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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95화 (95/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95화

축시(丑時, 1시~3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어두운 하늘 중천에서는 달이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풍백은 불이 꺼진 방에서 침상 아래에 있던 꾸러미를 꺼내 풀었다. 꾸러미에서 가장 먼저 나온 건 어두운 밤에 동화될 수 있는 검은색 야행의(夜行衣)였다.

야행의를 입은 풍백은 두 개의 단검을 챙기고, 양쪽 손목에 팔찌를 찼다. 검은색으로 된 팔찌에는 역시 검은색 실이 감겨 있었는데, 그 끝에는 작은 납은 된 추가 달려 있었다.

비행추(飛行錘)라 불리는 이 팔찌는 양상군자(梁上君子)라 불리기도 하는 도둑이 주로 사용하는 물건으로, 손이 닿지 않는 높이의 처마에 오를 때 쓰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도둑이 아닌 사람들이 이 물건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이들은 대부분 자객(刺客)이었다.

풍백은 이것 외에도 작은 쇠꼬챙이처럼 생긴 한 뺨 길이의 작은 단창(短槍)을 팔뚝에 착용하기도 했고, 바닥에 뿌려 사람이 밟으면 깊은 상처를 입이는 철질려(鐵蒺藜)를 챙기거나 작은 병들로 된 것들까지 챙겼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쉽네. 원래 내가 사용하던 물건들을 사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과거에 풍백이 사용하던 물건들은 그가 직접 주문해서 만든 물건으로, 이런 암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은 비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교사(絞絲)만 하더라도 무려 천잠사로 만든 것이었기에 어지간히 예리한 날붙이가 아니라면 자를 수도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암시장에서 구한 것들이라 이 정도로 만족을 해야 했다.

검은 두건을 뒤집어 쓴 풍백이 가볍게 발을 굴러 대들보로 뛰어올랐다. 그리곤 단검을 꺼내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천장에 구멍을 내고는 기와를 소리 없이 하나씩 치우고는 지붕으로 빠져나갔다.

지붕에서 몸을 낮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객잔의 별채 주위로는 제법 넓은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객잔 담벼락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어도, 그 주변을 십여 명의 동해상방 무사들이 곳곳에 자리하여 보초를 서는 모습이었다.

‘역시 보초를 세워 놨네.’

혹시나 풍백이 밤을 틈타 도망치지 않을까 감시를 하는 것이다.

풍백은 가볍게 지붕을 박차고 경공을 펼쳤다. 별채를 감시하고 있던 무사들은 풍백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도 모르고 가만히 있었다.

별채를 빠져나와 사뿐히 옆 건물 지붕에 내려선 풍백은 여전히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무사들을 보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고는 이내 소리도 없는 발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 * *

“망할 새끼…… 지가 뭐라고 손을 대지 말라고 지랄이야?”

동해상방의 일곱 행수 중 가장 마지막에 자리한 칠행수(七行首)가 불만을 토해 냈다.

문약란을 보고난 이후 몸이 달아서 안달이 난 칠행수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객잔으로 뛰어가 확 덮치고 싶었지만, 여만경의 압박에 그럴 수 없어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루를 찾았다.

그렇게 옆에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달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계속 낮에 봤던 문약란의 신비롭게 빛나던 초록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럴수록 칠행수는 결국 옆에 끼고 있던 기녀가 너무 박색처럼 느껴져 기분이 잡쳤다. 결국 칠행수는 옆에서 아양을 떨던 기녀를 모두 물러가라고 신경질을 부리고 말았다.

칠행수가 생각했을 때는 이제 풍백은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판단됐다. 낮에 보였던 모습을 떠올리니 그 자리에서 오줌이라도 지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굳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것을 보면, 다른 행수들이 얘기했던 것처럼 여만경이 먼저 손을 대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

이런 칠행수의 마음을 아는지, 그와 같이 술을 마시던 사행수(四行首)가 거칠게 잔을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맞습니다. 저도 옆에서 들으면서 어이가 없었다니까요. 자기가 상방주라고 불리니까, 아주 우리를 수하 보듯이 하는 것 같단 말입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요! 지가 상방주라 불리는 게 전부 우리가 용인해 줬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는 말이요!”

“모르는 게 아니라…… 잊어먹은 것 아닐까요?”

“잊어먹어?”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미 상방주 자리에 오른 지 몇 년이나 지났고, 포정사와 대화는 대부분 여만경이 했으니 이제는 자기가 진짜 상방주라도 된 것처럼 지랄하는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사행수의 말에 칠행수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미 말했듯이 동해상방은 열 개의 흑도패가 모여서 만든 상방이다.

세 명의 사람이 모이면 그중 두 명은 패거리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동해상방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현재 동해상방은 총 세 개의 패로 뭉쳐 있었다.

하나는 동해상방주인 여만경을 위주로 세 명의 행수가 패를 이뤘고, 다른 하나는 부상방주를 중심으로, 마지막 하나는 총관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여만경은 자신까지 포함하면 네 개의 흑도패가 모인 것이기에 동해상방 내에서는 가장 강력한 무력과 금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유지하던 동해상방은 얼마 전부터 점차 균열이 커지고 있었다.

부상방주는 포정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가 바라던 것처럼 소금 수입의 이 할을 넘기는 조건을 반기고 있었다. 무려 종이품의 고관을 상대로 협상을 한다는 것 자체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하여 총관은 아예 포정사를 배제하고, 차라리 황궁에 직접 선을 대는 것은 어떠냐는 말하고 있었다. 황궁 육부(六部)의 상서(尙書)와 선을 대면 포정사 역시 자신들에게 간섭하거나 압박을 넣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여만경은 이런 부상방주와 총관과 달리 포정사와 다시 협상을 하는 방법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서로가 바라는 것이 다르니,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속으로는 꽤나 많이 곪아 가고 있는 것이 현재 동해상방의 모습이었다.

당장 사행수만 하더라도 부상방주의 패거리에 속해 있었는데, 총관의 패거리에 속한 칠행수를 자신들에게 끌어들이기 위해 오래전부터 꽤나 친밀하게 지내며 은근히 꼬시는 중이었다.

사행수는 칠행수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그러니 이쪽에 붙는 것이 어떻습니까? 칠행수가 결단을 내리기만 하면, 당장 부상방주가 여만경을 밀어내거나, 밀어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상방주를 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여만경 역시 함부로 하지도 못할 거고요.”

“그러면 총관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어차피 총관은 너무 이상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황궁 육부의 상서와 선을 댄다? 세상에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을 대고 싶어도 댈 수 없는, 하늘 위 고고한 위치에 있는 게 바로 상서가 아니겠습니까.”

“흠…….”

“그리고 총관이 칠행수님을 얼마나 챙겨 줍니까? 실제로 동해상방을 만들기 전부터 총관의 패거리와 사이도 안 좋지 않았습니까.”

사실이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손을 잡고 있는 관계지만, 이전에는 총관의 흑도패와 구역 문제로 칼부림 꽤나 했던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어쩔 수 없이 밀리지 않기 위해 손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총관은 칠행수를 꽤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얼마 전에는 이행수(二行首)와 무슨 밀담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자신을 부르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물론 이런 일은 술기운에 막 정할 정도로 칠행수가 정신이 나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충분히 고민을 해 보시지요. 우리 부상방주님은 얼마든지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칠행수님이 대국적인 생각을 하며 이쪽으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술이나 마십시다.”

“여만경, 이 개 같은 새끼!”

“맞습니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언젠가는 확! 목을 따 버릴 테다!”

“저는 그놈의 사지를 자르도록 하지요!”

칠행수와 사행수는 잔뜩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걸으며 연신 여만경 욕을 내뱉었다. 얼마나 취했는지 갈지자를 만들며 걷는 그들은 당장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취한 상태에서도 얼마나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칠행수이 왼쪽으로 휘청이면 사행수가 잡아 주고, 사행수가 오른쪽으로 휘청이면 칠행수가 잡아 주고 있었다.

“어? 잠깐!”

“응? 왜 그러십니까?”

“소피(所避)가 좀 마렵네.”

“으히히히! 소피는 무슨 소피입니까? 그냥 오줌이라고 합시다.”

“크흐흐흐! 그래, 오줌이 마렵소.”

“여기서 싸고 갑시다. 나도 같이 싸면 되니까.”

그러더니 두 사람이 길 한쪽에서 하물을 꺼내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뒤에서 조용히 따라가고 있던 네 명의 무사들은 휘청거리는 그들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아주 가관이구만.’

‘정말 더러워서 못 살겠군. 그냥 여기를 떠나서 다른 상방을 찾아갈까?’

‘이 새끼들이 흑도패 출신이라더니, 술 처먹고 하는 꼴도 가관이야.’

네 명의 무사들이 굳이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뒤로 물러섰다. 특히 그들 중 칠행수의 호위무사 두 명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곤 몇 걸음 더 물러서서 담벼락까지 물러섰다.

호위무사 하나가 담벼락에 등을 기다며 나지막이 말했다

“못해 먹겠네.”

“보수가 좋잖아.”

“그래도 이런 꼴을 보면서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흐흐…… 내가 이전에 보수가 좋아서 사파에 잠깐 들어갔던 적이 있는데, 거기보다 여기 보수가 더 좋아.”

“나도 알아. 보수라도 좋지 않았으면 당장 원래 놀던 곳으로 갔을 거야.”

“전에는 어디에 있었는데?”

“나도 사파에 있었지. 아마 여기에 있는 무사들 중 대부분이 사파 출신일걸. 아니면 어디서 사고 좀 친 놈이든지.”

“그렇겠지? 과거 출신 안 보고 실력만 본다고 해서 대부분 사파 출신인 것 같더라.”

“호위무사로 있으니, 이전과 달리 사람 피 맛을 너무 못 보고 있어. 검에 녹이 슬 것 같아.”

“검에 피 좀 묻히고 싶으면 뒷골목이라도 가 봐.”

그렇게 두 사내가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태연하게 살벌한 얘기를 나누던 그때였다.

따끔!

갑자기 그들의 등 뒤로 뜨끔한 느낌이 전해졌다.

화들짝 놀란 두 사내는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뜻대로 목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에 대경실색하여 발버둥을 치려 해지만, 뒤이어 등에 있는 신주혈(身柱血)을 시작으로 몇 군데 혈이 뜨끔해지는 느낌과 함께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혈도를 제압당한 것이다.

동시에 우악스러운 무언가가 숨통을 조여 오는 감각에 두 사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컥! 뭐, 뭐야!’

소리를 치려고 했으나, 숨통이 잡혀서 바람 새는 소리도 입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두 호위무사가 눈알을 굴려 보니, 담벼락이 만든 그늘 속에 야행의를 입은 사내가 두건 사이로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자신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적이다!’

무사들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곧 그들은 점점 의식을 잃어 갔다.

조용히 숨이 끊어진 무사 두 명은 곧 풍백에 의해 담벼락 너머로 끌려갔다.

이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는 칠행수와 사행수는 바지춤을 추스르고 다시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행수의 무사들은 칠행수의 무사들과 서로 챙겨 줄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그들이 조금 더 뒤로 떨어지는 걸 봤고, 굳이 고개를 돌려 그들이 쫓아오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덕분에 누구도 두 사람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사행수와 칠행수는 모두 잠에 빠져들 시간임에도 휘청이며 걷는 중에 세상이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두 사람이 커다란 나무 아래를 지나갔다. 그리고 곧 사행수의 호위무사 두 명 역시 나무 아래를 걸어가고 있었다.

‘……뭐야?’

그때, 한 무사는 마치 거미줄 같은 것이 목덜미에 걸쳐지는 듯한 느낌에 손을 들어 목을 쓰다듬으려고 했다.

그 순간, 숨통이 막혀 오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커헉!’

목을 마치 예리한 칼로 베어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크게 당황한 무사가 손으로 목을 긁어 봤지만, 손가락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이미 그의 목을 휘감고 있는 실이 살을 파고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 도와줘!’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고 해도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고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무사는 버둥거리며 자신의 동료를 눈으로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앞에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사행수와 칠행수만 보일 뿐, 그의 동료는 보이지가 않았다.

‘대체 어디…….’

분명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어가던 동료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옆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힘겹게 눈을 돌려 보니, 그가 찾던 동료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에 목이 매달려 버둥거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만 이것에 잡힌 것이 아니었다.

동료는 목을 파고든 무언가에 피부가 갈라지며 피를 분수처럼 쏟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알려 주듯이 계속 버둥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사는 자신 역시 동료와 같은 모습일 거라 생각하며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을 수 없어!’

무사가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덜덜 떨리는 손을 허리춤에 있는 검을 향해 뻗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제야 자신에게 검이 있다는 걸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손이 검에 닿기 전, 무사는 뒷덜미에 있는 대추혈(大椎血)에 무언가 박히는 걸 느꼈다. 대추혈은 대표적인 사혈(死血) 중 하나였기에 검을 향해 손을 뻗던 무사는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자신들을 수행하는 무사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도 모르는 사행수와 칠행수는 여전히 어깨동무를 한 채 휘청거리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바빴다.

나무 위에 있던 야행의를 입은 사내는 무사들의 뒷덜미에 박힌 단검을 수거하고 나무에서 뛰어내려 지면에 내려섰다.

마치 고양이가 뛰어내린 것처럼 소리도 없이 내려선 사내는 천천히 앞에서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걸어가는 사행수와 칠행수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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