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96화
동해상방 회의실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해상방주 여만경을 필두로 한 세 명의 행수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총관은 가벼운 불만을 보이는 정도였을 뿐이고, 부상방주는 지금 상황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얼굴에 한껏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여만경이 이내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오늘 아침부터 회의를 한다고 미리 말을 했건만.”
그의 말에 부상방주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섰다.
“아마도 어제 적가상방 애송이 놈을 잡아 놓으면서 마음이 풀려 한잔하고 자는 모양이지요. 뭐, 항상 보던 모습 아니었습니까.”
“킁! 사행수는 왜 항상 우리 칠행수와 술을 먹는지 모르겠구려.”
총관이 부상방주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했지만, 부상방주는 그런 총관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상방주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제 사행수가 제법 수고를 했나 보군. 칠행수가 이전보다 꽤 불만이 많아 보이던데, 이대로 내 쪽으로 넘어오기만 한다면…….’
부상방주는 은밀하게 눈을 반짝이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만경을 슬쩍 바라봤다. 이제 곧 저 자리에 적어도 나란히 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씩 벅차 오기 시작했다.
이런 시선을 받고 있던 여만경은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일단 우리끼리 회의를 하도록 하지. 포정사에게 협상을 다시 제시하려면 지금부터 우리끼리 협의를 서둘러 끝내야 할 테니까.”
“두 행수가 참석하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협의를 합니까?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 저를 비롯한 다른 행수들이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부상방주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애초에 포정사에 목맬 필요가 없다고 의견을 내놨지 않습니까. 황궁에 선만 대면 끝나는 일인 것을…….”
“황궁에 선을 대는 것이 쉽겠나? 그 전에 포정사가 무슨 일을 벌일지 어떻게 알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상방주님과 동의합니다. 벌써 전매권을 적가상방으로 넘기면서 우리에 대한 압박을 시작한 상황입니다. 총관의 말처럼 황궁에 선을 대기에는 시간이…….”
언제나 그랬듯이 또다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열성적으로 얘기하는 세 사람과 달리, 다른 행수들은 벌써부터 얼굴에 지겹다는 무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지겨운 회의를 마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부상방주는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이며 곧 사행수가 나타나 자신에게 어제 칠행수와 만났던 얘기를 꺼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자고 있었겠지. 이제 점심시간도 지났으니 곧 나타날 거야.’
부상방주는 혹시나 칠행수가 자신에게 붙는다고 사행수와 함께 오는 것은 아닌지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대로 부상방주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기다리고 있던 사행수가 아니라 총관이었다.
부상방주와 단둘이 독대를 하는 총관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자리에 앉아서도 다리를 달달 떨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뭔가 일이 벌어진 것이라 짐작하기 충분했다.
부상방주는 짐짓 여유 있는 목소리로 총관을 불렀다.
“무슨 일이기에 총관이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것이오?”
그 물음에 총관은 이를 으득 갈며 대답했다.
“드디어 여만경, 이 개자식이 일을 벌였소.”
“……그게 무슨 말이오?”
“사행수와 칠행수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쨍그랑!
예상치도 못한 말에 부상방주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놓쳤다. 그러나 깨진 술잔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급히 물었다.
“시, 시신? 시신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어떻게? 어디서 시신을 발견했다는 것이오?”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은 듯하여 이리저리 두 행수를 찾아보니, 두 사람의 시신이 소금 창고에 있는 소금 속에 묻혀 있는 걸 찾고 말았습니다.”
부상방주는 눈을 부릅떴다.
사람을 죽이거나 거의 죽도록 만든 다음에, 그것을 소금에 묻어 버려 마무리를 하는 것은 여만경이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죽이지 않고 대놓고 놔두는 방법은 보통 상대를 협박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여만경이었다.
그렇기에 소금에 묻혀 있던 시신을 찾았다는 말은, 총관의 말처럼 충분히 부상방주와 총관을 압박하기 위한 여만경의 수작으로 보였다.
“대체 왜! 왜 하필이면 지금 수작을 부린다는 말인가!”
“전매권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달리 생각을 해 보면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음…….”
총관의 말이 맞았다.
당장 포정사와 문제가 있기는 해도, 전매권을 가지고 있는 풍백이 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러니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취해야 할 행보가 세 개로 나눠진 상황이라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여만경이 독한 마음을 품고, 부상방주와 총관을 찍어 낼 생각을 품었을 가능성이 너무나 다분했다.
그러나 부상방주는 조금 더 상황을 두고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다면 과연 총관은 믿을 수 있는 건가?’
어쩌면 총관이 사행수와 칠행수를 죽이고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이미 칠행수가 점차 자신에게 기울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니 총관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총관은 곧 배신할 칠행사와 사행수까지 죽여 버리고, 이 모든 짐을 여만경에게 넘겨 버린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도박과 같은 수일지는 몰라도 이번 일을 기회 삼아 자신과 손을 잡으며 다른 기회를 노릴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총관은 이런 의심을 하는 부상방주에게 서둘러 말했다.
“고민하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서둘러 사행수와 칠행수의 세력을 흡수해야 합니다! 여만경이 나서서 그들마저 흡수를 한다면…….”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대를 의심하는 것은 사행수와 칠행수의 세력을 흡수한 이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총관은 가서 칠행수의 패거리들을 인솔하게! 나는 사행수 쪽으로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 * *
여만경은 잔뜩 화가 나서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욕을 내뱉고 있었다.
“이런 개 같은 놈들! 지금이 얼마나 다급한 상황인지도 모르고 이렇게 시간만 끌고 있다니!”
거의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 회의를 했음에도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 아무리 포정사와 협상을 다시 하는 쪽으로 가려고 해도, 부상방주와 총관이 반대하고 있으니 아무런 결론도 낼 수 없는 것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매일이 이런 상황이었으니까.
그래도 소금 전매권이 적가상방으로 넘어간 것을 봤기에 혹시 부상방주와 총관의 생각이 달리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오판이었다.
그 덕에 점심식사도 거의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여만경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해 집무실을 짜증난 걸음으로 걸어 다녔다.
이런 여만경의 집무실로 이행수(二行首)가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상방주님! 상방주님!”
자신의 모사(謀士)라 할 수 있는 이행수가 이렇게 다급히 들어오는 것을 본 여만경이 뭔가 불길함을 느끼며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다급히 들어오는 것이오?”
“큰일 났습니다! 사행수와 칠행수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그놈들이 왜 시신으로 나타난다는 말인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소금 창고에서 소금에 묻혀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여만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의 수법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였다는 말만 들어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눈앞에 훤히 보였다.
“부상방주와 총관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총관이 시신을 발견하고 부상방주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저도 비슷한 시기에 보고를 받고 바로 상방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빌어먹을!”
“상방주님, 설마 진짜로 사행수와 칠행수를 죽이신 건…….”
“내가 미쳤소? 그놈들을 죽이면 당장 부상방주와 총관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아는데!”
“그렇다면 역시 다른 행수들이…….”
이행수가 눈을 굴리며 여만경과 손을 잡은 다른 행수를 떠올렸다. 평소 이들이 여만경에게 보이는 충성심을 생각하면 독단적으로 충분히 일을 벌였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행수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가 했는지 이제는 중요하지가 않지. 저들은 분명히 내가 죽였을 거라고 낙인을 찍었을 테니까.”
“네? 하지만 증거도 없이…….”
“증거가 중요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부상방주나 총관이 스스로 사행수와 칠행수를 죽인 걸지도 몰랐다. 이것을 계기로 서로의 세력을 합치는 계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행수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급히 말했다.
“만약 상방주님의 말씀이 맞다면, 지금 당장 사행수와 칠행수가 데리고 있던 세력을 흡수해야 합니다! 발언권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세력을 흡수해야 조금이라도 저들의 우위에 설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여만경이 다급히 말했다.
“바로 사행수와 칠행수의 세력을 흡수하도록 하시오! 다른 행수까지 불러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이행수가 다시 집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여만경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어떤 놈이 이런 더러운 수작을……. 이 중요한 시기에 뭉치지도 못할망정 사고를 쳐?”
으드득!
이를 갈던 여만경의 눈에 결심이 서렸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그러니 이제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여야했다.
* * *
풍백은 자신의 방에서 무공 수련을 하다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별채 밖에서 수련을 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동해상방의 감시를 받는 입장이니 무공 수련은 이렇게 방에서만 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방이 커서 그럭저럭 무공 수련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점이었다.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풍백이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며 고우길이 들어왔다.
고우길은 풍백의 앞에 와서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확인은 해 보셨습니까?”
“동해상방 무사들이 주변에 많이 있어서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주변을 탐문하며 확인을 해 봤습니다.”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이 풍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도련님의 말씀대로 동해상방은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사행수와 칠행수가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그들의 세력을 서로 흡수하려고 나서는 통에 하마터면 전면전이 벌어질 뻔 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풍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오? 그것참 재미있는 얘기군요.”
아마도 이럴 것이라 예측은 했었다. 처음부터 이들의 불화를 끌어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암향거에서 얻은 동해상방에 관련된 자료를 읽어 보면서 부상방주에 속한 사행수와 총관에게 속한 칠행수가 중요한 열쇠고리가 될 것이라 예측했기에 이들부터 처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장 전면전이 벌어질 상황까지 갈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했었다. 아무리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같이 동해상방이라는 울타리에 속해 있던 사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결국 흑도패는 흑도패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수습됐다고 합니까?”
“사행수의 세력은 부상방주가 대부분 수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칠행수의 세력은 여만경 쪽으로 붙었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은 칠행수의 패거리가 여만경 쪽으로 합류한 것에 대해…….”
고우길은 다시 변한 세력 분포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와 근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풍백이 고개는 끄덕이고 있어도 딱히 관심을 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누구 세력이 조금 더 강해졌다는 이야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 봐야 남은 여덟 명을 제외하고 발언권이 추가로 생긴 것은 아니니까.
‘그러면 이 상황에 기름을 뿌리고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네.’
풍백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