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가상방 개망나니-94화 (94/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94화

풍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고?”

“존대는 꼬박꼬박 붙이는 것이 좋을 거야, 이 애송이 새끼야.”

여만경의 말에 풍백이 움찔했다.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여만경의 말은 그냥 위협으로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여만경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던 풍백이 입을 열었다.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요. 포정사께서 여기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모르는 것이오?”

“포정사는 무슨 니미. 네가 여기서 도망쳐서 포정사한테 이르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여기서 네 내장을 세상 구경시켜 주는 것이 더 빠를까?”

험악한 말에 풍백이 다시 한번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걸 본 여만경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책상에 올려놓았다. 시퍼렇게 빛나는 날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다시 한 걸음만 움직여 봐. 딱 한 걸음만.”

“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소? 포정사께서…….”

“아직 혓바닥이 짧아. 내가 손수 뽑아 버리기 전에 제대로 해. 그리고 앉으라고 했다.”

풍백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부릅뜬 눈으로 여만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분명 포정사께서 귀공(貴公)의 행동을 알게 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풍백의 공손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만경은 한껏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포정사 새끼가 어떻게 알겠냐? 네가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

“아참! 여기 상산현을 떠나면 바로 주둥이를 나불거리러 떠나겠구나? 음…… 그러면 안 되지. 그 전에 혓바닥을 잘라 버릴까?”

여만경이 책상에 올려놓은 단도를 집으며 말하자, 풍백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그 모습을 본 여만경은 겉으로는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속으로는 잔뜩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여튼 돈만 주물러 봤던 상인 새끼들은 제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애새끼처럼 된다니까.’

처음부터 제대로 협상을 하거나, 풍백에게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던 여만경이었다.

사흘에 걸친 동해상방 내부 회의 결과, 흑도패 때처럼 풍백을 협박하는 걸로 결론을 냈었던 여만경과 동해상방 중역들이었다.

만약 풍백이 무사를 잔뜩 거느리고 왔다면 고민을 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풍백은 꼴랑 호위무사 하나만 대동하고 여기에 왔다.

동해상방은 소금 전매권을 손에 쥐고 막대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충분한 무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행여나 다른 상방이나 사파에서 무력으로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고용한 무인의 숫자는 무려 이십여 명을 넘어갔다.

고용된 무사들 중 몇몇은 심지어 일류고수였으니, 풍백이 대동하고 온 호위무사 하나 정도는 전혀 두렵지 않게 된 것이다.

‘적당히 협상을 파행으로 끌고 가서 무력으로 조질 생각을 했었는데, 고맙게도 이렇게 알아서 시비를 걸어 주니 일이 편하게 됐네.’

풍백은 어깨마저 움츠러뜨리고 앉아서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적가상방의 대리인일 뿐입니다. 나를 죽인다고 전매권이 동해상방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굴 병신으로 아는 건가? 그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이제 어쩌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대로 보내 준다면 바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그리고 전매권도 내놓도록…… 하지요.”

잔뜩 주눅 든 풍백의 말에 여만경은 상체를 풍백 쪽으로 기울이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나를 병신으로 보는 거구나. 네가 전매권을 내놓는다고?”

“지, 진짭니다! 우, 우리도 상산현을 장악하고 있는 동해상방과 분란을 일으키면서까지 소금을 얻을 생각은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가 도착한 이후로 전매권을 아직 행사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이건 전부 동해상방과 협상한 이후 움직이려는…….”

“그럴 수도 있겠지. 네 말이 전부 사실일 수도 있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말이야, 만약에 네가 항주로 가서 입 한번 잘못 털면? 그러면 우리는 그냥 죽는 거야. 그런데 너를 여기서 보내 줄 수 있겠어?”

여만경의 말에 풍백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서, 설마 우리를 죽이겠다는…….”

“쯧쯧…… 너무 우리를 야만적인 사람들로 보는구나. 죽일 생각이었다면, 네놈을 이곳까지 부르지도 않았겠지. 당장 무사 몇 명을 보내면 네 모가지를 들고 돌아왔을 테니까.”

당장 죽이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급격히 빨라지던 풍백의 호흡이 차츰 가라앉았다. 적어도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너를 보내 줄 수도 없는 일이지.”

“그러면…….”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이 앞에 있는 객잔 별채에 머물고 있었지?”

“……그렇습니다.”

“그곳에 숨소리도 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음식을 끼니때마다 가져다줄 테니까. 그러면 적어도 네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테야.”

풍백의 얼굴이 굳어 갔다.

“저를…… 감금하겠다는 말이십니까?”

“감금이라는 말은 조금 그렇군. 그냥 장기적으로 초대를 받아서 머물고 있다는 말로 하자고. 그게 서로 좋지 않겠어?”

“부, 불가합니다! 당장 적가상방에서 제가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저를 찾아서 누군가가 이곳에 올 것이란 말입니다!”

이런 풍백의 반응에 여만경이 잠시 펴졌던 표정을 다시 험악하게 만들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목구멍에 바람구멍 하나 더 내 줄까?”

위협이 아니라는 듯이 여만경은 책상에 올려놨던 단도를 쥐었다. 그 모습에 풍백이 의자가 덜컥거릴 정도로 놀라며 상체를 뒤로 피했다.

그 모습을 비릿하게 웃으며 바라본 여만경이 말했다.

“너를 찾아 누군가가 이곳에 온다면, 그건 그때 고민을 해 보자고.”

말은 이렇게 했어도 누군가 정말 풍백을 찾아온다면, 슬쩍 처리해서 어딘가에 묻어 버릴 생각이었다.

여만경의 계획은 아주 단순했다.

일단 소금 전매권을 쥐고 있는 풍백을 가둬 두고 그 권리를 동해상방이 일임을 받은 것처럼 행동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끌면서 포정사와 다시 재협상 과정을 진행하며 소금 전매권을 찾아오는 것.

그게 여만경의 계획이었다.

당연히 나중에 포정사에게 추궁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정사가 쓸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동해상방을 제어할 자신이 있었다면, 벌써 포정사가 적가상방에게 전매권을 넘겨주지 않고 직접 동해상방을 작살내려고 했을 테니까.

“그, 그건…….”

이런 여만경의 계획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어도, 적어도 오랜 시간 감금을 당할 처지에 놓인 풍백이 입만 더듬거릴 뿐이었다.

여만경은 그런 풍백을 보며 피식 웃었다.

“쫄지 마. 네가 도망치려고 하거나,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만경의 눈은 마치 핥듯이 풍백의 뒤에 서 있는 문약란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여만경 뿐만이 아니었다.

동해상방의 중역들 역시 풍백이 대답도 제대로 못하던 때부터 경쟁하듯이 문약란을 정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오늘 밤에 풍백이 있는 별채로 누군가 문약란을 노리고 들어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를 느낀 문약란이 가늘게 몸을 떨며 풍백의 뒤로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녀는 이런 가녀린 듯한 모습이 저들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애들아, 손님 가신단다. 거처까지 잘 모셔다 드리고 오도록 해라.”

여만경의 말에 무사들 대여섯 명이 앞으로 나서서 풍백 일행을 포위하듯이 에워싸고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동해상방 중역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으하하하!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상인 새끼들은 하나같이 이 꼴이라니까! 남의 돈을 먹으려면 제 목숨을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걸 잘 모른다고!”

“그러니까 말이야. 겁 좀 준다고, 아주 병신이 따로 없더라고.”

“그거 봤어? 호위무사 놈도 우리 무사들이 우르르 들어오니까 겁을 먹고 움찔하는 거 봤냐고.”

“아주 가관이었지. 호위무사란 놈이 그런 수준이라니, 적가상방이란 곳도 알 만하구만.”

풍백과 고우길을 조롱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환희가 가득했다. 생각보다 풍백이 더욱 유약했기에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는 도중, 한 사내가 크게 외쳤다.

“그 시비 아주 맛깔나게 생겼던데?”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중역들이 너도나도 소리쳤다.

“아주 한입에 먹어도 비리지 않을 것 같더군.”

“오늘 밤이라도 쓱싹하러 가야겠어.”

“어허! 어디서 먼저 손을 뻗으시려고 하실까? 손을 댄다고 하더라도 내가 먼저…….”

여만경은 중역들이 지껄이는 음탕한 말을 듣다가 이내 소리쳤다.

“모두 입 닫아.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인가?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포정사하고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행동을 조심하라고 했었지 않나?”

그 말에 중역들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사실 여만경이 동해상방의 상방주라고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중역들은 위치는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열 개의 흑도패가 모여서 만든 동해상방이고, 여만경이 다른 중역들의 흑도패보다 조금 더 세력이 컸지만 그게 큰 의미를 가질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여만경의 말은 미리 협의했던 얘기였기에 그저 시선을 피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속마음은 조금씩 달랐다.

‘저렇게 예쁜 시비를 데리고 있을 줄 알았나.’

‘면사를 치운 얼굴도 봐야지. 면사 아래는 박색(薄色)일지도 모르잖아.’

‘이거 방주가 먼저 손대려고 수작부리는 거 아니야?’

‘오랜만에 몰래 담 한번 타야겠어. 저 여자는 내 거라고.’

이런 중역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만경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며칠 동안은 분위기를 살피자고. 혹시 지현대인이 뭐라고 나올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리고 지현대인이 딱히 움직이는 분위기가 아니면…… 계획대로 하는 걸로 하자고.”

“그럽시다.”

“알겠습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오늘 저녁에 일이 성사된 걸 기념해서 가볍게 한잔할 사람 있소?”

* * *

동해상방 무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객잔 별채로 돌아온 풍백은 가장 먼저 문약란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어깨를 잡은 풍백의 손으로 가늘게 진동이 전해졌다.

풍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괜찮아?”

“네, 네…….”

동해상방에서 너무나 노골적인 더러운 시선을 받으며,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싶은 상황이었기에 크게 놀란 문약란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진정하지 못하고 격하게 뛰고 있었다.

풍백은 문약란에게 미안했다. 설마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

문약란은 풍백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앞에서 연기를 하더라도 그러려니 할 줄 알았다.

‘하긴, 그놈들이 소란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심하게 더럽기는 했지.’

풍백은 아직도 가늘게 떨고 있는 문약란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네게 어떤 문제가 일어날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그 말에 문약란의 떨림이 점차 줄어 갔다.

“알아요.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적 공자님이 저를 구해 주실 거라는 걸요.”

벌써 두 번이나 풍백이 그녀를 구해 줬다.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며 죽음만을 떠올리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렇기에 방금 풍백이 한 말이 절대로 빈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문약란이 진정한 것 같자 풍백이 옆에 있던 고우길을 불렀다.

“고 무사님.”

“네, 도련님.”

“지금부터 상황이 안정되었다고 제가 말하기 전까지, 고 무사님의 임무는 저를 호위하는 것이 아니라 소란이를 호위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반론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미 풍백이 얼마나 강한지 충분히 알고 있던 고우길이었다. 그렇기에 문약란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문약란을 달래서 방으로 보낸 풍백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일부분은 예상했던 대로군.’

여만경과 동해상방이 호의적으로 나오지는 않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했다. 일꾼들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 전매권이 풍백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무력을 과시할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동해상방이 과거 흑도패였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엄연히 상방의 탈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 적어도 협상을 하려는 노력 정도는 할 줄 알았다.

협상의 결과에 따라 어느 정도 손해가 발생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일꾼들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무기가 있으니 최대한 손해를 보지 않는 방향으로 조종하려고 할 것이라 예상했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풍백의 생각과 달리 동해상방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법과 원칙을 따르며 일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법과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정말 쉽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딱 한 번만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쉬워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쉽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만큼, 만약 법과 원칙을 따르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 그 대가는 상상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동해상방이 협상을 시도했더라면 풍백 역시 어느 정도까지는 협상을 할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저들이 무력을 내세운 순간, 이제 협상은 의미가 없어졌다. 여만경을 포함한 저들은 정상적인 협상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법과 원칙을 따르지 않기도 한 놈들을 상대하는 것에는 아주 익숙했다. 과거 군부에서 받은 임무들은 대부분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 일이었으니까.

‘오랜만에…… 이전처럼 작업을 해야겠네.’

풍백의 눈에서 시린 예기가 흘러나왔다.

풍백은 자신이 선인이라 생각하지도, 정파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적어도 이전처럼 후회만 가득한 삶을 살지 않기만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해상방에 관련해서는 과거와 군부에서 배운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0