
“너희 방금 전에 사람 죽이는 모습이 참 대담하더라. 사람 꽤나 잡아 본 백정 같던데?”
그 말에 호위무사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미 아혈(啞穴)까지 점혈된 상태이기에 입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겁에 질린 눈을 크게 뜨며 거칠게 코로 숨 쉬는 소리만 내는 것뿐이었다.
피식 웃은 풍백은 그들의 검을 그대로 부드럽게 서로의 심장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끔찍한 고통에 눈가의 살을 파르르 떨던 호위무사들은 그렇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자신의 병기에 심장이 뚫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모습을 덜덜 떠는 모습으로 바라보던 총관이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풍백이 먼저 말했다.
“소리치려고? 목에 느껴지는 것 없어?”
튀어나오려던 소리를 삼킨 총관은 그제야 자신의 목에 단검 하나가 닿아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덜미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어떻게 할까요?”
풍백의 호위무사인 고우길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킴 총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였구나. 네가 우리를 죽이고 있었어.”
“맞아.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어 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어.”
오랜만에 암살을 다니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던 풍백이었다.
“그런데 말이 짧네. 미쳤구나?”
“나는 동해상방의 총관이…… 헙!”
두툼한 고우길의 손이 입을 막더니 들고 있던 단검이 총관의 팔뚝에 박혔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 자신이 흑도패였던 때가 떠올랐다.
그가 단순한 흑도패였을 때, 고우길과 같은 호위무사는 사신과 같았다. 그 혼자만으로 흑도패 하나를 몰살 시킬 수 있을 정도니, 흑도패에게는 고우길과 같은 고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동해상방을 만들고 엄청난 돈을 손아귀에 쥐면서 오히려 이런 고수들을 자신이 부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고수를 별것 아닌 것처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고수이라고 하더라도 돈만 있으면 머리를 조아리는 것들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팔뚝에 단검이 박히며 뇌리를 관통한 고통은 잊고 있던 기억을 순식간에 불러일으켜 주었다.
“비명 지르면 죽는다? 알겠어?”
입이 막힌 상태로 눈물을 질질 흘리며 총관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고우길이 손을 치워 줬고, 총관은 눈물 섞인 신음성을 흘렸다.
“우으으으…….”
“그러면 오늘 회의 내용에 대해서 하나씩 얘기해 봐. 참고로 거짓을 말할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해. 대략적인 내용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감히 반항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총관은 고통을 참아 가며 오늘 회의실에서 있었던 모든 내용을 순순히 털어놨다. 흑도패의 본모습으로 돌아온 총관은, 흑도패가 항상 그러는 것처럼 비밀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포정사를 의심한다니 웃기네. 그냥 일 좀 편하게 하려고 마지막 살길을 열어 줬을 뿐이었는데.”
“으흐흑…… 잘못했습니다. 바로 떠나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세등등하여 포정사까지 우습게 보던 자신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 총관의 모습은 그저 비루먹은 개새끼일 뿐이었다.
풍백은 그런 총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아! 생각났다. 너 그 새끼였구나?”
“……예?”
“야밤에 숨통을 끊어 주겠다고 말했던 놈이 너잖아.”
“헉! 그, 그게 아니라…….”
“그리고 뭐라고 했었지? 내 시비를 보고 맛깔나게 생겼다고 했던가? 건방지게 말이야.”
뒷말은 분명 풍백이 회의실을 나간 이후에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걸 풍백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그, 그건 제가 죽을죄를…….”
“그래. 죽을죄를 지었으니 그냥 죽어. 네 시체는 내가 잘 써먹어 줄게.”
풍백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음 총관이 당장 고함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총관의 시도는 다시 그의 입을 막은 고우길의 두툼한 손에 막혔다.
그리고 풍백이 다가오더니 고우길의 손에서 단검을 받아 빙긋 웃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